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 많아 ‘돌골’, ‘돌촌’, ‘석읍’
천석꾼이 살았던 산골마을
나눌 분(分)자 형세 집안이 계속 갈라져
석읍은 땅을 조금만 파면 반석이 나오는 산골마을로, 돌이 많아 ‘돌골’, ‘돌곡’, ‘돌촌’ 혹은 ‘석읍’이라고 불렀다. 본동인 ‘석읍’과 ‘한티’, ‘두몫골’ 3개 부락이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석읍은 입실에서 양남으로 이어지는 지방도 904호선을 따라 동대산을 넘어가면 정상부에 위치한 효동 아래 협곡에 펼쳐진 마을이다. 토함산과 동대산이 동해로 뻗다가 우뚝 솟은 소미기산(牛山 333m)을 배경으로 올망졸망한 봉우리들이 빚어낸 아름다운 산과 골에 그냥 스며있는 듯이 조용하게 자리한 마을이다.
양남에서 이 마을을 가려면 양남면사무소에서 하서천을 따라 약 7km 거슬러 계속 올라가면 석촌리를 지나 언덕빼기를 넘으면 보이는 마을이다.
산간협곡에 위치한 이 마을은 마을 앞에 흐르는 하서천의 북쪽 산기슭에 남향으로 마을이 자리 잡고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국인 아담하고 정감 있는 마을이다. 척박한 좁은 농토를 끼고 있는 지리적인 조건으로 가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공기 좋고, 물 맑고, 인심 좋은 마을로 아직도 마을의 훈훈한 인심이 묻어난다. 또 마을 농토를 다 합해도 얼마 되지 않을 작은 이 마을에 천석꾼이 살았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천석꾼의 농토 대부분은 입실에 있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주로 논농사에 의존하고 콩, 감자 등 전통 밭작물이 고작이다. 불과 몇 십년 전만해도 이 마을에는 전통 한지를 많이 생산했었다고 한다. 지금도 집집마다 직접 생산한 한지들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일할 사람도 없고, 수입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 맥이 끊어진 상태라고 한다. 이 마을은 노인이 혼자 생활하는 가구가 많아 총 55가구에 78명의 주민들이 생활하고 있다. 김해김씨(14가구), 김영김씨(11가구) 많은 편이고 고른 성씨 분포를 갖고 있다. 마을 뒷산이 나눌 분(分)자 형국이라 집안이 10집을 넘지 못하고 계속 갈린다고 한다.
세금 두 몫 내었다고 ‘두몫골’, ‘두뭇골’
석읍(石邑)은 돌이 많다고 해서 ‘돌촌’, ‘돌골’, ‘돌곡’ 혹은 ‘석읍’이라 하였다 한다.
한티는 마을 뒷산에 큰 재들이 많아 ‘한티’라고 했던 게 한자표기로 ‘대현(大峴)’이 되었고, 나중에 다시 ‘대현(大縣)’이라 바꾸었다고 한다.
두뭇골은 옛날 이 마을 주민들이 지방 관리에게 잘못 보여, 다른 마을보다 세금을 두 몫이나 더 내었다고 하여 ‘두몫골’, ‘두뭇골’이라 불렀다고 하며, 뒷산의 숲이 울창하여 ‘산림(山林)’이라고도 부른다.
임란창의 1등공신 황희안
황희안(黃希安)장군유적지 임란창의 공신으로 선무원종 1등공신인 병마절도사 황희안 장군과 그 부인의 무덤과 비석이 있다. 한티마을에 있다.
소석정(素石亭) 천석꾼 최석곤(崔錫坤)이 즐겨 찾던 곳이라 한다. 석읍마을 뒤산 기슭에 있는 정자로, 70~80년전에 지었다고 한다.
천석꾼 최석곤의 고택 약 200여년전에 지은 천석꾼 최석곤의 고택으로 석읍마을회관 앞에 있다. 천석꾼의 집이였지만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으로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부분적으로 허물어진 초라한 폐가가 되어 있다.
