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실 있는 마을로 본 받아야 한다고 ‘전동’ 천년의 맛 전통 감포 ‘소풀들쌀엿’ 경주에서 국도 4호선을 타고 감포 방향으로 약 30km(약 30분정도 소요)정도 달리면 짙푸른 동해바다가 저 멀리 보이고 소나무 숲과 함께 전촌 삼거리에 다다른다. 여기서 다시 왼쪽, 감포 방향(북쪽)으로 약 300m 정도 가면 전촌교를 만난다. 이 다리를 건너지 말고 왼쪽으로 거랑 둑을 따라 올라가면 전촌리를 지나는 약 500m 지점에 갯골거랑을 중심으로 좌우에 펼쳐진 마을이 전동(典洞)이다. 마을 들어가는 길옆 논배미에는 뿌리를 활착하기 시작한 녹색 짙은 모들이 초여름 뙤약볕아래 키를 다투고, 마을(큰말) 어귀에는 수령 300여년의 회화나무가 졸음을 견디며 긴 그늘을 드리운 채 길손을 반겼다. 300년된 회화나무 당목 전동은 전촌리와 호동리, 감포리 사이에 위치한 마을이다. 그 안쪽 골짜기는 호동리다. 본동은 전촌리와 호동리 사이에 있지만 덕고개 너머에 있는 감포하수종말처리장과 일출리버빌이 있는 지역과 그 아래 해변까지도 전동리에 속한다. 전동은 옛날 이곳에 옹기점이 있었다하여 ‘전골’, ‘전동’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또 신라 소지왕 9년에 이곳에 원(院)을 설치했으므로 ‘전동(典洞)’이라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현재 주민들은 이러한 내용은 잘 모르고, 다만 이곳에 서당이 있어 행실 있는 마을로 알려져 이를 본 받아야한다는 뜻에서 ‘전동(典洞)’이라 했다고 한다. 김해허씨(金海許氏)들의 집성촌으로 본동의 경우 75가구 중에 60가구가 김해허씨다. 이 마을은 벼농사와 채소 외에 특별한 농산물이 없는 작고 다소 빈한한 마을이다. 그러나 이 작은 마을에 서당을 비롯한 정자, 재실 등이 즐비하고, 효부의 정려각까지, 예사마을이 아님을 한눈에 알게 했다. 변변한 특산물 하나 없는 이 마을은 지난해부터 부녀회(회장 황보복란)를 중심으로 감포 ‘소풀들쌀엿’을 특산물로 개발하여 생산하고 있다. 순수 우리 농산물로 전통방식으로 생산하는 엿은 그 맛이 일품이다. 김해허씨들의 집성촌 우말은 옛날 이 마을에 우씨들이 많이 살고 있어 ‘우마을’ 혹은 ‘우촌(禹村)’이라고 했다고 한다. 전촌을 지나자마자 왼쪽에 있는 마을이다. 지금은 우씨(禹氏)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11가구) 큰말은 전동리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하여 ‘대촌(大村)’ 혹은 ‘큰말’이라 일컫는데, 김해인 허동이 기묘사화을 피하여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23가구) 옥수골(玉水谷)은 옥(玉)과 같이 맑은 물이 흐르는 마을이라 하여, ‘옥수골’, ‘옥수곡’이라고 불렀다 한다. 큰말 건너편에 있어 ‘건너말’이라고도 하고, 서당의 서쪽이 되므로 ‘서상’이라고도 부른다. (23가구) 동상마을은 서당의 동쪽에 있어 ‘동상(東上)’이라고 부른다. 큰말 동쪽에 있다. (17가구) 소바짐은 소나무 숲이 있는 곳이라 하여, ‘솔바짐’, ‘소바지미’, ‘소바짐’, 등으로 불렀으며, 아직도 숲이 있다. 팔조리의 바지미 보다 작다 하여 ‘소팔조’ 라고도 한다. 일출빌라는 최근에 이곳에 일출리버빌40가구가 들어서면서 마을사람들은 ‘일출빌라’라고 부른다. 감포리와의 경계지점에 있다. (40가구) 남편 위해 2번이나 단지 수혈 경주최씨정려각(慶州崔氏旌閭閣)은 조선 고종 때의 열부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정려각이다. 큰말인 전동리 367번지에 있다. 최씨는 오천인 정운열(鄭雲烈)의 아내로 남편의 병구완을 위해 2번이나 단지 수혈하고, 자신의 살을 베어 약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1993년 이곳에 비석을 세웠다. 현재 정려각 앞에 시멘트로 담을 쳐 놓아 정려각을 가리고 있어 개선이 요구된다. 경관을 망쳐 놓았다. 노천재(魯川齋) 김해김씨들이 후학을 지도하기 위해 지은 서당으로, 큰말 가운데 있다. 입향조인 허동(1459년생)의 3~4세손이 400여년 전에 지은 것으로 추증된다. 허동의 증손자인 희만(希萬)은 임란창의 2등공신이다. 삼우정(三友亭) 조선 선조 때의 선비 허용이 학문을 강론하던 정자로, 그들 3형제, 허수, 허욱의 우애를 돈독히 하고자 하는 뜻에서 ‘삼우정’ 이라고 하였다 한다. 