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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독점, 지면 최초 공개]② 경주의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국채보상운동… 경주전역 66문중과 함께 10개면에서 선도적 참여 통한 거센 전개
선애경 문화전문 기자 / 1400호입력 : 2019년 07월 25일

↑↑ 1907년 정월에 김시권 등이 국채보상운동에 관한 내용을 경주지역에 알린 광고 문안 전문.

5000명 넘는 참여명부 최초 발견-입체적 전개과정 기록으로 증명


최근 한일간 수출규제 갈등이 갈수록 확산되면서 1907년부터 1908년 사이, 국민들의 모금으로 국채를 갚기 위해 전개된 국권회복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전 민족적 애국계몽운동이었던 이 운동은 당시 대한제국이 안고 있던(주로 일본에서 도입) 외채 1300여 만원을 갚기 위해 민간차원에서 모금 활동을 벌인 운동으로 110년 전 이 땅, 경주에서도 거세게 전개됐음이 최부잣집 여러 관련문서속에서 증명된다. 국채보상운동에 당시 경주지역민들도 선도적인 참여를 했던 문서자료들로서 단연회사경비분배기, 경상북도 경주군 금연회사 설립 취지서, 광고 문안, 경주국채보상의연금성책, 향교연성회사규칙, 국채보상금검사소 편지 등이 이를 방증한다.국민이 담배를 끊어 그 성금으로 상환해 독립의 기초적 실력을 튼튼히 하고자 전개된 이 운동은 1908년 초까지 전국으로 확산됐으나 일제의 방해와 탄압으로 좌절됐다.

한편, 열기의 중심이었던 대구를 중심으로 한 경북에서는 41개군 모두가 국채보상의연금 수합소를 설치한다.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1907년 4월부터 12월까지였다. 특히 6월∼8월에는 가장 많은 의연금이 모아졌다.

경주국채보상의연금 성책도 정미 6월에 모두 취합했던 기록이며 이번에 발견된 문서들에선 ‘정미년 정월’이라고 기록된 부분이 많아 어느 지방보다 경주에서 선도적 참여가 이뤄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하 기사내 각 인물의 존칭은 생략하며 자료와 문서사진들은 (사)경주최부자선양회에서 제공.

↑↑ 경상북도경주 국채보상의연금 중 강서면 두류동 명부.

-최부잣집 문서들에선 경주국채보상운동의 입체적인 전개과정이 분명하게 기록으로 전해져

대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는 자료가 거의 빈약한 상태에서 시작했으나 이 운동을 부각하면서 전국에서 영수증이나 성금책자, 광고지 등 서류를 협조받거나 기부받은 자료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수 천장이지만 모두 낱 장으로 보관중이다. 그러니 국채보상운동의 실체를 알 수 있는 스토리는 이번에 발견된 최부잣집 문서들에서 입체적인 전개과정이 더욱 분명하게 증명되고 있다. 경주에서는 취지문을 만들어 문중이 모여 성금을 거두는 방법, 광고 문안, 각 지역별 성금을 낸 이들의 명단과 금액 및 일진회의 방해 공작 등의 스토리가 있는 문서들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는 것이다.

↑↑ 경주 66문중이 참여한 ‘단연회사경비분배기’.

-‘단연회사경비분배기’...경주 66문중이 힘을 합쳐 708냥 수합해 국채보상운동 단초 마련

경주 국채보상운동의 단초로서는 경주의 66개 문중이 힘을 합쳐 국채보상운동을 펼치기 위한 초기 경비를 마련한다. 이는 경주 66문중이 기록된 ‘단연회사경비분배기’ 문서에서 잘 나타나있다. 그 문서에는 가암최씨문중과 함께 양동이씨문중과 손씨, 국동권씨, 노곡정씨, 리문내이씨, 천서이씨, 삼귀정이씨, 인좌손씨, 호명안씨, 모서신씨, 광암조씨, 옥산이씨, 두동권씨, 홍천홍씨, 양월이씨, 산대이씨, 사동김씨, 하구서씨, 선동정씨와 이씨, 부산정씨, 조전백씨문중 등 경주 66문중이 함께 한 것으로 나타나있다. 기록에선,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행정구역편제가 보인다. 경주 전체 66개 문중에서 문중경비분담으로 수합된 합계금액은 708냥이었다. 이 경비를 바탕으로 해서 국채보상운동의 실질적인 운동이 발화된 것이다.

