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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독점, 지면 최초 공개]③육훈(六訓) 그대로 실천해 증명하는 문서들도 대거 발견

육훈 실천했던 최부자… 엄연한 당대의 기록들로 방증
선애경 문화전문 기자 / 1401호입력 : 2019년 08월 01일

↑↑ 교촌농계부, 식상기, 추수기 등 이번에 발견된 문서 중 육훈을 증거하는 자료들.

서민들 배려하고 상생했던 근간-육훈 실천하며 부자의 본보기 돼


300년간 부를 누린 최부자 집안에는 합리적이고 현명한 지침들이 있었다. 절제를 통한 공생을 실천하고 나눔을 실천해 공동의 번영을 이룬 최부잣집은 10대에 걸쳐 가거십훈(家居十訓)을 바탕으로 육연(六然)과 육훈(六訓)을 실천하면서 존경받는 부자의 본보기를 보여왔던 것이다. 후일 자손들이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 실천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이 가르침은 후손들이 오만과 지나침이 없이 살아가는 지렛대 역할을 해주었다.

↑↑ 1949년 기록으로 가장 늦게까지 지세조정을 기록한 문서.

육훈에 관한 기록은 많지만 이번호에서는 이번에 발견된 문서에서의 기록들에 한해 구성했다. 따라서 육훈 전체를 다룰 순 없었다. 발견된 문서중 ‘과지(科紙, 과거 시험지)’는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는 육훈에 해당되었고 구휼기인 ‘기구성책’과 ‘진급기’는 ‘주변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육훈에, ‘과객도기’와 ‘식상기’는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는 육훈에, ‘추수기’와 ‘지세조정’ 등의 문서들은 ‘만석 이상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는 육훈을 그대로 실천했음을 증명하는 문서들이었다. 육훈을 방증하는 근거가 엄연히 당대의 기록으로 보존되고 있었다. 이들 문서들에선 서민들과 상생하고 그들을 배려했던 부자의 넉넉함이 배어 나왔음은 물론, 애초에 벽을 없앤 합리적이고도 현명한 부자였음이 재확인됐다. 그들은 도덕성을 겸비한 존경받는 부자였다.

한편, 이들에 관련한 문서(경제사로 이두 문자로 표기돼 있는 부분이 많아 아직 해석이 안 된 부분도 많음)들은 아직 번역이 미흡해 경주최부자선양회 최창호 이사의 자문을 덧붙였다. 자료사진들은 최부자선양회에서 제공.

↑↑ ‘과객도기’ 표지와 과객들의 명단(모두 생원으로 기록)이 적힌 내용.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과지(科紙) 50장 넘게 발견, 집안 대대로 아홉 진사 배출

육훈 중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의 증거로 과거시험지들이 발견됐다. 최부자 9대 진사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9대 시험지가 보관돼 있었다. 당시의 과지들은 지질도 좋고 보관도 매우 양호한 상태로 50장 넘게 발견됐다. 시험 방식에 따른 진사시와 생원시 시험지 외 낙방했던 시험지 등이었다. 과지에는 등수까지 표기돼 있으며 최부잣집은 중간 정도의 성적이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눈길을 끄는 것은 시험지 채점 방식이 지금과 같이 블라인드 채점 방식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인적사항이 적힌 한쪽을 접어 묶어둔 흔적이 그것이다. 이는 채점시 응시자를 알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최창호 이사는 “최부잣집은 9첩 진사집안이었습니다. 집안 대대로 아홉 분의 진사를 배출한 것이지요. ‘진사 이상 벼슬은 하지 말라’는 것은 진사벼슬 정도는 해야 신분상 선비로서 사회적 공인을 받게 돼 양반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고 지나친 욕심은 재앙을 초래 할 수 있으니 부와 권세를 모두 가지려 하지 말 것을 교육했습니다. 만석의 농사를 짓고 유지하려면 기본적인 지식을 갖춰야 신농법을 익히고 지역사회에서 소통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또 혼란한 정쟁 속에서 희생양이 되거나 패가망신하는 일을 방지하고 양반으로서의 신분은 유지하되 권력과는 일정 거리를 유지하라는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 진사 이상은 과욕으로 본 것입니다”라고 설명했다.

