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가>> 화랑으로 몸을 바꾼 미륵선화 미시랑   심술궂은 ‘산산’이 영글어가던 가을을 산산이 짓밟은 직후, 그래도 가을은 높아만 간다. 높고 푸른 하늘로 곱게 단장한 참새 여럿이 모여 무엇이 그리 좋은지 함박웃음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낮은 비행으로 빠알간 잠자리 눈알을 멀뚱멀뚱하게 한다. 공교롭게도 중국 이름을 단 태풍이 마지막 한 뼘의 볕만이 필요한 온갖 과일을 사정없이 내질러 놓았다.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고집하는 중국식 땅따먹기 동북공정에 수많은 고혼들은 오늘도 쉬이 잠들지 못할 것 같아 멀리서 마음만 한없이 깊어져 간다.   시외버스터미널을 나와 서천을 따라 걸어간다. 냇물이 벌써 붉게 물드는 것을 보니 가을이 예서 얼마쯤 있을 것 같다. 갈대도 제법 바람에 살랑거리고, 귀뜰 언저리엔 한낮인데도 비형랑 무리들이 추수준비가 한창이다. ‘풀은 바람보다 빨리 눕고, 바람보다 빨리 일어난다고 했던가?’ 아무리 세찬 비바람이 앞을 막아서도, 나아갈려는 추동력을 간직한 서라벌인들에겐 그 어떤 어려움도 이젠 없으리라. 오랜 기지개를 켜고 화랑을 찾아가자, 손에 손잡고 말이다.   화랑을 통해 나라를 부흥시킬 꿈에 부풀은 때는 신라 24대 진흥왕 삼맥종(심맥종이라고도 한다) 시대였다. 7살에 큰아버지 법흥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진흥대제는 일심으로 불사(佛事)를 일으키고, 크게 신선을 숭상해서 낭자(娘子)의 아름다운 자를 가려 뽑아 원화로 삼았다고 <삼국유사> 탑상편에 전한다.   그러나 두계 이병도 박사도 지적하였지만 원화제의 시초는 이보다 휠씬 오랜 옛날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신라 2대 남해차차웅이 누이 아로로 하여금 신궁에 제사케 하는 데서 보듯이 신라의 여성단장인 원화제의 연원은 신라 개국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진흥대제 37년에 화랑을 처음 두었다고 기록한 것은 아마도 원화제가 남성단장인 화랑제로 교체되던 시기가 진흥왕대가 아닌가 한다.   다시 <삼국유사>로 돌아가 보자.   원화제를 둔 이유는 무리를 모아 인물을 선발하고, 효제충신으로써 이들을 가르치려 함이었고,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데 크게 필요한 것이었다. 이에 남모랑과 준정랑의 두 원화를 선출하니 그 모인 무리가 삼사백인이었다고 한다.   준정랑(화랑세기에는 삼산공의 딸이라고 한다)은 남모랑(화랑세기에는 법흥대왕과 백제 보과공주의 딸이라고 한다)을 질투하여 음모를 꾸몄다. 그것은 남모를 위한 술자리를 베풀고, 남모랑을 취하도록 술을 먹인 후에 몰래 북천으로 데리고 가서 돌로 쳐 죽인 후 묻어버리는 것이었다. 남모의 간 곳을 몰라 애태우던 남모랑의 무리들은 슬피 울면서 온 서라벌을 뒤지고 다녔다. 그때 그 음모를 아는 자가 있어 노래를 지어 거리의 소동(小童)을 꾀어 부르게 하였다.   마로써 서라벌 초동을 움직여 선화공주를 차지하고 백제왕위에 오른 서동이도 이 때의 준정랑과 남모랑의 이야기를 차용하여 9회말 투아웃 이후 만루홈런을 날렸던 것은 아닐까? 이내 그 노래 소리는 온 서라벌에 가득하였다. 남모랑의 무리들이 이 노래를 듣고 북천 가운데서 남모의 시신을 찾고는 더욱 화가 난 무리들은 준정을 죽이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진흥대제는 원화를 폐지하라고 추상같은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이태가 지난 후 생각하니 ‘나라를 흥(興)하게 하려면 반드시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일으켜야 된다고 하면서, 좋은 집안 남자 중 덕행있는 사람을 가려 뽑아 화랑이라고 이름하였고, 설원랑(화랑세기에는 7세 풍월주로 기록되어 있다)을 받들어 국선(國仙)을 삼으니 이것이 화랑국선의 시초였다고, 화랑제의 출발을 말하고 있다.   이후 25대 진지대왕 시절 흥륜사 스님 진자가 항상 미륵상 앞에 나아가 진심으로 원하는 맹서의 말을 하면서 “우리 대성이여! 