↑↑ ‘국채보상경주향교 단연회사’


-‘경상북도 경주군 금연회사 설립 취지서’...‘일 원, 이원을 모으면 몇천 원, 몇만 원을 모으게 되나니...,’

‘경상북도 경주군에 사는 전 교리 이중구와 전 참봉 최현식 등 수 십 인이 국채보상의 일에 대해 금연회사를 조직했다.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중에서)’. 1907년 4월 27일 만세보 3면에 실린 경주군 금연회사 취지서는 아래와 같다. 광무11년(1907년) 음2월 5일에 작성된 것으로 최현식(9대 최부자·인물사진) 등이 국채보상의 일에 대해 금연회사를 조직한 취지를 담고 있다. 그 중 일부를 발췌했다(자료의 원문번역).
 
↑↑ ‘경상북도경주군 금연회사 취지서’.

‘우리 금연동맹이여, 우리나라 외채가 1300만원에 이르렀으니 지금 갚지 않으면 장차 갚기 어려운 상황에 이를 것입니다. 이천만 동포는 어느 땅에서 입고 먹을 것이며 누구의 집에서 살 것입니까? 국가의 수치와 백성의 치욕이 오늘이라도 닥칠 것인데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담배를 끊어 빚을 갚을 목적의 단체가 달성부(대구)에서 만들어져서 서울에서도 모임이 이루어졌습니다. 나라를 위한 소박한 정성이 궁궐에 닿아서 대황제 폐하(고종 황제)께서 담배를 끊으시니 무릇 우리 백성이 황송하여 눈물이 흐릅니다. 이 먼 고을은 오백년은 성은을 입어 자랐으며 삼천리강토에서 옷 입고 밥 먹었으니 비록 집안에 얼마 되지 않은 곡식조차 없더라도 마음속에 품은 의기는 천 개 만 개의 창고 보다 많습니다. 무릇 우리 동포여! 이러한 이유로 한 명에게 전하고 두 명에게 전하면 천 명을 깨우치고 만 명을 깨우치게 되고 일 원, 이원을 모으면 몇천 원 몇만 원을 모으게 되나니...,’

↑↑ 경상북도경주 국채보상의연금 중 부내면 교촌 명부.

-5086명 명단 적힌 ‘단연회 성책’은 지역별 명단 가운데 전국 최대 규모 기록

이어 경주에서 국채보상운동은 ‘연성회’라는 이름으로 결성되고 ‘담배를 끊어 국채를 갚자’라는 구호를 내걸게 된다. 나랏빚을 갚자고 남녀노소 시민들이 참여한 국채보상운동의 경주지역 명단이 적힌 ‘경주국채보상단연회 성책’은 지역별 명단 가운데 원자료를 기준으로 최대 규모다. 이 책에는 경주 각지에서 답지한 크고 작은 성금(당시 화폐단위로서 원(元)과 전(錢)으로 표기됨)을 낸 5000명 이상의 이름과 금액이 모두 기록돼 있다. 성책 제일 앞부분에 적힌 이름은 단연회 회장을 맡았던 경주 최부잣집 11대손 최현식 선생. 최부잣집이 국채보상운동도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최현식(崔鉉軾, 1854~1928)은 국채보상운동이 아직 활성화 되기 전 1907년 1월 22일, 경주의 국채보환단연동맹회에 보낸 편지에 100원을 기부한다는 내용을 편지로 썼다. 이렇듯, 존경받는 최부자집에서 운동을 적극 주도해 이후 경주민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한 것으로 보인다. 최현식은 1888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이후 선대의 유훈을 받들며 살림을 불려나갔다. 흉년이 들었을 때는 수백 명의 굶은 이들이 매일 집 앞에 모여들어 마치 시장을 방불케 했다고 전해진다.