↑↑ ‘과객도기’ 표지와 과객들의 명단(모두 생원으로 기록)이 적힌 내용.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과객도기’, ‘식상기’ 남아있어...과객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후하게 대접해서 덕을 쌓고 인심 얻으라’

또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는 가르침의 증거로는 ‘과객도기’라는 책에서 다녀간 손님들의 집계표가 있어 점심, 저녁을 대접한 기록이 전해진다. ‘식상기’는 밥상의 숫자를 기록한 책이다. 갑오년 4월 과객도기에선 생원들의 명단과 식상의 숫자가 보인다.

↑↑ 최만선의 과지.

각종 도기(到記)는 많으나 방문한 과객을 기록한 한 집안의 도기는 전국적으로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발견된 문서 중 과객도기는 한 권이 있다. 최부잣집에 다녀간 과객들이 내왕한 내용으로, 과객을 모두 이름없이 ‘김생원, 이생원’ 등 ‘생원’으로 표시해 굳이 구분하지 않았고 날짜별 손님의 숫자를 ‘점심에는 58명이, 저녁에는 200여 명’ 등으로 기록해두었다. 최부잣집은 과객들의 분류를 달리했는데 글 좀 하는 소위 선비들은 사랑채에서 묵고 다른 이들은 최부잣집 근처동네의 소작인 집에서 묵었다. 이들 소작농가에겐 소작료를 받지 않았고 대신, 최부자 과객을 보내면 음식을 대접해 소작료를 대신했다고 한다. 손님을 보낼 때는 청어과메기를 함께 보내 소작농의 수고를 덜어주었다. 매우 합리적이었던 풍경이다.

최부잣집의 후한 인심을 기억하는 과객들은 혹여 제기됐을 음해에도 옹호해주는 이들이었을 것이다. 넉넉한 인심을 베풀었던 최부자의 이미지는 지속적인 호응을 가져왔다. 그리고 박달리 밭에서 생산하던 고급한지를 과객들 중 선비들에게 한 묶음씩 주곤 했다고 최염 경주최씨중앙종친회 명예회장이 구술한 기억담을 최 이사가 들려주었다. 최 이사는 “손님을 후하게 대접해서 덕을 쌓고 인심을 얻으라는 가르침으로 과객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덕목입니다. 이는 선행을 베푸는 것이기도 하지만 신문이나 TV가 없던 시절에 정보 전달자 역을 하던 과객들을 통해 최씨 집안은 세상과 소통하고 다른 지역의 민심도 알 수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라고 했다.

↑↑ 부내면 기구성책.

-‘만석 이상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추수기’, ‘농계부’, ‘지세 조정’... 한 집안의 300여 년에 걸친 만석 재산의 추수내역 기록

최부자가 만석의 재산이었다는 것은 ‘추수기’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추수기에 최부잣집이 매년 농사 지은 소작료를 받은 것을 기록한 책이 250권 있다. 추수기와 지세조정, 농계부 부분 문서들을 합하면 500여 문서가 보관돼있다고. 한 집안의 300여 년에 걸친 만석 재산의 추수내역 기록으로 10권짜리 20묶음이 보관돼있는 예는 지금까지는 발견된 바 없다. 만석 재산을 소작하면서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의 학술적 가치는 가늠키 어렵다.

↑↑ 최부잣집이 매년 소작료를 기록한 추수기.

