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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간마을, 우물에 얽힌 전설, 큰 인물 키운 땅

남간사 흔적 마을 곳곳에 석정·당간지주 고스란히 원형 보존
경주신문 기자 / 1581호입력 : 2023년 04월 13일

↑↑ 남간사지 당간지주. 멀리 남간마을이 보인다.

경주 남산의 서남쪽 들머리 장창골(長倉谷). 이곳은 해목령에서 서북쪽으로 내려오는 큰 개울과 장창지에서 서쪽으로 내려온 계곡물이 일성왕릉 근처에서 합류해 서천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문무왕이 남산성에 전투 목적으로 지은 3동의 창고가 있었다고 해서 장창골로 불렸다. 좌우 창고는 무기창고, 가운데 창고는 전투를 위한 식량 저장고였다고 한다.


장창골은 신라 유적지 중에서도 특별히 성스러운 지역으로 꼽힌다. 주변에 신라 건국설화가 깃든 유적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신라의 첫 왕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깃든 나정(蘿井)이 대표적이다.


신라육부촌장의 위패를 모신 육부전(양산재), 신라 첫 궁궐터인 창림사지도 이곳에 있다.


육부전과 창림사지 사이, 금광평으로 불리는 들판엔 보물 제909호인 남간사지 당간지주가 있고, 그 뒤로는 남산이 배경처럼 솟아 있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엔 남간사지 석정(돌우물)이 있다. 그 주변으로 소박한 모습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경주시 탑동 남간마을 풍경이다.


↑↑ 남간사지 당간지주.


과장 조금 보태면 마을 전체가 절터

이 근처 어딘가 있었을 남간사는 신라의 승려 혜통의 집이 있었던 터에 창건한 사찰로 전해지는데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승려 일염(一念)이 원화(元和, 당나라 헌종의 연호) 연간(806~820) 남간사에서 ‘촉향분예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을 지었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원종흥법염촉멸신’조에 나오는 이야기다.


‘촉’(髑)은 ‘염촉’을 일컫는 것으로 법흥왕 때 불교진흥을 위해 순교한 이차돈의 다른 이름이다. 헌덕왕 9년(817) 흥륜사의 영수선사가 이차돈의 무덤에 예불할 향도(香徒)를 모아 매월 5일에 단을 만들어 법회를 열었다. 이차돈이 순교한 지 250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이차돈의 순교 내력을 기록한 일염스님의 결사문은 영수선사가 법회를 열 때 썼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남간마을은 남간사 외에도 불교사적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남간마을 일대엔 남간사를 포함해 예닐곱 곳 정도의 절이 모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남간마을은 전체가 절터인 셈이다.


게다가 신라 불교의 기틀을 다진 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의 집안도 이곳 남간마을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선덕여왕에게 황룡사 구층목탑을 세우도록 건의했고, 울산의 태화강 입구에 태화사라는 절을 세워 신라의 해운물류와 국방의 거점으로 삼았으며, 양산 영축산 밑에 통도사를 건립해 국가적으로 승려를 양성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오대산 월정사, 태백산 정암사도 그가 창건한 사찰이다.


신라 신문왕 때 널리 이름을 떨치기 시작해 효소왕 대에 국사까지 지낸 고승 혜통도 이 마을 출신이다. 그는 남간사의 동쪽마을 은천동에 살았는데,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아 죽인 일을 계기로 속세를 떠나 승려가 됐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 남간사지 석정.


명랑법사 관련한 흥미로운 일화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왕 재위 시절, 용궁에서 배워왔다는 주술적인 밀교(密敎) 의식인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으로 서해를 건너던 당나라 설방의 50만 대군의 배를 모두 침몰시켰다고 전해지는 명랑법사도 남간마을과 관련이 있다.


명랑은 앞서 언급한 자장율사의 조카다. 다시 말해 명랑의 어머니 남간부인(법승랑으로도 불렸다)의 남동생이 자장율사다. 명랑의 두 형 또한 ‘대덕’ 칭호를 받은 덕망 높은 승려였다.


‘삼국유사’엔 명랑법사와 관련한 흥미로운 또 다른 일화도 있다. 명랑이 당나라에 유학한 뒤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는 바다 용의 청으로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하고 황금 1000냥을 시주받은 뒤 땅 속으로 몰래 들어가 자기 집 우물 밑으로 솟아나왔다. 이후 자기 집을 내놓아 절을 짓고, 용왕이 시주한 황금으로 탑과 불상을 꾸몄다. 유난히 광채가 빛나 절 이름을 금광사(金光寺)라고 했다는 게 대략적인 내용이다.


남간사지 석정이 명랑법사가 솟아나온 우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부 학자들은 이 동네가 남간부인과 연관돼 ‘남간’이란 마을 이름을 갖게 된 것으로 보고, 몇 가지 석조유물이 나온 인근 한 연못(금강못, 또는 금강저수지) 부근이 명랑법사의 출생지이자 금광사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 일제강점기 때 촬영한 남간사지 석정. <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


옛 절터 흔적, 마을에 고스란히 남아

남간사지 당간지주는 통일신라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별다른 장식 없이 단아한 모습을 하고 있다. 지주 상단부 바깥면 모서리의 각을 없애는 식으로 조형상의 변화를 준 점이 특징이다.


특히, 당간을 고정하기 위해 간구(杆溝)와 간공(杆空)을 만들었는데, 십자형으로 음각한 간구는 다른 곳에선 찾아볼 수 없는 매우 특이한 수법으로 평가받는다. 당간을 안정적으로 고정하기 위해 고안된 형태로 추정된다.


남간사는 규모가 상당히 큰 절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남간사지 금당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남간마을은 당간지주에서 300여m 이상 떨어져 있다.


이 마을 도연언덕엔 남간사지 석정이 있다. 깊이가 1.4m 정도 되는 이 우물은 자연석으로 외벽을 짜 올리고, 위쪽은 2장의 다듬은 돌로 원형 틀을 덮어 마감했다. 우물 틀 둘레에 위아래로 이중테를 둘렀는데, 윗단은 직각으로, 아랫단은 곡선으로 조각했다. 이 우물은 분황사 석정, 재매정 등과 함께 신라 우물의 원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지금은 문화재 보호를 위해 옛 우물 위에 큼직한 돌을 덮고, 그 위에 다시 스테인리스 구조물을 얹어놓은 탓에 옛 우물의 면모는 느껴지지 않는다.
남간사의 흔적은 이 마을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1998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이종식 가옥엔 남간사 장대석과 방형초석 등 29점의 석재가 건축재로 사용됐고, 손찬익 가옥의 경우 우물뚜껑 석재와 탑재 등이 건축 자재로 활용되는 등 마을 내 상당수 민간가옥이 남간사를 비롯한 옛 절터에 남아있던 석재를 건축재로 썼던 것으로 조사됐다. 지금도 마을을 다니다 보면 절터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덮개돌이나 석재 등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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