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로서 역신을 물리친 ‘처용’
오늘 개운포는 비에 젖어 있다. 조금씩 안개가 흩날리기도 하며, 시커먼 검은 구름이 낮게 포구를 감싸고 또 한번 동해 용왕의 아들을 친견할 것 같은 예감에 기행자의 눈알은 재빠르게 사방을 살피면서 두리번거린다.
부산을 출발하여 덕하를 조금 지나니 처용사거리가 나온다. 처용로라 명명하여 제법 깔끔하게 단장하고서 탐방객을 맞이한다. 주변의 용연공단 공장들의 굴뚝이 하늘을 향해 마천루로 찌를 듯이 높이 솟아있다. 커다란 유류저장고가 연이어 있어 하늘에서 보면 마치 수련 잎이 물위에 떠 있는 형상일 것 같다.
SK주식회사 정문 앞에서 좌회전 하여 4킬로미터 거리에 동해용왕이 현신하였다는 처용암이 물위에 떠있는 조그만 배처럼 고요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녹음이 2차선 처용로를 아름답게 장식하면서 사열하는 듯한 모습을 보니, 문득 헌강왕이 서라벌에서 이곳까지 찾은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일기 시작한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의 주인공 경문왕의 태자로 왕위에 오른 신라 49대 헌강왕의 시절은 매우 태평하였다고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서울의 민가는 즐비하게 늘어섰고, 가악의 소리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왕이 시중 민공에게 말하기를 “내 들으니 지금 민간에서는 집을 기와로 덮고 짚으로 잇지 아니하며, 밥을 짓되 숯으로 하고 나무로써 하지 않는다 하니 사실이냐”고 물었다. 민공이 대답하기를 “신이 또한 그와 같이 들었습니다”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위 ‘삼국사기’의 기록을 다시 한번 되새김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부왕인 경문왕 6년 10월 이찬 윤흥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고, 8년 이찬 김예 등이 모반하다가 주살되었으며, 14년 이찬 근종이 모반하여 대궐을 범한 사건이 벌어지는 등 연이은 모반 사건으로 왕위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태자로 있으면서 모반현장을 낱낱이 보면서 자란 헌강왕이 특단의 조치를 내려 왕권을 강화하였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그러나 헌강왕대의 역사기록에는 아무런 단서도 포착되지 않는다.
다만 헌강왕은 서라벌의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포석사의 남산신, 금강령의 북악신(옥도령), 동례전연회에서 지신의 춤을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였는데 왕만 보았다하여 왕권의 신성성을 높이려고 했을 따름이었다.
헌강왕이 이곳 개운포를 찾은 것이 바로 이때였다. 나라 안 효험 있는 산신 지신께 모두 치성을 드려보아도 아무런 효과가 없자 헌강왕은 마지막 히든카드로 동해용왕을 이용하여 위기를 벗어나려고 했다는 것이 휠씬 설득력이 있는 것이 아닐까.
47대 헌안왕대에 화랑국선으로 왕의 사위가 된 응렴이 곧 경문왕이다. 역사가들은 신라는 36대 혜공왕대부터 하대 혼란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딸로 태어날 운명을 표훈대사의 도움으로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부터 약화된 왕권을 상징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하겠다.
또한 화랑 풍월주를 지내고 왕위에 오른 첫 주인공이 29대 태종 무열왕 김춘추다. 그리고 31대 신문왕 원년에 화랑이 폐지되어 더 이상 화랑이 정치 전면에 나타나지 않고 사라진다. 그러나 위에서도 살폈듯이 응렴은 헌안왕의 못생긴 첫째 딸과 결혼함으로써 화랑국선 출신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오랫동안 사라졌던 화랑국선이 역사의 전면에 다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헌안왕은 혼란한 국내정세를 삼국통일의 정신적 구심점인 화랑국선을 이용하여 바로 잡으려고 했다고 여겨진다.
헌강왕은 개운포를 찾아 동해용왕의 아들 한명을 서라벌로 데려가서 왕정을 보좌하게 한다. 이가 바로 처용이다.
헌강왕은 생긴 모습이 여느 서라벌 사람과는 다른 처용을 동해용왕의 아들이라고 하여 신이성을 부여하고, 처용 역시 역신의 침범에 용서의 춤으로써 굴복시키니 서라벌인들의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기에는 가장 적합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처용이 역신이 아내를 범하는 장소에서 불렀다는 노래가 ‘처용가’이다. 현대어로 풀어보면 아래와 같다.
서라벌 밝은 달에, 밤 새워 노니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어라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것인고
본디 내 것이다만은,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꼬.
노래를 부르며 덩실 덩실 춤을 추는 처용을 보고, 역신은 꿇어 앉아 “맹세코 공의 형용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한다. 이때부터 서라벌인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 사귀를 물리쳤다고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에는 간략한 처용 출현 배경을 적고, 이제현의 한시로서 처용의 형상을 전하고 있다.
신라 옛적에 처용 노인
저 바다 물 속에서 왔다 하네.
자개 이빨 붉은 입술로
달밤에 노래 부르며
소리개 어깨, 자주색 소매로
봄바람 맞아 휠훨 춤추었다.
이후 처용은 조선시대에 와서도 ‘악학궤범’ ‘학연화대 처용무합설’에 실려서 궁중연향에서 기녀들이 ‘처용가’를 부르고, 오방색 옷을 입은 처용무희가 현란한 춤을 추었다고 한다. 또한 조선시대 사용 악보인 ‘시용향악보’에 ‘잡처용’이란 이름으로 실려 있기도 하다.
이처럼 처용은 역사를 거듭하면서 다시 재탄생되었으며, 영원한 벽사진경의 존재로 남았다고 할 수 있다.
해마다 조선왕국 울산에서는 처용문화재가 거창하게 열리고 있다. 그러나 처용암 유적지에는 달랑 비석하나가 전부이고, 조잡하게 조성하다만 주변엔 형형색색의 접시꽃이 왜 그리 많은지 기행자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한 지역의 문화수준을 짐작하게 한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조금 떨어진 ‘개운포성지,는 바로 앞에 6차선 조선왕국도로가 나면서 아예 이곳에서 처용암을 보는 것조차 불가능 하다.
빗줄기가 애잔하게 떨어지는 처용암을 돌아 개운포성지의 흔적을 밟고 있는 기행자의 머리는 온갖 안타까운 상념으로 넘쳐나고, 무너진 성벽은 무표정하게 내리는 비를 가림없이 온전하게 맞고 있다.
박진환 프리랜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