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바다-정옥자
여름비가 잦다.
자정을 넘긴 시간에 들려오는 빗소리는 귀 기울이지 않아도 처량한 마음이 들어 나도 모르게 많은 생각들을 불러 모은다. 빗소리에 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 것은 젊은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불현듯 뛰어가고 싶은 산길이 떠오른다. 비가 오면 유난히 안개가 짙게 깔리는 곳이다.
산 넘어 산 속의 길, 그 많은 능선 중에 유독 여인의 목덜미 같은 한 능선. 거기서는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산뿐이다. 모든 곡선이 마치 파도처럼 물결을 이루는 광경은 언제 봐도 신비롭기만 하다. 아무도 찾지 않는 한적한 낯선 산길을 찾아다니기를 좋아하는 나는 그 길을 마치 보석이라도 찾은 듯이 소중하게 여긴다.
비가 오는 날에는 셀 수도 없는 많은 봉우리들이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안개바다가 꿈결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나는 잔잔한 안개바다에 한 척의 배가되어 떠다닌다. 침몰해 버리고 싶은 심정으로 보이지 않는 길을 향해 질주하기도 한다. 안개 속을 달려가는 것은 달려본 사람만이 알 수 있듯이 조마조마하고 가슴 뛰는 일이다.
한치 앞을 보지 못하고 내 닫는 삶, 돌아보면 우리네 삶이 바로 저 안개 속 같은 것이 아니던가.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이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에 우리를 웃게도 하고 울게도 한다.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얼마나 허우적대며 아우성을 쳤던가. 한세상 살아간다는 것이 바로 안개 속이란 걸 우리는 짐작도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마음 평화로와지는 안개 속은 마치 꿈속의 풍경 같다.
“인생은 살 것이 아니라 꿈꿀 것이다.” 라고 말한 마리로랑생, 그래서 그는 안개의 덫에 걸린 것 같은 그림을 즐겨 그렸던 것일까. 가리워진 것도 훤하게 보이는 것도, 어차피 인생은 한바탕 꿈속이 아니던가.
살아오면서 현실과의 타협에서 늘 밀려나야 했던 나는 언제나 꿈을 꾸듯 몽롱한 안개 속이 마치 은신처라도 되는 양 좋았다. 숨막히듯 전개되는 생면부지한 현실들이 나를 가로막을 때는 차라리 외면해 버리고 안개 속에서 꿈을 꾸듯 그렇게 살고 싶었다.
내 속에 가려 진 것은 어떤 것들일까.
소중한 비밀 하나쯤은 아무도 모르게 내 영혼 깊숙한 곳에 덮어두고 싶다. 그것이 남들이 알지 못하는, 아니 알 수 없는 내면의 기쁨이면 더욱 좋으리.
안개바다, 그 곳에 우리의 삶이 녹아 흐른다. 우연과 필연의 인연들이 끈을 이으며 펼쳐지고 있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는 안개 속을 가보라. 보일 듯 말 듯 산봉우리를 감아올리는 한바탕 안개의 춤 속에 묻히다보면, 어느새 가슴이 환하게 밝아 옴을 느낄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침몰해 버리고 싶던 안개 바다를 헤엄쳐서 돌아온다.
>>>약력>>문학세계 수필 당선.
영호남수필문학회동인.
문맥동인.서라벌문학회 회원.
경주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