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 지난 2년 동안 우리를 힘들게 했었던 코로나 상황이 좀 더 호전되거나 아직은 깨끗하게 정리되지 않은 채 어언 학기말이 되었다. 성적채점만 끝나면 교수도 학생과 함께 방학에 들어간다. 이번 학기엔 어느 학기보다 바빴다. 왜그랬을까? 아마도 비대면 상황의 관행이 남아 있으면서 다른 한편 대면 강의와 학교업무를 하다보니, 대면시절에는 의당 생략하거나 미뤘을 일들이 더하여 처리할 업무가 많아진 탓이라 생각되었다.
학기를 시작하면서 코로나 변종인 오미크론이 확산함에 따라 등교수업은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학교에서도 더 이상 온라인으로만 수업을 진행하는데 얼마간 부담을 느끼는 분위기였다. 2년 이상을 거의 등교하지 않고 대학시절을 보내는 대학생을 바라보는 일종의 위기의식 같은 것이 생겼다. ‘큰 공부를 한다’는 곳인 대학은 그 대학 생활이 반드시 수업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업 외에 대학의 환경과 그 울타리 내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관계와 상호작용을 통해 학습하고 깨달아가는 부분이 더 크다.
학교마다 상황이 다르겠지만, 과목에 따라, 학생과 교수의 형편을 고려하여 대면과 비대면 강의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필자의 경우 이번 학기는 전적으로 대면 강의를 선택하였다. 의당 학생들이 학교에 나와야 한다는 평소 소신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대면 강의를 하지만, 은연중에 비대면 강의의 관행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학생들의 경우, 대면 수업을 시작했지만 결석에 대해 비대면 강의 시절 이전보다 훨씬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오미크론 확진자가 학기 중에 잇달아 발생했고 그럴 경우 무조건 일주일간 격리했기 때문만 아니라 약간의 컨디션 저조로 결석해도 병결로 처리해 줘야 하는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다. 급기야 교수인 나까지 학기 중에 확진 판정을 받아 일주일간 격리, 급히 비대면 방식의 ‘줌’으로 집에서 강의했다. 이런 온라인 강의는 장차 코로나 상황이 끝나더라도 기존의 대면 강의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가미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대학의 강의란 질문과 상호토론을 하는 수업도 있고, 일방적인 강의 방식을 고수하는 강의도 있다. 일방 강의라 하더라도 수강자의 표정을 읽어가며 자연스레 피드백하는 것이 정상적인 수업이다. 기존 대면강의의 경우, 철저히 마스크를 쓰고 하는 데다 언젠가부터 실내에서도 모자를 쓰는 학생이 많으니 이는 완전히 복면을 쓰고 수업을 듣고 있는 셈이다. 피수강자가 복면을 덮어쓰고 수업하는 강의에 피드백이 있을 리 없다. 반면 온라인 화상강의는 얼굴과 표정을 보며 상호작용하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많은 학생이 비대면의 화상강의에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나온다. 비대면으로 한다는 것은 얼굴을 보자고 하는 방식 아닌가? 얼굴을 드러내라고 하면 다수의 학생이 생얼이라고 마스크를 벗을 수 없다고 한다. 말하자면 다듬지 않고 화장도 하지 않은 맨얼굴이라 같이 듣는 다수의 학생에게 보여주기 싫다는 뜻이다. 생각해 보자. 생얼이 내 얼굴인데 가면을 내 얼굴이라고 착각하지 않는가? 연극학적 분석론을 집필한 어빙 고프만을 비롯한 다수의 사회변동론자에 의하면, 사회의 합리주의가 진척됨에 따라 내 개인의 삶도 겉과 속이 분리되는 방향으로 변해가고 그렇기 때문에 한 개인과 사회는 전면부와 후면부로 분리된다고 한다. 나아가 이러한 사회 속성상, 오늘날 수많은 관광객은 그 전면부에 가려진 후면부를 보러 여행에 나선다고 한다. 흔히 관광에서의 ‘진정성 추구’의 한 장면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문화의 진짜를 추구하러 나서면서 자기 자신은 후면부를 전면부 뒤에 가려놓으려 애쓰고 있다. 그런 현상이 외모지상주의를 이끌고 있으며 성형천국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얼굴은 얼이 베어 있는 골격이다. 얼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 표정이다. 아름다움은 앎과 지식이 있음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우리의 전면부는 얼이 베어 있고 지식이 넘치는 아름다운 모습과 표정이었으면 한다. 사회트렌드를 거부할 수 없겠지만, 경주의 모습도 천년의 얼이 베어 있고 진정한 아름다움이 넘치는 모습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