화랑으로 몸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 내가 항상 얼굴을 가까이 하고 모시게 해주소서.” 하였다. 진자의 간곡한 정성이 나날이 깊어져갈 즈음, 어느 날 밤 꿈에 한 스님이 “네가 웅천 수원사에 가면 미륵선화를 친견할 수 있으리라” 하였다. 깜짝 놀라 잠을 깬 진자스님은 한달음에 그 절을 찾아 걸음마다 절을 하며 수원사에 이르렀다.   이때 절문밖에 아름다운 소년 하나가 반가운 눈웃음으로 진자를 인도하여 객실로 데리고 갔다. 이에 진자가 “그대는 나를 모르는데, 어찌 나를 접대함이 이렇게 융숭한 것인가?” 하고 물었다. 소년이 “나 역시 서라벌 사람이라 대사가 멀리서 오는 것을 보고 맞이했을 뿐이요” 라고 하고는 문밖으로 나가서 간 곳을 모르게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진자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그냥 우연한 일이라 생각하고는 수원사 스님에게 꿈 얘기와 여기에 온 뜻을 말하면서 “이곳에서 미륵선화를 기다리고자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그 절 스님은 “이로부터 남쪽으로 가면 천산이 있는데, 예로부터 현인철인(賢人哲人)이 머물러 있다고 하는데 어째서 그곳에 가지 않습니까?” 하였다.   진자는 스님의 말대로 산 아래에 가니 노인으로 변한 산신령이 진자를 맞이하며 “여기 와서 무얼 하려는가? 전에 수원사 문밖에서 이미 미륵선화를 보았는데 다시 무엇을 찾으러 왔는가?” 하는 것이었다. 놀란 진자는 지체없이 흥륜사로 돌아왔다. 달포쯤 후 이 소식을 들은 진지대왕은 진자를 불러서 “소년이 자기 스스로 서라벌인이라 했으니 성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거늘 어찌 성안을 찾아보지 않는가” 하였다. 진자는 사람들을 모아 서라벌 거리로 미륵선화를 찾아 나섰다.   그러던 중 영묘사 동북쪽 길가 나무 밑에서 화려하게 단장하고 눈 매무새가 수려한 소년 하나가 놀고 있었다. 놀란 진자는 달려가서 “이 분이 미륵선화이시다” 하며 물었다. “낭(화랑)의 집은 어디에 있으며 동네이름은 무엇인지 듣고자 합니다” 하니 낭이 “내 이름은 미시(未尸)인데 어려서 부모를 잃어 성은 무엇인지 모른다”고 하였다.   이에 진자는 낭을 가마에 태워가지고 대궐로 가서 왕을 만났다. 그러자 진지대왕은 낭을 국선(國仙)으로 삼았다. 그 후 화랑의 무리들은 서로 화목하고 예의로써 그를 받드니, 풍류가 세상에 빛남이 칠년이었는데 낭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이에 진자는 몹시 슬퍼하면서 일심으로 도를 닦고는 마지막에는 그 역시 간곳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세상 사람들이 말하길 “대성이 오직 진자의 정성에 감동된 것만이 아니고, 또한 이 땅에 인연이 있으므로 자주 나타난 것이다”고 하였다.   일연스님은 미륵선화 미시랑의 출현을 자세히 기록하고는 말미에 찬시(讚詩)로써 홀연히 자취를 감춘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선화(仙花)를 찾아 걸음마다   사모하는 그 모습   도처(到處)에 재배(栽培)한   공(功 )이 한결 같구나.   홀연히 봄이 돌아와도 찾을 곳 없구나.   뉘라서 알으리 경각(頃刻 : 눈 깜박이는    동안)에 상림홍(上林紅)을.   흥륜사를 알리는 화강암 표지석을 바라보며, 이곳이 그날은 영묘사였을 것인데 하며 단정한 담을 따라 걸어본다. 세차게 달리는 차량만이 보일뿐 그 어디에도 미륵선화 미시랑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담벼락을 지나자 건강한 누런 나락이 바람에 일렁이면서, 어디선가 사물놀이 한마당이 벌어지고 있는 듯하다. 홀연히 사라졌던 미시랑과 진자스님이 벼이삭 사이로 성큼 성큼 다가서고 있다. 마주 꽉 잡은 손이 가늘게 떨리며 떨리며… 박진환 프리랜스 기자 <pjw322@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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