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강읍 강교1리(江僑一里) ‘야일(也日)’ 양지에 둘러싼 산 모양 ‘也’자  흉년에 죽 한 동이와 바꾼 ‘죽번디기’       강교는 안강에서 영천으로 넘어가는 시티제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다.   시티제를 사이에 두고 영천시 고경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어림산을 경계로 현곡면 내태리와도 맞닿아 있다. 안강읍 두류리와 하곡리에 이웃한 이 마을은 안강에서 28번 국도를 따라 영천방면으로 가다가 딱실못을 지나 시티제를 오르는 오르막길이 시작되는 지점으로부터 좌우로 펼쳐진 마을이다. 도로 남쪽으로 야일, 섬마을이 강교1리를 이루고 있고, 북쪽으로 너더리, 널기미가 강교2리에 해당한다. 강교는 본래 강서면의 ‘야일리’와 ‘판교리(너더리)’라는 2개의 마을이었는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야일리와 판교리를 병합하여, 강서면과 판교리의 이름을 따서 강교리라 하였다고 한다.   경주시청에서 26km, 약 40분 거리에 있다. 마을길이만 8km     야일(강교1리)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 모양이 어미돼지가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형국으로 마치 ‘也’자 처럼 생겼으며, 또 양지바른 곳에 마을이 자리하고 있으므로 ‘야일(也日)’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국도에서 하곡리 주막각단의 제일상회 옆길을 따라 남쪽으로 들어서면 야일천(也日川) 건너 겹겹이 둘러쳐진 산들이 빚어낸 골짜기의 아늑한 산기슭에 길게 늘어선 마을이 야일이다. 마을 어귀에서부터 오른쪽에는 ‘섬마을’(10가구)이 있고, 마을길을 따라 골짜기로 올라가면 ‘분통골’(7), ‘양지마을’(20), ‘새각단’(18), ‘음지마을’(5), ‘평지마을’(14), ‘당사마을’(15) 등이 차례로 있다. 야일은 골짜기를 따라 길게 늘어선 마을로 그 길이가 무려 20리(8km)에 이른다. 경주김씨, 평산신씨, 안동권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총 79세대에 남자 109명, 여자 111명으로 모두 2! 20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벼농사를 중심으로 단감과 포도를 생산하고 있다. 단감은 6,000여평, 포도는 5,000여평 정도이다. 감나무 줄지어 서 있던 ‘줄감낭배기’   섬마을 야일계곡과 너더리계곡이 맞닿는 부분에 있는 마을로, 마을의 삼면이 도랑으로 둘러싸여 비가 오면 마치 섬과 같다고 하여 ‘섬마을’, ‘섬말’, ‘도촌(島忖)’이라고 한다. (10가구)   분통골 마을의 모양이 분통처럼 생겼다고 하여 ‘분통골’ 혹은 ‘분곡(粉谷)’, ‘분두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7가구)   양지마을 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 마을이라 ‘양지마을’이라고 부른다. (20가구)   새각단 마을회관 앞에 있는 마을로 새로 생긴 마을이라 ‘새각단’으로 부른다. 새각단에는 옛날에 감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는 ‘줄감낭배기’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이 마을에 감나무가 많다. (18가구)   음지마을 마을회관 윗마을로 산 밑에 위치한 마을이 응달지다고 ‘음지마을’이라고 부른다. (5가구)   평지마을 평지에 들어선 마을이라 ‘평지마을’이라고 부른다. (14가구)   당사마을 가장 위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서당이 있었던 곳이라 ‘당사(堂士)마을’이라고 하였다고 하고, 또 당나무가 있었던 곳이라 ‘당수마을’이라고도 불린다. (15가구) 임금이 자주 놀러 왔던 ‘어림산’   어림산(御臨山) 안강읍의 강교리와 현곡면의 내태리, 그리고 영천시 덕정동과 답곡동에 걸쳐 있는 높이 510m의 산, 신라시대에 임금이 자주 놀러 왔던 산이라 ‘어림산’이라고 한다. 