길가 은행잎은 아직 여름을 안고, 높아만 가는 하늘일랑 아랑곳하지 않고 내내 푸르름으로 이 가을을 지내려나 보다. 설악산 대청봉에 물든 가을이 시속 1킬로미터로 하강하고 있다니 얼마쯤 지나면 노랑물감을 이곳저곳에 뿌려놓겠지.   시외버스 터미널을 따라 쭉 뻗은 도로를 따라가 본다. 한 두 송이씩 마주치는 코스모스는 예년과 같이 하늘거리며 웃고 있다. 서천의 물빛은 이미 단풍놀이 전야제의 들뜬 표정으로 해맑게 여유로이 흐르고 있다.   조금 가다 보면 주택가 한 귀퉁이에 날씬한 당간지주를 만나게 된다. 이곳이 신라 26대 진평대제 19년 완공한 三郞寺 터이다. 삼랑(三郞)이란 세 명의 화랑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세 명의 화랑들의 명복을 빌어주려고 창건하였는지, 아니면 세 명의 화랑들이 마음껏 기개를 펼칠 수 있도록 부처님께 발원하려고 창건했는지, 자료가 실전(失傳)되어 명확하게 밝히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고 하겠다.   때는 신라의 승려 담육과 화랑오계 및 걸사표의 주인공인 원광법사, 서동과 선화공주를 위해 익산의 금을 신라궁전에 보내고 미륵사 연못을 메워준 지명법사 등이 중국으로 불법을 구하러 가던 시절이었다.   이로 미루어 보면 본격적으로 신라에 불교가 제자리를 잡아가던 때임을 짐작케 해준다.   또한 진평대제 9년에는 대세와 구칠이가 해외(남중국)로 달아나 버린 때이기도 하다. 대세와 구칠이는 ‘이 좁은 신라의 산골 속에 있어서 일생을 보내면 저 창해(滄海)의 큼과 산림의 넓음을 알지 못하는 물고기나 날짐승과 무엇이 다르랴! 내 장차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오(吳) ? 월(越)로 들어가 스승을 찾아 도를 명산에서 수도하려고 한다’라고 외치며 남해에서 중국으로 떠났다고『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전한다.   아마도 이때가 되면 신라의 국력이 팽창하여 더 이상 국내에서의 공부로는 부족하다는 서라벌인들의 의식이 투영된 것일 것이다.   진평대제는 개국시조 박혁거세 거서간 다음으로 54년간 임금의 자리에 있게 된다. 아버지 동륜태자가 보명궁주와의 사통을 위해 담장을 넘다가 큰개에게 물려죽게 되자, 작은아버지 금륜태자가 왕위에 올라 진지대왕이 되고, 진지대왕은 서라벌 색녀(色女) 미실과의 약속을 어긴 것 때문에 왕위에 오른지 4년 만에 폐위되고 만다. 백정은 어렸지만 즉위를 하여 진평대제가 된다.   진평대제 치세에는 수많은 전쟁을 치르게 된다. 백제와의 전쟁뿐만 아니라 고구려와도 끊임없이 영토분쟁을 겪게 된다. 이 와중에서 진평대제는 화랑들을 나라의 간성으로 키우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원광법사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짓게 하여 화랑들의 정신무장을 강화하고, 연이어 화랑들이 호연지기를 펼칠 수 있도록 화랑들에게 명산대천으로 유람을 장려하였던 것이다.   이에 다섯째 거열화랑(居烈花郞), 여섯째 실처화랑(實處花郞), 일곱째 보동화랑(寶同花郞)이 금강산으로 유람을 떠나려고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혜성이 나타나 삼화랑은 여행을 그만두려고 하였다. 이에 융천사가 <혜성가>를 지어 불렀더니 괴변이 사라지고 일본 군사도 저들 나라로 돌아가는 일이 일어났다. 이는 곳 혜성이 요성(妖星)이 아니라 이성(利星)이라는 말이 된다. <혜성가>를 현대어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예전 동해 물가 건달파가 놀던 성을 바라보고 ‘왜군이 왔다’고 봉화를 사룬 변방이 있어라. 세 화랑의 산 구경 오심을 듣고 달도 부지런히 등불을 켜는데 길 쓸 별을 바라보고 혜성이여 사뢴 사람이 있구나. 아으 달은 저 아래로 떠 갔더라 이 보아, 무슨 혜성이 있을고. 이 노래에 묘사되어 있는 건달파(乾達婆)는 불교문헌에서는 음악을 맡은 귀신이라고 한다. 또한 현대어 ‘건달’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특히 향가 <혜성가> 노랫말 중에 일본병이 물러갔다고 하는 부분이 들어있다. 사실 사서 기록을 보면 왜가 신라의 변경을 침범했다는 기사는 21대 소지마립간 19년 기록이 마지막이라고 <삼국사기>에는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금관가야가 23대 법흥왕 19년에 신라에 항복하게 되고,     또한 고령가야도 24대 진흥왕 23년에 이사부와 사다함이 정벌하여 멸망하게 된다. 가야의 멸망과 비슷한 시기에 왜의 신라국경 침범 기사가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에서 짙은 연관성을 발견하게 할 수 있다.   최근 가야? 왜 연합해상왕국설이 제기되어 학계에 주목을 받고 있다. 아직 더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야 전모를 밝힐 수 있겠지만, 가야와 왜는 분명히 상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   신라 30대 문무대왕의 유언으로 그 아들 31대 신문왕은 경흥법사를 국노(國老)로 삼아 삼랑사에 주석하게 한다. 이때 경흥이 갑자기 병이 들어 여러 달 고생하고 있었는데, 그 병을 남항사 11면 관음보살이 현신하여 삼랑사로 와서 경흥의 병을 고쳐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경흥법사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경흥이 하루는 대궐에 들어갈 때 종자들이 동문 밖에 말과 말안장 신과 관모를 화려하게 장식하여 행차하니 행인들이 모두 이를 보고 길을 비켰다. 궁에서 일을 마치고 나올 때 하마대(下馬臺) 위에 외모가 초췌한 한 스님이 손에 짝지를 잡고 등에 부개를 지고 와서 서 있었다. 그 부개 안에 마른 고기가 들어 있었다.   경흥의 수행원들이 스님을 보고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승려의 옷을 입고 어찌 불도(佛徒)가 금하는 고기를 지고 있느냐’고 하니 거사가 말하길 ‘두 다리 사이에 살아있는 살을 낀 것보다 저자의 마른 고기를 지고 있는 것이 무슨 부끄러움 있느냐’ 하고는 가벼렸다고 한다.   지금 이곳 삼랑사터엔 황랑한 바람만이 날아들 뿐 그 어디에도 세 화랑들과 융천사 그리고 경흥법사의 흔적은 없다. 그러나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조를 보면 ‘신라인은 스스로 소호김천씨(小昊金天氏)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고 한다(신라의 국자박사 설인선이 찬한 김유신비 및 박거물의 찬이요 요극일의 글인 삼랑사비문에 보인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인 고려시대까지도 삼랑사는 존재하였다고 판단된다.   비록 지금의 삼랑사는 쇠락하여 형체를 알아볼 수는 없지만, 화랑들의 높은 기개와 그들이 불렀던 향가 <혜성가>는 오늘도 서라벌 골골을 적시며, 우리들에게 밝은 희망의 나래로 이끌어 주고 있다. 단풍이 땅에서 보다 하늘에서 더욱 뭉게뭉게 피어나 김유신 장군묘역을 감싸 안고 있다. 융천사가 아직 서라벌을 떠나지 않았나 보다.   박진환 프리랜스 기자<pjw322@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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