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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묘-삼국통일 으뜸 공신… 죽어서는 왕이 되다

무덤주변 석물, 흥덕왕릉 비슷
흥덕왕대 흥무대왕 추봉되면서 무덤 정비 추정

경주신문 기자 / 1583호입력 : 2023년 04월 27일

↑↑ 김유신묘 전경. 김유신 장군은 죽어서 왕으로 추존됐고 무덤 또한 왕릉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제공: 문화재청>

김 장군 무덤 앞에 우뚝한 석수
金老墳前石獸危

천년 지나도 검기는 여전히 기괴하네
千年劍氣尙奇奇

윤건과 백우선에 전대의 공업 추억하고
綸巾白羽追前業

단려와 황초에 후인의 그리움 일어나네
丹荔黃蕉起後思

시를지어 장렬함 과시해준
길손은 있었지만
有客題詩誇壯烈

요리 무덤 가까이 들어간 사람은 없네
無人穿塚近要離

예전 천관사는 어디 있는지 아는가
天官寺古知何處

만고토록 미인의 성명까지 따라 전하네
萬古蛾眉姓字隨


조선 초 문신이자 학자인 서거정이 김유신 장군 무덤을 방문한 뒤 지은 ‘김유신 묘를 지나다’(過金庾信墓)란 시다. 그의 시문을 모은 ‘사가시집보유’(四佳詩集補遺) 권3에 실려 있다.

↑↑ 무덤 호석에 새겨진 십이지신상. <제공: 문화재청>


신라 17관등 뛰어 넘는 ‘태대각간’ 벼슬 얻어

김유신은 가야왕족의 후손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에 결정적 역할을 한 장수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증손인 그는 15세에 화랑이 됐고 자신의 누이와 결혼한 김춘추(태종무열왕)와 함께 삼국통일을 이뤘다. 진골 출신으로 귀족회의의 수뇌인 상대등이 되었으며 선덕여왕, 태종무열왕, 진성여왕, 문무왕 등 4명의 왕을 보필하면서 신라를 강국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김유신은 사후에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됐다. 그를 기리는 사당은 현재 여러 곳에 산재하는데 어떤 곳에선 산신 또는 천신으로 기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김유신의 정체성은 무엇보다도 무장으로서 김춘추와 협력해 삼국통일을 이뤘다는 데 있다.

김유신이 자신의 여동생을 김춘추에게 시집보내 훗날을 도모한 일화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김춘추는 ‘정사가 어지럽고 음란하다’는 이유로 폐위당한 진지왕의 손자로, 왕권 계승에선 배제돼 있었다. 그러나 당시는 왕위를 이을 만한 성골 출신 남성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아, 성골 여성인 선덕여왕이 왕위를 잇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진골 신분으로 차기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있는 김춘추와 힘을 합쳐 훗날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게 김유신의 판단이었다.

김유신은 김춘추를 집으로 불러 공차기를 하다가 일부터 그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여동생을 불러 옷고름을 달아주게 했다. 이를 계기로 동생 문희가 김춘추의 아이를 가졌으나 김춘추는 가야계라는 이유로 결혼을 주저했다. 그러자 김유신은 왕이 남산에 행차한 시간에 맞춰 여동생을 태워 죽인다며 연기를 피워 올렸다. 그렇게 김유신은 계략을 꾸며 왕의 주의를 끌어 결국 김춘추와 여동생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이후 김춘추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김유신이 가진 군사력의 결합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견인차가 됐다.

당시 신라 17관등 가운데 가장 높은 계급은 ‘각간’이었다. 그런데 김유신은 백제 멸망의 공으로 각간보다 높은 ‘대각간’의 지위를 얻었고, 고구려 멸망 직후엔 그보다 더 높은 ‘태대각간’의 벼슬을 얻었다. 기존의 17등급 위계보다 두 단계나 더 높은, 이른바 ‘특특’의 지위를 받은 것이다.

게다가 문무왕은 통일 후 전국의 말 목장 174곳을 왕실 22곳과 국가기관 10곳, 개인 등에 골고루 나눠주었다. 그런데 태대각간 김유신은 개인으로선 가장 많은 6곳을 받았다.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 조차도 5곳에 불과했으니 김유신의 공적에 대한 위상이 얼마나 엄청났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성한 김유신이 죽자 국가차원의 장례식이 열렸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당시 문무왕은 조의금으로 비단 1000필과 조 2000섬을 냈다. 또, 군악대에서 북치고 피리 부는 사람 100명을 보내주었다. 담당부서에 명을 내려 비석을 세우도록 했고 공적과 명예를 기록했다. 김유신의 무덤을 지킬 백성들도 지정했다. 김유신의 나이 79세, 673년의 일이다.


↑↑ ‘개국공순충장렬흥무대왕릉’이란 글자가 새겨진 비석 <제공: 문화재청>


죽은 뒤엔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

경주 충효동 송화산 자락에 있는 김유신묘는 지름이 30m에 달하는 원형의 무덤이다. 봉분 둘레에는 호석(護石, 무덤의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는 돌)을 두르고 그 바깥에는 바닥에 넓은 돌을 깔았으며, 95㎝ 높이의 돌난간을 둘렀다. 무덤의 구조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으로 추정된다. 1963년에 사적 제21호로 지정되었다.

묘는 지대석(地臺石, 지면을 다진 후 놓는 돌)을 바닥에 설치하고, 그 위로 면석과 탱석, 십이지신석으로 구성된 호석을 원형으로 둘렀다. 봉분 둘레엔 95㎝ 높이의 탱주석(撐柱石)을 세웠는데 소면석(素面石)과 신상석(神像石)을 교대로 배치했다.

신상석엔 십이지신상을 새겼다. 호석 외곽에는 박석(薄石, 넓적하고 얇은 돌)을 깔고 다시 박석 외곽으로 난간 지대석을 두고 그 위로 난간 석주를 설치하였다. 봉분의 앞쪽으로는 상석(床石)과 신도비(神道碑,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를 세워놓았다.

한편, 1974년 사적 정비작업 중 납석(蠟石)으로 만든 토끼상과 말상 등 십이지상 2점이 발견됐다. 이들은 모두 갑옷을 입은 모습이었다.

현재 무덤 주변에 있는 석물들은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에 있는 흥덕왕릉과 비슷하다. 김유신이 흥덕왕 대에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되면서 그의 무덤을 새롭게 정비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측 견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유신이 죽은 후 문무왕이 명령을 내려 비를 세우게 했다는 기록이 있어 원래 그의 무덤 주변에 비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발견되지는 않았다. 현재 무덤 앞 ‘신라태대각간김유신묘’(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란 글자가 새겨진 비는 1710년(숙종 36년)에 경주부윤 남지훈이 세운 것이다. 그 맞은편엔 근대기인 1934년에 세운 ‘개국공순충장렬흥무대왕릉’(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이란 글자가 새겨진 비가 있다.

무덤 호석에 새겨진 십이지신상을 눈여겨 볼만하다. 이를 보기 위해 김유신묘를 찾는 이들도 많다. 이곳 십이지신상은 특이하게도 다른 왕릉이 갑주무장상(甲胄武裝像)을 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평상복에 무기를 들고 있으며 모두 오른쪽을 향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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