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천읍 신평2리(薪坪2里) 섶이 많은 들이란 뜻의 ‘섶들’이 ‘신평(薪坪)’으로 선덕여왕의 예지가 빛나는 ‘여근곡’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 굳이 잠긴 잿빛의 문을 열고 나와서 하눌가에 머무른 꽃봉오릴 보아라.... 서정주의 ‘密語’처럼 일행이 찾아간 신평리는 들어서는 길목에서부터 순이, 영이, 남아를 기다리는 듯 개망초꽃, 석류꽃, 호박꽃까지 절정으로 피어 눈길을 사로잡고 있었다. 경주에서 국도 4호선을 따라 영천방면으로 가다가 건천읍 소재지를 지나면 서쪽(왼쪽)으로 부산성과 주사암이 있는 오봉산의 여근곡이 보인다. 이 여근곡 아래에 자리한 마을이 신평이다. 본래 이 마을은 개척할 당시 들에 섶(잎나무, 풋나무 등 자잘한 나뭇가지 즉 잡목)이 많이 자라고 있었다고 하여 ‘섶들’이라고 불러 오다가 굳이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신평(薪坪)’이 된 것으로 보인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신기리와 돈지리를 병합, 신평리가 되었다. 신평2리는 섭들, 가척(가잣골), 모길, 가마골, 가랑골 등 5개의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넓은 들을 지니고 있는 이 마을은 쌀이 기름지고 맛이 좋기로 소문이 나 요즘도 도시에서 직접 쌀을 사러 온다고 한다. 오랫동안 농사에 의존해 살았던 탓에 생활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지만 이웃을 챙기는 인정과 협동심은 타지의 부러움을 살 정도라고 한다. 인심 좋고, 살기 좋은 탓인지 비록 촌이지만 아직까지 빈 집이 없다고 한다. 포도농사 등으로 소득도 늘었으나 여느 마을과 다름없이 젊은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은 안타까웠다. 이 마을은 171세대에 총 417명이 살고 있으며 남자 196명, 여자 221명이다. 농사 면적은 논 98정보, 밭 32정보로 주로 벼농사에 의존하고 있고, 30년 전부터는 포도를 재배하는 가구가 늘어 현재 60가구가 6만여평에서 연간 3억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길이 너무 가깝다는 뜻에서 ‘가척(加尺)’ 섭들(원신元薪)은 처음 마을을 일굴 때 인근의 들에 섶이 많이 자라고 있어서 마을 이름을 ‘섶들’이라 불러오다가 못을 막으면서 새로 들이 생겼다고 하여 ‘새들’이라고도 불렀고 ‘신평’, ‘셉들’ 또는 원래의 신평이란 뜻으로 ‘원신평(元薪坪)’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드물게는 이웃 마을 사람들이 이 마을 사람을 놀릴 때 여근곡(女根谷) 아래 있는 마을이라 하여, ‘십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66가구) 가척(가잣골)은 약 500년 전 파평윤씨가 개척한 마을로, 어떤 모녀가 못 밑에서 이곳까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오다가 이야기를 마치기도 전에 마을에 이르게 되어, 길이 너무 가깝다는 뜻에서 ‘가척(加尺)’이라 하였다고 한다. 또 조선 연산군 때 갑자사화를 피해 이곳에 온 영의정 윤필상(尹弼商)의 조카 윤신(尹信)이, 가랑사라는 절 옆 지척의 거리에 살았다고 하여 ‘가척(加尺)’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마을뒷산이 가재형상을 하고 있고, 골짜기에 가재가 많아 ‘가잿골’, ‘가잣골’로도 불리고 있다. (34가구, 절반이 윤씨) 모길은 약 500년 전 처음 마을을 개척한 사람이 손씨(孫氏)였으나, 파평윤씨(坡坪尹氏) 가문의 선강(善康)이라는 이가 가척(加尺)에서 이주하여 마을을 크게 일으켰다고 한다. 