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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독점, 지면 최초 공개]경주최부잣집 곳간서 누대에 걸친 수 만 건 문서 발견①-들어가면서

경주 최부잣집 정신의 보고<寶庫>… 문서 대거 발견, 오랜 시간 끝 마침내 그 베일을 벗다
선애경 문화전문 기자 / 1399호입력 : 2019년 07월 18일

↑↑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 최창호 이사는 우연한 기회로 창고를 열었고 보물급 문서들이 쏟아졌다고 한다.

엄청난 보물급 자료로, 경주의 기록유산
학술적 연구와 아카이브 구축해 전시와 유물관 설립 서둘러야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을 실현한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그대로 증명한 문서들이 최부잣집에서 발견됐다. 만석꾼을 10대에 걸쳐 배출한 경주 최부잣집. 3백여 년간 이어져 온 대표적인 조선의 부자 가문으로 이웃을 위해 곳간 문을 활짝 열었던 명가인 최부잣집 창고에서 수 만 건의 문서들이 발견된 것.

↑↑ 승경도.

 지난해 여름,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 최창호 이사는 우연한 기회로 창고를 열었고 최 이사가 직접 발견한 이 문서들은 평소 예사롭게만 봤었던 큰 궤짝 세 개에서 쏟아졌다. 누대에 걸쳐 켜켜이 쌓여져있던 보물급 문서들이 세상과 눈부신 조우를 한 것이다. 만시지탄이지만 그 문서들에서는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편지와 공문서, 명함, 서책 등 수 만 가지 자료가 가득했다.

촬영을 위해 대문을 지나 안채로 향하는 한 켠의 창고 안에 들어서자, 문서 발견 당시의 궤짝들이 수백년의 먼지를 그대로 뒤집어쓰고 있었다. 1972년 사랑채에 불이 나 급히 자료들을 모두 밖으로 꺼냈는데 경황이 없다 보니 창고에 있는 큰 궤짝 속에 급하게 집어넣은 것이다.

일부가 불에 탄 문서들.

당시 일부 전소된 문서는 폐기돼, 지금 남아있는 문서보다는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최부잣집이 영남대학교에 서책류 일체를 기증한 이후 남아있던 집안의 사적 문서들의 발견이었다. 여러자료에서는 진정한 부자로서 나라와 이웃을 위해 자신들의 재산을 아낌없이 나눠 도덕적 의무를 충실히 했음을 증명하는 자료들이 많았다.

↑↑ 성균생원용암최공행록.

나눔과 상생의 정신을 방증하는 문건들은 취재하는 내내 벅찬 감동으로 전해졌다. 재벌들의 갑질 논란으로 시끄러운 요즘 세태의 부자들이 부끄러워해야 할 값진 정신의 보고(寶庫)들이었다. 1907년 나랏빚을 갚기 위해 봉기된 국채보상운동의 경주지역 명단이 적힌 ‘경주국채보상운동 단연회’의 스토리, 최부잣집이 독립운동자금을 댔다는 구체적인 물증들이 다수 포함돼 있는 문서들에선 선조들의 구국정신과 정신의 향기가 손에 잡힐 듯 선연했다.

↑↑ 향교연성회사규칙.

 다음호부터는 발견된 문서들 중에서 중요한 문서들을 통해 보는 스토리와 역사적 사실들, 인물들을 하나씩 기획해 연재하고자 한다. 이번호에선 발견된 문서들 중 대표적인 몇 가지에 대해 소략해 보았다(이하 각 인물의 존칭은 생략).

한편, 일체의 사진은 문화유산전문사진작가인 오세윤 작가가 촬영해주었다. 국립박물관들이나 문화재청에서 나온 보고서나 도록에 실린 무수한 사진들이 그의 손을 거쳤다. 묵묵히 촬영해준 그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린다.

↑↑ 경주 각 문중별 단연회사경비분배기.