성봉산 아래인 옥수골에 있다. 정자 입구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삼락당(三樂堂) 조선 순조 때의 선비 허수를 추모하여 그 후손들이 1948년경 재실을 짓고 그의 호를 따서 당호를 삼락당이라 하였다. 큰말 덕현산(德峴山) 아래 덕고재 가는 길에 있다. 삼인재(三忍齋) 조선 순조 때의 선비 허욱을 추모하여 그 후손들이 지은 재실로, 노천재 북쪽에 있다. 최근에 수리하여 지붕을 기와무늬 강판으로 새로 이고, 알루미늄 창문을 달아 옛 정취를 느끼기에는 다소 부족함이 있다. 영오정(影烏亭)은 임진왜란 당시 창의의사로서 선무공신 병조참의에 오른 오천인 정연탁(鄭連卓)을 추모하여 70여년 전에 그 후손들이 지었다. 큰말에 있다. 지난해에 말끔하게 수리하여 잘 단장했다. 경묵재(景默齋) 김해인 허수(許洙)를 추모하여 그 후손들이 1950년경에 지은 재실이다. 우말 뒷산 기슭에 있다. 감나뭇골 감나무가 많은 골짜기로, 새논골 북쪽에 있다. 지금도 감나무가 많다고 한다. 대밭골 대밭이 있었던 골짜기로, 큰말 동쪽에 있다. 지금도 시누대가 밭을 이루고 있다. 덕곡(德谷) 큰말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덕국’이라고도 한다. 덕곡들 덕곡에 있는 넓은 들로 이곳은 농사가 잘되어 주민들에게 덕을 준다하여 ‘덕곡들(德谷)’, ‘덕국들’이라고도 한다. 덕곡재 덕곡 위쪽에서 호동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덕국재 혹은 덕현(德峴)이라고도 한다. 무지개삔달 이곳은 옛날부터 무지개가 자주 나타났던 산으로, 큰말 북쪽에 있다. 백정골 백정이 살았다고 하는 골짜기로, 감나뭇골 밑에 있다. 성봉산(聖峰山) 건너말 서북쪽에 있는 산으로, 성주봉(聖主峰)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산이 무슨 연유로 ‘성봉산’, ‘성주봉’이라고 하는지는 주민들도 모른다. 소뿔 산 모양이 마치 소뿔처럼 생겨 ‘소뿔’, ‘우각(牛角)’이라고도 한다. 또 옛날 이곳에 소를 놓아 먹였던 곳이라 이렇게 불렀다고도 한다. 건너말 서남쪽에 있다. 소뿔재 건너말에서 팔조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우각현(牛角峴)이라고도 부른다. 소뿔 위에 있다. 옥수곡(玉水谷) 옥수골이라고도 하며, 건너말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맑은 샘이 있다. 자모골(子母谷) 옛날 전염병으로 죽은 아이를 매장하던 곳으로 아이를 묻은 어미가 슬피 우는 일이 많았던 골짜기라 ‘자모골’이라고 한다. 전촌리와의 경계인 우말 서쪽에 있다. 평풍바우 병풍을 둘러친 것 같은 커다란 바위로, 옥수골 서북쪽에 있다. 옆에 성봉사(聖峰寺)가 있다. 당목은 높이 15m에 수령 300여년의 회화나무로 큰말 어귀에 있다. 매년 춘사일(春社日 입춘후 다섯 번째 무일(戊日)로 옛날부터 곡식의 성육을 위해 제례를 올린 길일이다)에 동제를 지낸다고 한다. 식수가 부족해요 전동은 정려각과 서당, 정자가 있는 행실 있는 마을로 알려졌으며, 예로부터 인근마을의 부러움을 받으면서 살아온 허씨들의 집성촌이다. 소바짐이나 최근에 들어선 일출빌라의 경우는 각성받이로 본동과는 좀 다른 분위기다. 이 마을 주민들은 식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감포댐이 조성되어도 물 부족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는 게 주민들의 생각이다. 아직 감포댐으로부터의 관로공사조차 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 마을의 최고령자는 이필란(97)할머니.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 외에는 아주 건강한 상태다. 지금도 매일 찬물에 목욕을 한다. 밥은 조금씩 늘 일정량을 먹고, 아직도 밭일이나 집안청소, 빨래까지도 도맡아 하신다. 허남식(83·예비역 육군대령), 정연훈(50·방주광학), 허치림(40· 인천지법 판사), 허은욱(45·전 울산시 문화체육국장)씨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글=김거름삶 사진=이종협 기자 자료정리=이채근 기자 자문: 허계수(족보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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