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신문왕릉(일명 효소왕릉)은 잘 알려져 있지만 정작 傳신무왕릉을 찾는 이는 드물다. 전 신문왕릉에서 7호 국도를 따라 2킬로미터쯤 남쪽으로 가다 만나는 LPG주유소 부근에서 좌회전하여 철로를 지나 500미터쯤 올라가면 최근 개발붐이 일고 있는 도동택지구획정리지구가 나오는데, 차를 세우고 북쪽을 바라보면 남북으로 길게 일렬로 늘어선 마을 한복판에 소나무가 울창하고 그 속에 신라 45대 신무왕릉이 답사자를 반긴다. ▶신라 45대 신무왕릉 전경   우징(훗날 신무왕)은 흥덕왕의 신임으로 시중벼슬을 두 번이나 맡았지만, 자신의 아버지 김균정이 상대등에 임명되자 부자가 함께 벼슬에 있을 수가 없다고 흥덕왕께 해직을 청원하였고, 대아찬 김명이 시중 자리를 이었다. 아버지 때문에 스스로 시중에서 물러난 김우징과 그 덕분에 시중 자리에 오른 김명과의 인연은 후에 큰 악연으로 돌변된다. 흥덕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왕위 자리를 두고 김균정과 조카인 김제륭간의 권력싸움이 벌어졌을 때, 우징은 김양과 함께 아버지 균정을 왕으로 추대했으나, 자신이 자진 사퇴한 시중자리를 이은 김명의 지지를 받은 사촌 제륭일파에 밀려 작전상 후퇴를 했고 아버지 균정이 살해되는 비극을 맞는다. 제륭(희강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김명(민애왕)에게 살해되었고, 아버지의 한을 품었던 우징은 청해진 장보고의 지원아래 김양의 도움으로 민애왕을 죽이고 정월달에 왕위(신무왕)에 오르지만 그 해 7월에 병으로 죽었다. 그렇게 오르고 싶었던 왕좌인데 불과 6개월 만에 병으로 죽은 신무왕의 이야기에서 신라 후대 왕족들의 비극적인 삶의 한 단면을 보게 된다. 흥덕왕 사후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 간에 벌어지는 왕권다툼과 거기에 등장하는 균정,제륭,명,우징,양,배훤백,장보고,정년 등 인물들의 이야기 또한 사극과 역사소설의 소재로 부족함이 없는 흥미진진한 것들이 많다. 그러나 그 시기 중국의 역사를 비교해보면 결코 신라왕조만의 흔들림은 아니었다. 당나라와 통일신라는 밀접한 교류를 했었고, 흥망의 길 또한 함께 걸었음을 알게 된다. 신라 42대 흥덕왕이 왕위에 오른 826년부터 희강왕, 민애왕을 거쳐 신무왕이 왕위에 올랐다 죽은 해 다음해인 840년까지 중국의 황제는 문종이었다. 연호는 ‘태화’와 ‘개성’을 사용했는데, 태화는 흥덕왕 재임시절과 일치하고 희강왕과 민애왕 신무왕의 권력다툼 기간은 ‘개성’연호기간이다. 당나라 문종황제 재임시절 그 유명한 ‘감로의 변’이 일어났다.중국 역사에 귀족간의 당쟁과 아울러 환제의 외척과 환관의 횡포 또한 당이 멸망한 이유 중에 하나이다. 측천무후 때 점차 세력을 얻어 현종시기에 3천명 이상이 된 환관들은 중국황제에 밀착하여 권세를 휘둘렀는데, 당나라 12대 목종(재위 820~824)때부터 당왕조 멸망 직전인 제19대 소종(재위 889~904)까지 여덟명의 황제 가운데 환관이 옹립하지 않은 황제는 13대 경종 뿐이었다. 이러한 환관의 횡포를 막으려고 문종은 봉상번진의 절도사 정주와 함께 중앙환관을 몰살하려고, 궁궐 정원의 석류나무에 거짓으로 감로가 내렸다고 하고 이를 보려고 환관들이 모이면 한꺼번에 죽일 계획이었으나 바람이 불어 복병들이 숨은 천막이 벗겨져 탄로나서 환관의 금군에게 정주등이 죽임을 당하고 문종은 “짐은 가노(환관)에게 눌려 어떻게 할 수도 없다”라고 옷깃을 적시며 울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태화’연호를 사용하던 문종황제는 ‘감로의 변’이후 ‘개성’으로 연호를 바꾸었고 환관들에게 물려 허수아비 황제노릇을 하였는데, 이 ‘개성’연호 기간동안에 신라에서는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 간에 드라마틱한 권력투쟁이 벌어졌으니 어쩌면 중국황실보다는 역동적인 역사였는지 모른다. 인적이 드문 신무왕릉을 찾아서 삼국사기를 펼치고 중국역사서를 펼쳐보니 비록 신라 후대 왕권을 놓고 왕족간의 치열한 다툼은 있었지만 중국처럼 환관에 눌려 지낸 나약한 왕들은 결코 없었다는데 한 가닥 위안을 얻어 본다. 신라 45대 신무왕릉. 인적이 드물어 조용하지만 찾으면 찾을수록 뭔가 깊은 역사적 이야기 거리가 끊임없이 솟아나는 가을답사지로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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