그 후 이 마을의 어떤 과부가 수절하여 다른 사람의 본보기가 되므로, 마을 이름을 ‘모길’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한다. (20가구 중 윤씨가 18가구) 가마골은 경주김씨(慶州金氏) 성을 가진 이가 마을을 개척하였다는데, 골짜기의 형상이 마치 가마같이 생겼다고 하여 ‘가마골’, ‘부곡(釜谷)’, ‘부동(釜洞)’이라 불렀다. 또 마을에 옹달샘이 있었는데 더운물이 나와 겨울에도 그 곳은 김이 올랐다고하여 ‘가마골’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지금 신평논공단지가 들어서 있다. 현재 프로소닉 외 4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 가랑골은 신라 때 이곳에 가랑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여 ‘가랑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16가구) 여자의 거시기 닮아 ‘여근곡’ 여근곡(女根谷)은 산세가 마치 여자의 성기처럼 생겼다고 하여 ‘여근곡’, ‘여공골’, ‘소산(小山)골’, ‘소문(小門)골’이라고도 부른다. 이곳은 신라 선덕여왕 지기3사의 하나와 관련 있는 곳이다. 신라 제 27대 선덕여왕 때의 일이다. 겨울인데도 개구리가 3~4일 동안 계속 울어댔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신하들이 왕에게 알리니, 선덕여왕은 각간 알천(閼川)과 필탄(弼呑)에게 군사 2천명을 주면서, “서쪽으로 달려 나가 여근곡(女根谷)에 이르면 그곳에 적병이 있을 터이니 무찌르고 오라.”고 했다. 두 장군이 왕명에 따라 그곳에 이르니 과연 백제군사 500여명이 잠복하고 있어 이를 전멸시켰다. 신하들이 왕의 혜안에 탄복하여 물으니 “개구리가 우는 것은 병란의 상징이며, 옥문은 여근(女根)으로 그 빛이 희고, 흰 것은 서쪽이 되므로 알 수 있었다.”고 하였다. 이 일은 선덕여왕이 모란꽃 그림을 보고, 벌이 그려져 있지 않으므로 모란꽃에는 향기가 없음을 알았던 일과, 자신이 죽을 때를 예언한 것과 함께, 선덕여왕의 지기삼사(知機三事)로 유명하다. 원모정(遠慕亭)은 신평리 산104번지에 있는 정자로, 파평인(坡坪人) 윤신(尹信)의 후손들이 그를 추모하여 세웠다. 윤신은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윤흥상(尹興商)의 아들로, 갑자사화를 당하매 아버지를 따라 안양에 같이 은거하였다가, 울산을 거쳐 신평리 가척동(加尺洞)에 입향하였다. 한평생 부모를 섬기며 자식의 도리를 다하던 그의 효성을 후손들이 받들기 위해, 이 정자를 세웠다 한다. 영호재 위에 있다. 영호재(暎湖齋) 파평윤씨 입향조 모은공(慕隱公) 신(信)과 그의 증손으로서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참전한 직장(直長) 희영(尹希永)을 추모하여 지은 재사이다. 본래 이 재사는 풍애공(楓崖公) 윤희영이 임란이 평정된 후 선조의 덕업을 기리고, 후생들의 교육을 위해 세웠던 침산재(枕山齋)였다. 그 침산재가 오랜 세월 풍화에 허물어진 것을 약 300여년전 그 후손들이 그 아래에 새로이 재사를 짓고 영호재라 고쳐 불렀다. 지난 2000년에 새롭게 수리하여 말끔하게 단장한 상태다. 한때는 가척서당(加尺書堂)이라 불리기도 했다. 경내에는 그의 증손 4형제의 우애를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30여년전에 세운 사우정(四友亭)이 있다. 신평리 산105번지로 원모정 아래에 있다. 