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세기’가 던지는 말없는 의문들 (上)   설악산 꼭대기에서는 고이 접어서 아름다운 단풍나라 선녀님들이 오늘도 사뿐이 나들이에 들떠 신이 나 있다. 아래 너머 보이는 영랑호반에는 화랑 사선(四仙)이 빈 배를 매만지며, 다가올 가을 달밤의 세레나데 준비에 여념이 없다. 천여 년 지나도록 그들의 유풍만이 쓸쓸히 호숫가 나뭇잎에 걸리어, 오락가락 흔들리며 이제나 저제나 언제쯤 진정한 화랑들의 숨결을 찾아 이곳까지 님들이 올 것인가 하는 기다림의 연속이다.   며칠 전부터 온갖 미디어들은 인문학의 위기라는 주제로 자기네들만의 어조로 시끌벅적 야단이 법석이다. 과연 인문학의 위기인가?   그렇다면 인문학의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특단의 방안은 없을까. 조금이라도 그들만의 학풍에서 벗어나면 그들이 속한 조직에서는 사망이라는 어느 중앙일간지 기사를 보면서, 과연 인문학이란 무엇일까라는 커다란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오래된 고전 책속의 진리에 함몰되어, 책 밖의 어느 지식도 파고들어 가기가 무척 힘이 들어 보이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1989년 2월 난데없이 천 삼백여년 동안이나 자취를 감추었던 <화랑세기>가 발견되었다. 부산의 국제신문에서 시작된 발견기사는 중앙의 서울신문에서 발 빠르게 원문을 성글게 번역하여 열기를 이어갔다.   이어서 지방 학계에서는 1989년 중반, 진본일 것이란 성급한 결론을 내어놓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지금 2006년, 아직도 진위논쟁은 꺼질 줄 모르게 학계의 감초가 되어, 정확한 고증이 필요한 중요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짜놓은 각본에 후학들의 연구 성과를 가져다가 얽어매기에 정신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진정 <화랑세기>는 진위를 가릴 수 없는 것일까.   1989년 발견된 <화랑세기>는 서문(序文)에 이어 1세 풍월주 위화랑부터 15세 풍월주 유신랑 첫째 쪽까지 전부였다. 그 후 1995년 서울대 노태돈 교수에 의해서 발견된 <화랑세기>는 4세 풍월주 이화랑 전기의 3쪽부터 32세 풍월주 진공에 대한 것까지 있고, 162쪽에는 간단한 발문(跋文)이 있다.   <화랑세기> 발문에는 그 전기를 편찬한 이유와 편찬자에 대한 정보가 간단히 소개되어 있어, 이 책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최소한의 코드를 제공하고 있다. 발문을 보면, 先考嘗以鄕音述花郞世譜 未成而卒 不肖以公暇 撮其郞政之大者 明其派月永之正邪 以紹先考 稽古之意 其或於仙史有一補者歟.   돌아가신 아버지가 일찍이 향음(荒<거칠:황>宗 대신에, 우리 이름인 거칠부<居柒夫> 등 으로 표기하는 것을 가리킴)으로 화랑 세보를 저술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불초자식(김대문 자신을 가리킴)이 공무의 여가에 낭정의 큰일과 파맥의 정사를 모아 아 버지(김대문의 아버지 오기공)의 계고의 뜻을 이었다. 혹 선사에 하나라도 보탬이 있을 까?   김대문은 아버지 오기공(28세 풍월주를 지냄)이 향음(鄕音 : 한자를 가차하여 신라식 우리말로 적은 것으로 판단됨)으로 기록한 화랑집안의 가승 내지 가책을 다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한산주 도독을 지내면서 공무의 여가시간을 이용하여 화랑들의 올바른 길과 그렇지 못한 그릇된 길을 가려 밝혀서, 화랑들의 역사인 선사(仙史)에 도움을 주려고 이 책을 편찬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화랑세기>를 보면, 그동안 우리들이 알고 있었던 화랑의 모습과는 너무나 판이하게 달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아니 어쩌면 머릿속의 온갖 화랑관련 지식을 총동원하여도 조금도 부합되지 아니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말 화랑들은 사통, 혼통 등으로 점철된, 오늘날 우리들의 정체성에 심각한 혼란을 줄 정도의 삶이 그들을 지배했을까. 누구라도 시원하게 이야기하기가 무척 어려운 것이 현금의 사실이다.   그러면 <화랑세기>를 조선조 말기 한 지식인의 독특한 글쓰기라고 치부하여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까. 이제 우리들은 여기에서 더 이상의 혼란을 부채질하는 진위논쟁을 제쳐두고, <화랑세기>를 필사한 것으로 알려진 남당 박창화에 대하여 약간의 정보를 수집해 보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당 박창화는 충북 청원군 오창면 ‘까치내’(충북 청원군 비석현)에서 근대화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한 강화도조약(1876:일본과 항구개항을 위한 조약) 몇 해후인, 1889년 태어났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유가(儒家) 집안 출신으로 많은 서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7살에 어머니를 잃었고, 어린 시절부터 한학을 익혔다고 한다. 그 후 그는 1900년대 초반 한성사범을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설가 김팔봉이 1976년 5월 8일자 ‘일간스포츠’에 기고한 ‘마음속에 남는 사람 - 그 시대 그 상(像) -; 영동초등학교 박창화 선생’을 보면, 박창화는 1913부터 1916년까지 영동소학교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조선어와 일어, 체조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후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일본으로 건너가 1934년 12월 11일부터 1945년 10월 31일까지 일본 궁내청 서릉부 도서료에 촉탁으로 근무하게 된다.   해방 후 그는 청주사범에서 두 학기 한국사 강의를 하였는데, 이때 강의를 들은 중앙대 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남당선생이 단군론과 강역론 및 화랑도 등에 관해 강의했으며, 화랑도는 사서(史書)에서 전하는 그 제정 시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 같다’는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2003년 숭실대 사학과 강사 박환무씨에 의해 남당이 1927~1928년 사이에 일본에서 발간되는 ‘중앙사단’이라는 역사학회지에 ‘신라사에 대하여’란 논문을 두 세 차례 발표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어린 시절 한학을 공부하였고, 이후 한성사범을 거쳐 소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간, 유학자이면서 교육자인 남당이 궁내청 도서료에 근무할 당시 필사한 것으로 보이는 <화랑세기>는 정말 김대문이 지은 것을 보고 필사한 것일까?   조선후기 신채호선생이 나라의 올바른 정체성 세우기 차원에서 강조한 것이 ‘낭가사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물론 박창화도 분명 이와 관련된 신채호선생의 책을 보았을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 만약 <화랑세기>가 남당의 창작물이라는 연구자들의 말을 그대로 수긍한다면, 과연 한학자, 역사학자이면서 특히 일제강점기 소학교 조선인 선생으로서 난잡한 화랑들의 기록인 <화랑세기>를 창작할 이유가 있었을까? 박진환 프리랜스 기자 <pjw322@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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