-문서나 서책의 지질 상태는 비교적 양호, “독립운동 역사를 새로 쓰게 될지도 모를 일”

문서나 서책의 지질 상태는 비교적 양호했고 일부는 불에 그을리거나 탄 흔적이 남아 있는 자료도 있었다. 지질이 아주 좋은 것은 최근에 제작된 것으로 착각할만큼 우수했다. 독립운동관련 자료도 상당 부분 발견됐는데 독립기념관팀이 이 자료를 보고 나서는, 기존의 독립운동에서 빠진 부분을 거의 메꿀수 있을 정도라면서 놀랐다고 한다. 새롭게 독립운동 역사를 쓰게 될지도 모를 일이라며 입을 모았다고 한다. 

↑↑ 경상북도 경주 국채보상의연금 내력 중 하나.

-경주국채보상운동 ‘단연회’, 경주 지역 참여자 5086명의 명단과 성금액 꼼꼼하게 적혀있어

경주의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스토리가 한 묶음으로 그대로 보관돼 있었다. 처음에는 경주의 60여 문중이 힘을 합쳐 국채보상을 하기 위한 초기 경비를 마련한다. 경주에서는 국채보상운동을 '연성회'라는 이름으로 결성해 '담배를 끊어 국채를 갚자'라는 구호를 내걸게 된다. 경주 각지에서 답지한 크고 작은 성금을 낸 이의 이름과 금액을 모두 기록해 두었다.

↑↑ 100여 년 전 명함들.

경주 지역 참여자 5086명의 명단과 성금액이 꼼꼼하게 적혀있는 것. 특히 1907년 1월 22일의 영수증으로 보아, 1907년 2월 대구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됐다는 사실을 재고하게 한다. 이 자료들이 발견되면서 대구에서도 ‘발상지’라는 표현 대신 ‘적극적, 주도적’으로 이끌었다는 표현으로 바꿨다고 한다.
제일 앞부분에 적힌 이름은 단연회 회장을 맡았던 경주 최부잣집 최현식 선생으로 최부잣집이 국채보상운동도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대구기념사업회가 가진 자료들의 경우 영수증이나 성금책자, 광고지 등 어느 특정지역의 종이 낱장들이 대부분이니 국채보상운동의 실체를 알 수 있는 스토리는 없다. 그들 자료 중 경북 고령의 147명 명단책이 가장 많은 이들이 참여한 명단자료이지만 이 집안에서 발견된 자료에서 경주민은 5000명을 훌쩍 넘는다. 비교 불가한 대목이다.

↑↑ 정인보, 최남선 선생을 초청해 집필한 ‘동경통지’ 초고 원고 5권.

-‘동경통지’ 초고 원고가 그대로 보존, 당대 최고 석학 정인보, 최남선 초청해 집필

문파 최준은 1932년~33년 일 년간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정인보, 최남선을 초청해 1년간 최부잣집에 머물며 ‘동경통지’ 집필을 제안한다. 당시 교동에 있었던 사마소에 거주하도록 하고 집필하게 했다. 현재 동경통지 초고 원고가 5권까지 발견됐고 나머지는 영남대에 기증됐다.

↑↑ 최씨 집안의 막강한 교류인맥을 짐작할 수 있는 1910년 전후의 4000여 통의 편지글들.

-1600년경부터 해방직전까지 이 집안과 이어져오며 교류했던 편지글들 모두 보존

아무리 부잣집이어도 이토록 많은 전국유명 인사들의 편지를 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다. 1910년 전후의 4000통의 편지글들은 아직 분석하지 않은 자료로 몇 통이나 남아있다.

행초서나 초서의 문서가 다수인데, 이 문서들만 제대로 해제되고 감정되어도 한국근대사에 대한 조명이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문파 최준이 단독으로 받은 것만 해도 수천통에 이르니..., 영의정 판서, 정조때 초계문신들의 편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조선 최고의 문장가인 김매순의 편지, 실학가 서유구 편지 등도 발견됐다. 의열단 김지섭은 일본 황궁에서 폭탄을 던진 이로 그의 편지는 몇 장이나 있다.

