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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돈과 금강산[1] 금강산에서 만나는 ‘신라 불교’ 서막

금강산엔 이차돈과 관련된 장소 다수
이차돈 순교비가 발견된 곳

경주신문 기자 / gjnews21@hanmail.net1603호입력 : 2023년 09월 21일
↑↑ 탈해왕릉 쪽에서 본 금강산 전경. <제공: 문화재청>

옥리(獄吏)가 그를 베자 흰 젖이 한 길이나 치솟고 하늘이 어두워졌다. 석양이 그 빛을 감추고 땅이 진동하고 폭우가 쏟아졌다.

임금이 슬퍼하여 눈물이 용포를 적시고, 여러 재상도 겁을 먹고 근심한 나머지 머리에 쓴 사모에 땀이 배었다. 샘물이 말라 물고기와 자라가 다투어 연못에서 뛰어오르고, 곧은 나무가 저절로 부러지니 원숭이들이 떼를 지어 울었다.

춘궁(春宮, 태자가 거처하는 궁)에서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놀던 동무들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서로를 돌아보고, 월정(月庭, 춘궁과 같은 의미로 추정)에서 소매를 마주하던 친구들은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이별을 애석해하며, 관(棺)을 쳐다보고 우는 소리는 마치 부모를 잃은 것과 같았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이차돈의 순교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신라미술관 1층 불교조각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육각기둥 모양을 한 이차돈 순교비가 눈에 들어온다. 널리 알려진 그의 순교 설화처럼, 높이 1m 남짓한 비석 한 면엔 이차돈이 처형되는 순간 꽃비가 내리고 잘린 목에서는 피가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모습이 돋을새김이 돼 있다. 나머지 다섯 면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칸을 질러 설화의 내용을 글자로 새겨 놓았다. 818년(헌덕왕 13)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시청 인근 동천동에 있는 금강산(해발 177m)은 이차돈 순교비가 발견된 곳이다. ‘삼국유사’ 속 일연이 쓴 주석 등 후대에 전해 내려온 순교 설화에 따르면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가 떨어진 곳도 이곳 금강산이다.

이처럼 금강산엔 이차돈과 관련된 장소가 다수 있다. 이 산 어딘가에 있었을 이차돈의 무덤과 자추사, 일제강점기 이차돈 순교비가 발견된 곳으로 기록되며 논란을 낳고 있는 백률사 등이 그렇다. 백률사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보물 제121호)은 이차돈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금강산의 의미를 짚어볼 수 있는 눈여겨볼만한 유적이다.

금강산 권역은 아니지만, 지금의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흥륜사도 이차돈의 순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


↑↑ 국립경주박물관 신라미술관 1층 불교조각실에 상설전시되고 있는 이차돈 순교비.


묵호자·아도 통해 불교 전래

고구려·백제·신라 삼국 중에서 신라는 가장 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으면서도, 가장 화려하게 꽃을 피워 불국토(佛國土)를 이룬 국가였다. 학창시절 배운 것처럼, 신라는 제23대 법흥왕 14년(527)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했다. 고구려가 소수림왕 2년(371), 백제가 침류왕 1년(384)에 불교를 공인한 것과 비교하면 신라는 한참 늦은 시기에 불교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럼에도 신라의 불교 공인이 ‘대사건’으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이 종교가 훗날 민심을 한데 모아 삼국통일을 이루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는 점도 한몫했다. 중국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불교를 받아들인 고구려·백제와 달리 신라는 유독 불교에 배타적이었다. 때문에 희생도 컸다. 어쩌면 많은 희생을 딛고 뿌리내렸기에 신라의 불교는 유독 깊고 단단하고 찬란했을지도 모른다.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이차돈의 순교 훨씬 이전이었다.

처음 눌지왕(재위 417~458) 때, 사문(스님)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신라 일선군(경북 선산)에 이르렀다.

그 고을 사람 모례는 자기 집 안에 굴방을 만들어 그를 있게 하였다. 그때 양 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의복과 향을 보내왔는데, 여러 신하가 향의 이름과 용도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향을 가지고 널리 나라 안을 돌아다니면서 묻게 했다. 묵호자가 이것을 보자 그 이름을 일러주며 말했다.

“이것을 사르면 향기가 매우 강한데, 그렇게 해서 정성을 신성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신성이란 삼보 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즉 부처와 그가 설한 진리, 그리고 스님들입니다. 만약 이것을 살라 소원을 빌면 반드시 영검이 있을 것입니다”

이 때 왕녀의 병이 위독하여 왕은 묵호자에게 향을 피워 빌게 하였더니, 왕녀의 병이 곧 나았다. 왕은 기뻐하여 예물을 후하게 주었다.

묵호자는 나와서 모례를 찾아가 얻은 물건을 주며 “나는 이제 갈 곳이 있다”고 말하고 작별을 청하였다. 얼마 후 그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김대문이 지은 ‘계림잡전’(鷄林雜傳)은 신라에 처음 불교가 전해진 사실을 이렇게 전한다. ‘계림잡전’은 신라 제33대 성덕왕(재위 702~737) 때 김대문이 지은 설화집으로,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위 내용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모두 인용돼 있다.

그밖에도 신라 제21대 소지왕(재위 479~500, 비처왕이라고도 불림) 때에는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왔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그는 모례의 집에 와서 묵었는데,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했다고 한다. 아도와 묵호자가 동일인인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소지왕 10년(488)엔 왕궁 내전에서 분향 수도하던 스님과 궁주가 간통을 하다가 잡힌 사건도 등장한다. 소지왕 대에 이미 궁중에 승려가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 다른 흥미 있는 부분은 아도가 제13대 미추왕 2년(263)에 왕성의 서쪽 마을에 와서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아도는 시대를 달리한 같은 이름의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묵호자 또한 별명이란 느낌이 강하다.
일연도 자신이 지은 ‘삼국유사’에서 아래와 같이 묵호자를 표현하고 있다.

또 공주의 병을 고친 것도 모두 아도가 한 일이라고 전하니 이른바 묵호(墨胡)란 것도 참 이름이 아니요 그저 그를 지목해서 부른 말일 것이다. 양(梁) 나라 사람이 달마(達磨)를 가리켜 벽안호(碧眼胡)라 하고, 진 나라에서도 중 도안(道安)을 조롱하여 칠도인(漆道人)이라 하는 따위다.

학계의 의견도 비슷하다. 묵호자는 먹(墨)처럼 검다고 해서, 벽안호는 파란 눈(碧眼)이라고 해서, 칠도인은 옻칠(漆)을 한 듯 검붉다고 해서 붙여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신라인들이 자신과 외모가 다른 서역승에게 붙인 별명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얼굴 생김새나 행색이 이상한 사람이 염불이란 것을 하고 불교 교리를 펼 때 마을 사람들은 경계의 눈으로 쳐다보았을 것이다. 심지어 그들을 죽이려 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후 오랜 기간 대신들의 반대 등 좌절을 거듭한 끝에 자리 잡은 신라 불교는 신라를 신라답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찬란한 그들의 문화는 불교를 바탕으로 이뤄졌고 정치체제의 안정 또한 불교를 통해 이룩됐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바로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으로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이차돈의 순교가 있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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