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압지에서 출토된 명문기와에는 ‘의봉4년(679년)’과 ‘조로2년(680년)’이라는 ‘중국연호’가 나온다.
삼국사기 연표를 보면 ‘의봉’이라는 연호는 676년(의봉원년)부터 678년(의봉3년)까지 사용하였고, 679년은 ‘조로원년’이고 680년은 ‘영륭원년’으로 되어 있어서 문화재 공부를 시작하는 초보자의 입장에선 햇갈릴 때가 많다.
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책을 뒤지다 중국 당나라 역사서인 ‘신당서’를 읽어보니 그 의문이 풀렸다. 679년도는 중국 당나라 고종황제 재임시절이다. 679년 음력 6월에 연호를 ‘의봉’에서 ‘조로’로 바꾸었고, 780년 음력 7월에 ‘조로’라는 연호를 ‘영륭’으로 바꾸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679년은 ‘의봉4년’이라는 연호와 ‘조로원년’이라는 연호가 함께 사용되었고, 680년은 ‘조로2년’과 ‘영륭원년’이 함께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의봉4년’명 명문기와가 나왔다는 것은 679년 6월 이전에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조로2년’명은 680년 7월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보면 타당하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고구려와 발해가 고유의 연호를 사용하였으나, 그 외는 대부분 중국의 연호를 차용하였다. ‘연호(年號)’라는 것은 본래 제왕이 즉위 원년에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대외에 공표하는 것으로서, 죽은 후에 제정되는 중국의 ‘시호’와는 정반대의 발상이다.
중국의 연호는 명나라 ‘흥무’이후로부터는 ‘1세1원’ 즉 한 황제의 재임기간동안은 한 가지 연호만 사용하였으나, 그 전까지는 황제의 임기중에도 특별한 사건이나 새로운 정책을 발표할 때는 연호를 바꾸어 몇 가지 연호를 사용하곤 하였다.
그런데 문무왕 19년(679년)에 8월에 동궁을 지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으로 볼 때 ‘의봉4년개토’라는 명문기와는 삼국사기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사이의 신빙성을 높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아마 679년 8월은 엄밀히 따지면 ‘조로원년’이지만 기와는 6월 이전에 만들어 두었을 수도 있고, 요즈음처럼 전화 통신의 발달이 없었고, 인편으로 중국과 신라사이에 교류를 할 때는 중국의 연호는 6월에 바뀌었지만 통일신라 왕궁까지 소식이 전해지기까지는 몇 달이 걸렸으니 그렇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679년을 전후하여 중국의 연호를 보면 679년(의봉4년,조로원년)부터, 680년(조로원년), 681년(영륭원년), 682년(개요원년), 682년(영순원년), 683년(홍도원년)까지 매년 중국의 연호가 바뀌어 중국 당나라 조정에 복잡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음을 알 수가 있다.
그 이유인즉 683년은 고종황제가 죽고, 중종이 즉위한 해이다.
의봉원년(676년)은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668년)시키고 삼국을 통일한 이후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당나라와의 싸움에서 이긴 해이고, 당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생겨난 해이다.
이때는 고종황제가 이미 병이 들어 측천무후가 실권을 휘두르던 시기이며, 고종과 측천무후 사이에 난 태자 ‘홍’이 675년에 독살되었고, 홍의 동생 ‘현(賢)’이 태자가 되었으나 역시 측천에 의해 ‘현’이 태자에서 폐위되고, 680년 현을 대신하여 태자가 된 영왕 철이 이름을 현(顯)으로 개명하는데 그가 훗날 683년에 중종황제가 된다.
‘의봉’이라는 연호기간동안 중국의 태자였던 현(賢)이 바로 그 유명한 ‘장회태자’이고 고종과 측천무후가 함께 안치된 건릉에 배장되었고, 장회태자의 묘에서는 수많은 유물이 나왔는데 그중에 묘의 동벽에 그려진 ‘객사도’혹은 ‘예빈도’에는 장회태자가 생전에 외국사신을 접견할 때 찾아온 각 나라의 사신들 그림이 있는데 ‘조우관’을 쓴 사신이 바로 신라의 사신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리고 장회태자의 묘 벽화에는 ‘분재’ 그림이 나오는데 당나라 때부터 중국에서는 이미 분재가 성행했음을 증명해주는 고고학 자료가 되기도 한다.
680년에 장회태자가 모친인 측천의 미움을 받아 폐위되고 영왕 철이 태자가 되었다는 역사기록과 연호가 ‘조로’에서 ‘영륭’으로 바뀌것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후 해마다 중국 연호가 바뀐 것 또한 고종말년 측천무후의 실권하에 벌어진 중국 황실의 복잡한 사연을 말해준다.
학문이 뛰어나 ‘후한서’의 주를 만들기도 하였던 고종의 황태자 이현. 그러나 그는 그의 생모가 측천이 아닌 측천의 언니 한국부인이라는 소문에 고민하다 타락하고 측천에 의해 폐위되고, 측천이 제위에 오른 뒤 자살을 명받은 슬픈 인생을 마감하였다. ‘의봉4년’과 ‘조로2년’은 바로 그 이현이 태자로 있던 시절의 중국연호라는 점에서 안압지를 찾을 때마다 장회태자의 삶과 중국황실의 복잡한 사정을 떠 올리곤 한다.
그냥 보고 지나치기 쉬운 안압지 출토 명문기와 속에 있는 ‘중국연호’ 몇 글자 속에도 그 사연을 파고들면 정말 복잡하면서도 애절한 중국황실의 권력투쟁과 권력이동의 역사가 살아 숨쉰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평범한 문화재산책과 답사의 의미와 가치가 한층 높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