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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시대 사람들이 다녀간 신라왕경 경주는?(上)

역사 뒤돌아보는 감상의 장소 경주, 한시 통해 확장되는 상상 속 왕경
선애경 문화전문 기자 / 1477호입력 : 2021년 02월 25일
↑↑ 경주 시내권 유적을 그린 지도(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는 삼국의 신라가 발전해 통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설과 역사적 사건들의 무대가 되었다.
삼국통일 이후는 한반도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서 왕궁과 사찰, 수많은 탑과 불상 등의 건축이 이뤄지면서 화려한 도시로 번영했으나 신라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왕경은 경주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화려한 왕경의 터전이었던 산천은 옛 모습 그대로였지만 신라의 왕과 귀족들이 누렸던 도시의 화려함은 잡초가 무성한 폐허로 변했다.

이 폐허의 자취는 후세 사람들이 신라의 번영과 몰락을 추억하고 감상하는 소재가 되었다. 고려와 조선의 많은 이들이 경주를 찾아 신라의 옛 터전을 답사하고 시와 기행문으로 그 감상을 남겼다.

그 중에서 경주를 다녀가면서 남긴 대표적 한시 몇 수를 살펴보면서 조상들이 감상했던 신라왕경 경주의 다채로운 모습을 이해하고 옛 사람들과 우리들을 이어주는 감상의 연결고리를 찾아보기로 한다.
본 기사는 두 편으로 구성되며 고려와 조선의 우리 조상들이 경주를 여행하고 남긴 한시(漢詩)와 옛 사진 등을 담아 경주의 중요 유적을 소개한 ‘우리 조상들이 다녀간 신라왕경, 경주(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19)’에서 발췌하고 인용해 재구성했음을 밝힌다.

이번호에서는 도심속 신라무덤인 ‘봉황대’, 신라 최초의 왕비에 대한 ‘알영정’, 신라 궁궐과 그 주변인 첨성대, 월성, 월지, 옛 절터 황룡사구층탑 등 시내 일대의 유적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들 유적지는 걸어서 갈 수 있는 시내권에 위치한다. 고려와 조선의 문인들이 시로 읊었던 유적들은 당시의 분위기나 상황은 물론, 지금과는 다른 유적의 위치나 경관 등을 미루어 상상할 수 있었다. 특히 ‘황룡사 탑을 오르다(登黃龍塔)’는 황룡사를 직접 올라가보고 전체적인 풍경을 읊은 시여서 더욱 귀했다.

‘우리 조상들이 다녀간 신라 왕경, 경주’ 발간을 기획했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전경효 주무관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물론, 고려와 조선으로 갈수록 경주 관련 문학작품이 많았고 그 중에서 한시가 많았습니다.

옛 사람들이 남긴 유적을 상상할 수 있는 매개로는 문인들이 남긴 한시가 좀 더 적합했습니다. 오늘의 현대인들이 다녀가는 문화유산유적지들은 고려와 조선의 당대 사람들도 다녀간 유적지들입니다.
‘신라’라는 왕경은 사라졌지만 경주라는 정체성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궤를 통해 흐르는 유적지에 대한 공통의 감정을 옛 한시를 통해 느껴본다면 훨씬 감상의 폭이 넓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려시대의 ‘동경’, 조선시대의 ‘경주’가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와 유적을 새롭게 해석하고 재발견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 것입니다”라고 했다.

↑↑ 봉황대 1920년(경주신문 소장).

-‘봉황대(鳳臺崇)’

읍성 교외로 이은 탁 트인 거리 通衢連紫陌
그 가운데 높은 봉황대가 있네 中有鳳臺崇
안팎으로 뻗은 산하는 웅장하고 表裏山河壯
들판에 넘치는 물색도 풍요롭네 郊原物色豐
천문 살핀 곳 벽돌 기운 삼엄하고 氣森觀祲甓
새벽 알리는 종소리 마음 상쾌하네 心爽戒晨鐘
천 년 전 그 흥망성쇠의 한 千古興亡恨
눈길 속으로 모두 들어오네 都輸望眼中


#이현일(李玄逸, 1627~1704)
이 시는 조선 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이현일의 갈암집 권1에 수록된 시다. 그는 22세 회시에 낙방한 후 학문에 전념하던 중 1654년 경주를 방문한다. 봉황대를 비롯해 옥산서원, 김유신묘, 분황사 등을 유람하며 신라 천년의 흥망성쇠와 자신의 가문을 회고했다. 경주 시내에 자리잡은 옛 무덤들은 경주 읍성 남쪽으로 뻗은 봉황로를 중심으로 동서로 나뉜다. 길 동쪽에 있는 고분군 가운데 가장 큰 무덤이 봉황대(노동동 125호분)다.

↑↑ 알영정(국립중앙박물관).

-‘알영정(閼英井)’

우물에 나타난 신룡이 낳은 여자 아이 井現神龍誕女兒
늙은 할멈이 거두어 길러 왕비가 되어 老嫗收養作王妃
하늘이 내린 어진 덕 규중의 법도를 세우니 千生賢德成閨範
두 성인이 한마음으로 지극한 정치 펼쳤네 三聖同心致至治


#성여신(成汝信, 1546~1632)
조선 중기의 학자 성여신의 시문집인 부사집 권1에 실린 시다. 그는 글씨와 문장에 뛰어났으며 산수유람을 즐겼다고 한다. 노년엔 지방지 편찬을 주도해 역사에 남다른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중년에 경주를 유람하고 경주의 유적을 소재로 27수의 절구를 남겼다. 이들 시에는 역사를 거울삼아 현실을 구제하려는 경세(經世)사상이 반영돼 있다. 오릉의 숭덕전 뒤편에는 담장으로 둘러싸인 비를 세워놓은 건물이 있고 건물 뒤쪽에 알영정으로 전하는 우물이 있다. 남쪽에는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비’가 있으며 뒷면에는 비석을 세운 내력을 기록했다.

