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을 출발하여 이 곳 산서성의 평요에 오기까지 우리는 주로 박물관과 사찰, 석굴 등만을 찾아 다녔다. 사찰에서는 불상과 벽화 등에 대한 강의가 어김없이 이어졌고, 박물관에서는 관심 있는 분야의 방을 찾아 분주히 뛰어 다녔다. 늦은 시간까지 답사를 강행하는 바람에 자정을 넘겨서 저녁식사를 할 때도 있었지만 누구도 힘들어 하는 사람이 없었다. 중국은 유난히 구호가 많은 나라이다. 관공서인 듯한 건물의 외벽에는 예외없이 ‘열정 복무’라는 구호가 붙어 있었다. 무엇이든 열정적으로 하자고 독려하는 중국인들처럼 우리의 답사도 가히 열정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은 평요고성에 가는 날. 이동 거리가 짧아 비교적 여유 있는 답사 길이었다. 빠르게 현대화 되어가는 중국의 현실을 벗어나 수 백년 전의 중국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는 날이었다. 버스 터미널인 듯한 광장에 줄지어선 차량들을 헤집고 들어 선 고성. 그 곳에는 활기 찬 중국인들과 수많은 관광객들이 어우러져 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거리에는 자전거와 행인들로 붐비고 길 양 옆에는 홍등이 걸린 전통가옥과 형형색색의 상점들이 줄지어 있었다. 평요고성은 2천700여년 전인 북위 초에 세워졌고 명나라 홍무 3년(1370년)에 지금의 성곽을 건축하여 청대 말기까지 보수와 개축을 계속하였다. 지금의 건물들은 대부분 명·청 시대의 것으로 주택은 물론 상가나 관공서까지 보존이 잘 되어있고 주민들이 실제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성의 높이는 10-12m 정도이고 성의 둘레는 6.4Km로, 네 개의 누각과 6개의 문이 있었다. 성 밖에는 해자(垓字)를 만들어서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는데 그 넓이가 4m정도였다. 우리가 들어간 서문(鳳儀門)은 2중 구조로 되어 있었으며 적을 막기 위해 사용했던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상가들이 늘어선 남대행(南大街) 한가운데 우뚝 서있는 높이 18.5m의 市樓를 통과하여 들어가 본 거리는 옛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명·청 시대가 배경이 되는 드라마나 영화는 주로 이곳에서 찍는다고 하였다. 평요의 옛 관청은 縣衛 박물관이란 이름으로 보존되어 있었고, 청대(1823년)에 세워져서 약 1세기 동안 번창하였다는 중국 최초의 민간 은행 日昇昌도 작은 박물관이 되어 관광객을 맞고 있었다. 한여름 무더위에도 아랑곳없이 수많은 관광객들이 줄을 이었고, 그들을 안내하는 중국인 여성 가이드의 빠르고 열띤 금속성 목소리에 기가 질려 쫓겨나 듯 거리로 나오니 주변 상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끈질긴 호객에 끌려 상가에 들어가 봤지만 중국의 여느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물건 값이 제멋대로이다. 마침 데리고 간 중학생 아들을 시켜 부채를 하나 사오라 했더니 흡족한 얼굴로 돌아왔다. 50위엔 하는 것을 깎아서 10위엔에 샀다는 것이었다.스스로 흥정해서 가격을 깎았다는 것을 자랑스러워 하였지만 물건의 질을 봐서는 10위엔도 비싸다고 생각되었다.   <사진설명>①평요성의 서문 ②시루가 이는 남대  가 ③성위에서 내려다 본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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