이 산에 있는 고개가 아홉 굽이라 하여 ‘아홉산’이라고도 부른다. 또 옛날 난리 때 이곳에서 아홉 명이 피신해서 살아나왔다고 ‘아홉사리산’이라고도 한다. 산봉우리의 모양이 마치 꼬깔(고깔)처럼 생겼다 하여 ‘꼬깔산’, ‘관산(冠山)’이라고도 한다.   쇠곶이 신라 때 가마터로 어림산 기슭의 큰골 못 위에 있다.    은봉곶 옛날에 은을 캐던 은광이 있던 곳으로 큰 은 덩어리가 있는데 이를 캐려니까 천둥번개가 쳐 결국 캐지 못하고 아직도 묻혀 있다고 한다. 어림산 동쪽 능선의 철탑이 서 있는 부근에 있다.   장산제(長山齊) 조선 숙종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지낸 평산인 신명화(申命和)를 추모하여 그 8대손 신해식(85 申海湜)을 중심으로 1990년에 양지마을에 세운 제실이다. 신 장군은 힘이 장사라 영천장사와 씨름 시합으로 경주사람들의 주민세를 영천사람들에게 떠넘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백원정(百源亭) 안동인 효자 권의국(權宜國)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70여 년 전 그 후손들이 새각단 산기슭에 세운 정자다. 3칸 2칸의 팔작지붕에 누마루를 갖춘 이 정자는 가운데 청마루와 양쪽에 방을 두었고, 건물 뒤쪽에서 출입할 수 있도록 지어졌다.   할미골 탯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오막하게 산등성이가 둘러져 있고, 그 가운데에 오똑하게 봉우리가 솟아 있어, 마치 여근에 남근이 들어앉은 형국처럼 기이하게 생긴 골짜기이다.   괴암골 꾀양(고욤)나무가 있었던 골짜기로 큰골의 동남쪽에 있다, 또는 괴이한 바위가 있어서 ‘괴암골’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는골 꾀양나뭇골 서북쪽에 있는 가느다란 골짜기로 마치 밭에 쟁기로 골을 타 놓은 듯이 가늘고 긴 골짜기다.   탯골 고려장을 한 골짜기로, 가는골 북쪽에 있다. ‘고려장등’이라고 한다. 고려장을 했던 흔적이 있다. 여근에 남근이 들어앉은 형국   마찻재 평지마을에서 영천시 고경면 답곡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옛날에 마차가 다니던 길이라 ‘마찻재’라고 불렀다. ‘마채골’이라고도 한다.    나탯재 서낭당이 있었다고 하여 서낭재라고도 하는데, 현곡면 내태리로 넘어 가는 고개로 큰골의 남쪽에 있다.   파곗재 영천시 고경면 파계리로 넘어가는 고개.   죽번디기 흉년이 심해 먹을 게 없을 때 죽 한 동이와 바꾸었다고 하는 들로 당수말 남쪽 버덩에 있다.   감나뭇들 옛날에 감나무가 많았다는 들이다. 분통골의 동쪽에 있는 들로 마을 쉼터 맞은편 좌측에 있는 들이다.   돌논 돌이 많았던 논으로, 당수말 서남쪽에 있다. 지금은 돌 하나 없이 땅이 좋다고 한다.   뒤치기바우 모양이 디딜방아의 뒤치기(볼씨)처럼 생긴 바위로 어림산에 있다, 집게바우 서쪽에 있다.   집게바우 집게처럼 생긴 바위로, 고깔산 중턱에 있다.   큰골못 큰골에 있는 못으로 본래 있던 것을 1942년도에 증축하여 막았다. 농업용수와 농로 확포장   이 마을은 지세가 강해 예로부터 동제를 지내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 당수나무도 없다. 옛날부터 포수들이 이 마을은 피해 갔다고 한다. 아무도 이 마을에 들어와서는 꿩 새끼 한 마리도 사냥하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도 사냥꾼들이 이 마을에서는 한 마리도 산짐승을 잡지 못한다고 한다.   이 마을은 농업용수가 부족하다고 한다. 몇 년 전 관정을 뚫어 지하수 개발하였지만 아직도 시원치 않아 관정을 몇 개 더 늘렸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그리고 좁고 비탈진 경사지가 많아 농로의 확포장이 시급한 과제라고 한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최복남 할머니(96·가암댁)로 아직 포도 한 상자는 거뜬하게 들 정도로 건강하시다. 서울지검에 권택곤(33) 검사가 이 마을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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