꽃밭비알 꽃이 많이 피었다고 하는 들로, 석읍 서쪽 산비탈 밑에 있다.
당숫골 당수나무가 있었다고 하는 들로, 마을 앞 거랑 건너 도로변에 길쭉한 들을 말한다.
도롱골 지형이 동그랗게 생긴 골짜기로, 그 머리가 안으로 향해있어 나간사람도 다 돌아 들어온다고 한다. 석읍 동쪽에 있다.
두만바우 여러개의 바위가 송곳처럼 뽀족하게 솟아 있으며, 두만재에 있다. 6.25전에 이 바위가 있어 마을주민을 보호해서 재앙을 막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은 전란피해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복사덤뱅이 비가 오면 복사(覆沙)가 덮이고 물이 둠벙처럼 고인다는 골짜기로, 팥밭골 서쪽에 있다. 도로가 생기고 옹벽을 쳐서 지금은 없어졌다. 또 그 뒷산에 자갈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나면 사람이 죽거나, 큰 물난리 또는 불이 나는 재앙이 왔다고 한다.
섬안 두뭇골 동남쪽에 있는 등성이로, 양쪽에 물이 흘러 섬 안처럼 보인다.
소미기산 양남면의 석읍리, 효동리, 상라리와 양북면의 죽전리에 걸쳐 있는 높이 334m의 산으로 효잠(孝岑), 우산(牛山), 우잠(牛岑)이라고도 한다.
물맛 좋아 장맛 술맛도 좋아
웅굴골 웅굴(샘)이 있는 골짜기로, 석읍 남쪽에 있다. 이곳의 물맛이 좋아, 이 물로 장과 술을 담그면 장맛과 술맛이 좋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러 여기 물을 길러다가 술, 장을 담았다고 한다.
오봉산 마을 뒤에 있는 다섯봉우리를 일컫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산봉우리가 많아, 보는 이마다 다섯봉우리가 다르게 지목되기도 한다.
용바위 도롱골에 있는 바위로 그 뒷산이 마치 용의 형국이고 이 바위가 마치 용머리에 해당하므로 ‘용바위’라 부른다.
팥밭골 팥밭이 있었던 골짜기로, 석읍 서쪽에 있다.
석읍국민학교 천석꾼이었던 경주최씨가 자신의 전답을 학교부지로 희사하여 1937년 7월 15일에 개교한 석읍국민학교는 지금까지 2076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1996년 3월 1일 폐교되었다. 현재는 경북대학교 연수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노루 좀 잡아 주이소!
이 마을 주민들은 야생동물을 잡을 수 있도록 바랐다. 야생동물 과잉보호로 농산물 피해가 많다고 한다. 콩밭 등 밭작물의 피해가 크고, 논농사도 예외가 아니라고 한다. 이 마을은 멧돼지보다 주로 노루, 너구리 등이 많다고 한다. 폐교된 학교(석읍초등학교) 운동장은 마치 노루운동장을 방불케한다고 했다. 실제로 마을 곳곳에 돌아보니 노루발자국이 많았다.
석읍은 마을에 큰 당목이 있었으나 1996년에 가뭄으로 말라 죽고 그 후계목이 자라고 있다. 한티에는 느티나무 3그루가 마을 앞 들판 가운데 울창하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동제는 매년 정월 14일 저녁에 모신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김만봉(87 중곡어른) 할아버지로 마을회관에 나와서 취재에 협조할 정도로 건강했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전 경남도청 위생과장 최연식(59)씨가 있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마을안내에 협조해주신 김춘길 이장과 시원하고 달콤한 감주로 갈증과 허기를 면하게 해주신 정두자 부녀회장이 베푸신 정에 깊이 감사드린다.
글=김거름삶
사진=이종협 기자
자료정리=이채근 기자
자문: 허계수(족보도서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