↑↑ 경상북도경주 국채보상의연금 중 강서면, 천지면, 현곡면 명부 표지.

-경주군 10개의 면 단위서 모인 총금액은 3250원으로 현재 가치로 수 억원대에 이른다고 추정

정미유월에 모두 취합을 했던 ‘경주국채보상의연금’에는 부내면(경주 시내권), 강서면, 천지면, 현곡면, 내남면, 내동면, 외동면 등 10개면에서의 참여가 있었다. 이 기록은 한 장 씩 취합한 개인이 낸 낱장 영수증을 취합한 것을 토대로 성책에 옮겨 적은 것이다. ‘최현식 백원, 최현교 오십원, 이규호 이원, 박인상 팔십전, 최세일 사십전’ 등 상세하게 적혀있고 기본이 이십전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크고 작은 금액이 답지해 있었다. 의연금 성책 안강 명단에는 금액만 기록하고 명단은 추후 기록한다며 그 페이지를 따로 비워 둔 것이 눈에 띄었다. 경주군 전역 10개의 면 단위, 각 리에서 모인 총금액은 3250원으로 현재 가치로 수 억원대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광고 문안, 국채보상운동에 관한 내용 경주지역에 알려
1907년 정월에 김시권 등이 국채보상운동에 관한 내용을 경주지역에 알린 광고다. ‘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단연상채운동에 우리 경주지역 백성들도 동참하는 것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므로 2월 5일에 일제히 모여 모임을 가지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 ‘향교연성회사규칙’

-‘향교연성회사규칙’, ‘마을의 각 문중들은 납부기일 따지지 말고 돈이 마련 되는대로 납부하라’

국채보상운동은 초기에는 거의 향교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1907년 음3월 7일 연성회(국채보환단연동맹의 정식 호칭)가 회사 운영규칙을 제정해 공표한 문서다. 국채보상의연금의 모금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에 운영 규칙을 정해 국채 보상의 의무를 분발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규칙 중에서는 ‘회사를 향교에 설립하고 연성회사라 호칭할 것과 회사를 출입하는 인원은 금연할 것, 마을의 각 문중들은 납부기일을 따지지 말고 돈이 마련 되는대로 납부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특히, 각 면 각동에서 만약 사람의 수를 빠뜨리면 다시 조사할 것도 밝히고 있다.

↑↑ 단연회 성금 납부영수증 낱장.

-일진회 편지, 경주 지역에서의 운동 방해하려는 공작 엿볼 수 있어

1907년 8월, 본부 일진회장 김형달이 경주군단연회장 최현식에게 보낸 편지다. 경주지역에서 모금한 의연금과 이자를 본부에 납부하고 사람의 명단을 신문상에 게재하라는 내용이다. 일진회가 개입해 교묘하게 써서 경주 지역에서의 운동을 방해하려는 공작을 엿볼 수 있는 편지글로 보인다. 한편 임천식은 의연금 17434냥을 서울 본사에 납부하겠다는 내용으로 편지를 썼으며 당시 임천식은 연성회 재무를 역임한 이다.

-국채보상금검사소 편지
1908년 10월, 국채보상금검사소에서 경주 군수 이기에게 보내온 국채보상금검사소 취지문을 경주 군수가 경주 백성들에게 공고한 내용이다. 일진회는 전국적인 국채보상검사소를 만들어 국채보상운동을 제대로 했는지의 여부를 조사했다. 모금한 서류에 대한 감사로 낱낱이 조사했다.

본 기사는 최부잣집에서 발견된 문서를 번역한 내용에 한한다. 경주국채보상운동과 관련해 발견된 문서들을 토대로 개괄적으로 구성했으나 짜임새있는 스토리를 아직 다 밝힐 수 없는 한계가 있음을 밝힌다. 국채보상운동 관련 문서들 중 일부 완역된 것도 있지만 대체로 제목과 내용정도만 번역돼있는 상황이어서 심층적인 연구와 분석은 전문학자의 몫으로 남는다.
선애경 문화전문 기자 / 1400호입력 : 2019년 07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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