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토가 부의 척도이던 시절에는 농산물의 소출을 따져서 천석꾼 만석꾼으로 불렀다. 경주의 교동 최씨는 12대에 걸쳐 만석꾼이었다. 그 집안이 오랫동안 부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100리 안에서 거주하는 사람들 가운데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이웃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공동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거기에다 아버지는 술로 세월을 보냈으니 집안은 점점 더 가난했다.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집안일을 돕기 위하여 산에서 나무를 했다. 도두랑산 한 자락을 걸치고 남산에 올라 소나무를 베어 잘라서 서너 덩어리를 지게에 얹으면 빠듯하게 한 짐이 되었다.농사철이 되면 벼, 보리, 밀, 콩 등 수확한 농산물을 집으로 운반해야 하므로 또다시 지게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린 나는 가난하게 사는 것이 남들에게 부끄러웠고 지게를 지는 것은 죽기만큼 싫었다.
내가 다녔던 시골학교는 한 학년에 2개 반씩 남녀 혼합 반이었다. 우리반에는 여학생 중에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 있었다. 어린 내가 곡식단을 지고 집으로 올 때는 반드시 그 집 대문을 지나야 했다. 그 여학생이 보면 어쩌나 싶어 늘 총총걸음이 되곤 하였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사는 그 여학생이 부러웠으며 한편으로는 막연하게 그녀에게 끌렸었다.그 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각각 다른 학교로 진학하게 되었으나 내 마음 한 구석에는 늘 그 여학생이 자리잡고 있었다.그 여학생은 승승장구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하여 잘 산다는 소식을 가끔 귓전으로 들으면서 나는 공무원으로서의 내길을 열심히 살았다. 돌아보면 흐르는 물보다 더 빠른 세월, 나는 공직에서도 퇴임했고 2년 전에는 아내를 저 세상으로 먼저 보냈다. 집안은 외로움으로 가득 찼고 그 외로움의 공간을 메우기 위하여 지나온 세월을 반추하며 지내다보니 친구들이 나에게 좋은 여자친구를 소개해 주겠다며 자주 농담을 걸어온다.
언젠가 친구들과 온천나들이를 가서 하루 묵게 되었다.여럿이 한방에 자면서 이야기보따리를 풀게 되었는데 달변가인 한 친구가 주변 이야기를 독차지하면서 아득하게 멀기만한 동기생들 이야기까지 들려주었다.그 이야기 중에 인물이 반듯한 친군데 과부가 되어 혼자 살고 있는 동기생 이야기를 꺼냈다. 그 순간 귀가 번쩍했다. 내색은 안했지만 어린시절 내가 마음속으로 품고 있었던 여학생이었다.그러나 70이 넘은 나이에 만나서 무엇을 하겠나 싶어 가슴에 다독다독 묻어두고만 있었다. 하기야 만년에 만나서 행복한 노후를 보낸다는 노부부들의 이야기가 메스컴에 가끔 오르내리고 그런 내용을 담은 영화 ‘나는 죽어도 좋아’ 가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도 한다.70대 노인들의 열정적인 사랑도 사춘기적 못지않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며 외로운 날에는 그 여인을 떠올려 볼 때도 있다.
인생이란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적 동경하던 여인이 홀로 되어 있고 나 역시 홀아비가 되어 60년 전의 추억을 더듬어 다시 만날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니.... 지게꾼 소년의 사랑이 드디어 이루어진다. 로메스그레이. 따사로운 봄기운이 감도는 날 부질없는 생각을 해보았다.
약력>>전직 공무원한올문학 수필부문 신인상 당선.경주수필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