구일정(九一亭)은 교관(敎官) 윤덕수가 후진을 가르치던 서당이었는데 제자들이 그를 추모하여 86년 전에 정자를 지었다. 모길 못에 잇대어 있다. 신평리비로자나불(薪坪里毘盧遮那佛)은 신평리 433번지, 곧 섶들 부채못 못둑에 있는 높이 1.1m 불상으로 머리가 떨어지고 마모가 심한 상태로 앉아 있는 돌부처다. 그러나 지금은 도둑맞고 없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지난 4월 27일경 도난 되었으며, 그 연하대좌는 이미 14년전에 분실되었다고 한다. 부채못은 돌부처가 못 옆에 있어, ‘부채못’, ‘부채저수지’라고도 한다. 섶들 동북쪽인 마을회관 옆에 있다. 못둑에는 오랜 소나무들이 서 있다. 조반(朝飯)못은 섶들 서북쪽에 있던 작은 못으로, 너무 작아서 아침밥 한 끼만 먹고도 다 팔수 있다고 해서 ‘조반못’이라고 했다고 한다. 15년전 신평논공단지가 들어서면서 메웠다고 한다. 모길못은 모길 동쪽에 있는 못으로 ‘모길제(模吉堤)’, ‘모길저수지’라고도 한다. 청수지(淸水池)는 물이 너무나 맑은 못으로, 가잣골과 섶들 사이에 있다. ‘청수저수지’라고도 한다. 이외에도 신평2리에는 소산지(옥문지) 등 여러 개의 크고 작은 못이 있다. 마을이장에 따르면 12개의 못이 있다고 한다. 소산(小山)은 지형이 마치 여자의 성기처럼 생긴 여근곡(女根谷)이라는 골짜기가 있는 산이다. 신평 서남쪽에 있는 이 산은 ‘소문산(小門山)’, ‘여공산’, ‘여근산(女根山)’이라고도 한다. 오미산(독산)은 오미못의 북쪽에 있는 작은 외딴 산으로 일명 ‘남근산’이라고도 한다. 여근곡의 동쪽 용명에 있는 용두산(남근산)이 여근을 향해 오는 것을 등굼쟁이(소금장수)가 지게작대기로 쳐서 남근 끝부분이 이곳에 떨어져 작은 산이 되었다고 한다. 당나무에 못 박았다가 왼쪽 눈 실명 이 마을 당목은 부채못둑에 있는 소나무다. 20년 전까지 정월보름이면 못의 얼음을 깨고, 찬물에 목욕을 하고 이곳에서 동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동제를 지내지 않는다. 마을주민들은 이 당나무가 아주 영험하다고 믿고 있다. 이 마을 주민이었던 고 이상문씨가 어릴 때 이 나무에 못을 박았는데 그 후 왼쪽 눈이 실명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나무를 아무도 해롭게 하지 않는다고 한다. 당나무 외에도 이 마을 곳곳에는 오랜 나무들이 서 있다. 섭들마을 가운데에는 둘레 4m, 높이 15m, 수령 300여년 된 땅버들이 서 있다. 농로 험해 고령농민 농기계사용 위험 이 마을주민들은 마을 중길(여근곡에서 돈지까지의 약 3km) 확포장을 가장 시급한 숙원사업으로 꼽았다. 그리고 신평1리와 신평2리를 연결하는 농로가 포장되지 않아 노령화되어 농기계가 힘에 부치는 농민들의 어려움이 크고, 사고 위험도 매우 높다고 걱정이다. 섭들은 인물이 많은 편이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윤석희(77 전 초등학교 교장), 박기섭(70 예비역 육군대령), 권찬(70·전 쿠웨이트 대사), 백인환(69 ·전 부산대 교수), 백종환(62·경북대학교 중앙도서관), 윤진희(57·건천농협 전무), 윤기태(56·전 경주우체국장), 윤완희(55·경주시 산림조합장), 이상호(54·출입국관리사무소 대구지사장), 백재환(52·동대구세무서 조사1과장), 윤목희(51·울산광역시 교육청), 최상문(49·경주스프링 대표) 등이 있다. 그리고 6.25때 부하들을 살리고 자결하여 지난 6월 25일 건천초등학교에 흉상 제막식을 가진 고 윤길병 소령도 이 마을 출신이다. 바쁘신 중에도 소상하게 마을안내를 해주신 박도섭 이장님의 후의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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