↑↑ 첨성대(경주신문 소장).

-‘첨성대(瞻星臺)’

첨성대는 월성 안에 우뚝이 서 있고 瞻星臺兀月城中
옥피리 소리 그 옛날 교화 머금었네 玉笛聲含萬古風
문물은 시절 따라 신라 때와 달라도 文物隨時羅代異
아! 산수만은 예나 지금이나 한가지네 嗚呼山水古今同


#정몽주(鄭夢周,1337~1392)
고려 말기 문신이자 학자인 정몽주의 문집인 포은집 권2에 시린 시다. 성균대사성, 동지공거, 수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그는 시문에 뛰어나 많은 시조와 한시가 전한다. 한편 ‘동경유록’에서 이덕홍은 ‘첨성대는 곧 당시에 별의 형상을 관찰하던 곳이다. 가공한 돌을 쌓아서 높이가 수십 장이고 형체는 둥글고 덮개는 네모나며 가운데는 넓고 목 부분은 좁다. 허리 쪽 구멍으로 들어가서 가운데에서 위를 올려다본다’라고 썼다.

↑↑ 경주 인왕동에서 바라 본 월성 남쪽 전경(1926년, 국립중앙박물관).

-‘반월성(半月城)’

외로운 성은 약간 굽어 반달을 닮고 孤城微彎像半月
가시덤불은 다람쥐 굴을 반이나 가렸네 荆棘半掩猩鼯穴
곡령의 푸른 솔은 기운이 넘쳐나는데 鵠嶺靑松氣鬱蔥
계림의 누른 잎은 가을엔 쓸쓸하다 鷄林黃葉秋蕭瑟
태아검 자루를 거꾸로 잡은 뒤로부터 自從太阿倒柄後
중원의 사슴은 누구 손에 죽었던가 中原鹿死何人手
강가의 여인들 부질없이 옥수화를 전하고 江女空傳玉樹花
봄바람은 얼마나 금제의 버들을 흔들었나 春風幾拂金堤柳


#이인로(李仁老, 1152~1220)
고려 후기의 문신 이인로의 시로 동문선 권6에 실려 있다. 그는 고려시대 문인들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대가중 한 사람으로 특히 시문학의 역량과 수준은 당대에도 인정받았다. 반월성을 소재로 한 가장 오래된 작품이기도 한 이 시에서 많은 고사를 활용해 부질없는 세월과 현실에 참여할 수 없는 슬픔을 드러내고 있다. 한편, 월성에 대한 발굴 조사는 1979년부터 시작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최근 조사결과 월성 내부는 4세기서부터 8세기 이후까지 존속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 안압지(경주신문 소장).

-‘안하지 옛 터(安夏池舊址)’

못을 뚫어 물을 채우니 물고기 소라 자라고 鑿池爲海長魚螺
물길을 당겨 중심에 대니 콸콸 흐르네 引水龍喉勢岌峨
여기서 놀이하다 신라는 나라를 잃었는데 比是新羅亡國事
지금은 봄물로 좋은 벼가 자라나네 而今春水長嘉禾


#김시습(金時習, 1435~1493)
조선초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김시습의 매월당시집 권12의 유금오록에 실린 시다. 21세 계유정난 시 스스로 승려가 되어 전국의 역사고적을 찾고 산천을 보며 많은 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러다 세조 11년(1465) 경주 남산의 용장사에 금오산실을 짓고 7년간 칩거하면서 금오신화 및 명승고적을 둘러보고 많은 시를 지었다. 이 시의 ‘안하지’는 월지다. 신라 멸망 이후 폐허가 된 월지를 불렀던 명칭으로 보이며 조선 후기에는 건물터와 호수 정도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임해정’이라는 전각이 세워졌고 해방 이후 주민들의 낚시터로 이용되기도 했다.

↑↑ 황룡사 터(국립중앙박물관).

-‘황룡사 탑을 오르다(登黃龍塔)’

한 층을 보고나서 또 한 층을 보니 一層看了一層看
걸음걸음 높이 올라 눈길이 점점 넓어지네 步步登高望漸寬
지면은 깎은 듯이 널찍이 평평하여 地面坦然平似削
지친 백성들 무너진 집도 평탄하니 볼 만하네 殘民破戶平堪觀

#혜심(惠諶, 1178~1234)
고려 후기의 승려 혜심의 시로 ‘무의자시집’에 실려 있다. 지눌의 뒤를 이어 수선사의 제2세 사주가 돼 교세를 확장했다. ‘무의자시집’은 혜심의 시인으로서의 감수성과 수행에 정진하는 수도자로서의 면모를 동시에 보여준다. 한편, 황룡사 탑은 구층목탑으로 추정하는데, 이는 혜심의 ‘한 층을 보고나서 또 한 층을 보니 걸음걸음 높이 올라 눈길이 점점 넓어지네’라고 한 부분에서, 김극기의 시에 ‘층계로 된 사다리는 빙빙 둘러 허공에 나는 듯 1만 산과 1천 강물이 한 눈에 트이네’라는 부분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다.
선애경 문화전문 기자 / 1477호입력 : 2021년 0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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