추수기는 당시의 경제적인 상황, 경주 일대의 날씨와 기후 변화, 곡물 정보 등 다양한 연구 가치를 지니고 있다. 추수기와 함께 발견된 ‘농계부’는 지금의 농지원부로서 토지의 위치와 규모가 나타나있어 만석의 재산을 가늠할 수 있는 기록이다. ‘지세 조정’은 영농환경 즉, 풍흉년에 따라 그해그해마다 매수를 체계적으로 조정한 기록들이다. 이 지세조정은 흉년에는 지세를 깎아주었던 기록으로 만석 이상 짓지 말라는 육훈에 해당된다. 이들 문서를 통해서는 영농에 관한 모든 부분을 기록으로 남겨 체계적인 영농을 시행해 만석의 재산을 운영했음이 보인다. 최부자의 ‘만석’은 그 기준선을 지켰다는 의미로서 만석 이상의 초과 재산은 사회에 환원했다. 그 예로 보(수로)를 일제강점기까지 만들었는데 현대식으로 만들었던 그 설계도가 이번에 문서로 발견됐다. 보를 만들어 농업 환경을 개선해 주었던 것.

또 당시 소작농과의 소출 비율이 일반적으로 7대3이었던 것에서 5대5로 파격적용했다. 이는 소작농에게 더욱 많은 이익을 나누고자 함이었는데, 동기부여에 힘입은 소작농들은 훨씬 많은 소출을 낸다. 결국은 최부자가 토지를 넓힐수록 소작농의 살림도 나아졌다. 소작농들을 격려하면서 상생하고 살았던 최부자 경영방식은 현대 기업의 경영방식에 적용되어도 좋을만하다. 그 지역사회 서민과의 상생환경을 만들어나갔다는 측면에서 최 부자의 실학정신에 기인한 선순환이었고 실사구시였다.

↑↑ 인적사항이 적힌 부분이 잘려나간 과지.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을 없게 하라’/ ‘기구성책’, ‘진급기’...굶주린 사람, 생활보호대상자격인 명단과 곡식 배급해준 회계장부까지 남아있어

이 가르침은 ‘기구성책’과 ‘진급기’ 문서에서 명확하게 확인된다. 기구성책은 임자년에 묶여져있는 한 권이다. 지금껏 이러한 구휼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기구성책’에는 기구자 명단 즉, 굶주린 사람, 생활보호대상자격인 명단이 적혀 있음은 물론, 회계장부까지 남아있다. 한편, 보호받아야 할 사람의 명단을 근거로 곡식을 배급했던 ‘진급기’라는 책도 발견됐다. 각 지역별로 명단을 기재하고 있는데 기재된 명단에는 하층민으로 추정할 수 있는 이름들이 많다. 예를 들어 부내면 기구성책에는 동부(東部)에 김발이, 박울산, 최봉길, 최억수, 김중리, 고서방, 석순이, 갑이 등으로 그들의 숫자를 ‘口’로 표기하고 있다.

↑↑ 경주 66문중이 참여한 ‘단연회사경비분배기’.

‘진급기’는 기구 대상자 명단에 근거해 적절하게 배급해준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당시 곡식을 나눠 준 것으로 배급하면서 지출된 내역을 기록한 회계 장부와 함께 기록돼 있다. 구휼의 정신은 영남대에 기중한 책 중에서 9대 만석꾼 최현식이 기아에 굶주린 사람을 구해내는 방법에 대한 책인 ‘기곤인구활법’이라는 저술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부잣집에서 이러한 책을 저술한 것은 서민의 곤궁한 부분까지 세심하게 챙겨살펴봤음을 엿볼수 있다.

↑↑ 곡식을 배급했던 ‘진급기’.

↑↑ 과지들.

문서 이외에도 최염 회장이 구술한 기억담 중에는 굶주린 이들을 보살폈던 최부잣집 이야기가 전해진다. 최국선 최부자 1대 당시 매우 큰 흉년이 져, 최부자 곳간을 처음으로 열어 구휼로서는 최초 시행이었던 ‘활인소’를 운영해 죽을 쑤어 굶주린 빈민을 구제했던 이야기, 또 ‘구멍 뒤주’로 구휼한 방식은 6.25즈음까지도 있었다고 한다. 1미터가 채 안되는 상자 윗부분에 구멍이 작게 뚫려있어 한 줌 정도를 가져갈 수 있도록 만들어 대문앞에 예닐곱개를 놔두고 내내 쌀을 보충해두었다고 한다. 국가에서 할 복지정책을 최부자 사가에서 실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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