일제 강점기 윤보선 대통령의 부친인 윤치소의 편지도 있으니 최씨 집안의 막강한 교류인맥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외에도 아직 발견하고 연구하지 못한 귀중한 편지글과 문서가 대부분이다. 또 엽서들이 빼곡히 담긴 상자도 발견됐다.

↑↑ 1922년 백산무역주식회사(당시 대표이사는 최준)가 전재산을 담보로 조선식산은행에서 35만원을 대출받는 내용의 계약서.

-전 재산 담보로 백산무역회사 살린 ‘근저당권설정계약서’도 이번에 발견, 최부잣집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 지원 증명

독립운동과 관련한 편지와 엽서, 명함 등 의열단, 항일운동가 박상진 편지, 안희제의 편지 등 다수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독립운동과 관련한 엄청난 인물스토리가 있는가 하면, 백산무역주식회사 하나만 보더라도 대단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독립운동가에 대해 제대로 조명이 덜 된 부분이 있는데 우리 지역에선 최부잣집의 문파 최준이 중심 세력이었음을 증거하는 자료가 있다.

 1919년 주식회사로 바꾼 백산무역회사는 1919년 임시정부와 긴밀하게 연계된다. 백산무역 설립도 올해 100주년을 맞았다. 백산무역은 이승만에 의해 재미동포들의 자금이 끊긴 상해임정의 가장 큰 자금 공급처가 되었다. 이번에 발견된 1922년 작성된 ‘근저당권설정계약서’는 백산무역주식회사가 조선식산은행에서 이 집안 전재산을 담보로 해서 35만원을 대출받는 내용이 기록된 계약서다.  담보제공자, 재산 목록으로 평수, 지번 등이 나와 있고 총 785필지, 65만평의 교촌집과 농지(임야 제외)가 담보물권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최근 한 매체에서는 일본 외무성에서 보관 중인 문건 중 특히 임시정부의 구성과 관련된 움직임을 일제의 밀정이 보고한 내용을 밝혀냈는데, 최부잣집이 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원했다는 사실과 그 액수까지 구체적으로 적힌 문서가 확인됐다고 한다.

최 준은 백산무역주식회사의 대표이사(동생 최 완은 임시정부 재정위원)였다. 백산무역을 통해 독립자금이 임정에 전해졌다는 이야기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 육훈 중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의 증거로 과거시험지들 발견.

-육훈(六訓) 그대로 실천해 이를 증명하는 문서들도 대거 발견

육훈 중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의 증거로 과거시험지들이 발견됐다. 최부자 9대 진사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9대 시험지(진사, 생원, 낙방했을때의 시험지)가 보관돼 있는 것. 또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는 가르침의 증거로는 ‘과객도기’라는 책에서 다녀간 손님들의 집계표가 있어 점심, 저녁을 대접한 기록이 전해진다. 육훈을 방증하는 근거가 엄연히 당대의 기록으로 보존되고 있는 것.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을 없게 하라’는 증명으로서는 ‘구휼기 기구성책’이 전해진다. ‘기구성책’에는 기구자 명단 즉, 굶주린 사람, 생활보호대상자격인 명단이 적혀 있음은 물론, 회계장부까지 남아있다. 한편, 보호받아야 할 사람의 명단을 근거로 곡식을 배급했던 ‘진급기’도 발견됐다. 나라가 할 복지 정책을 최부자 개인이 펼친 것.

↑↑ ‘1911년 월성여학교(월성초등학교 전신)설립자 최준’이 ‘경주군청 주사(오경수)’에게 보낸 개교식 안내초청장.

-최부잣집에서 지식인들 유학 보내...김범부와 최시형의 아들 최동희, 안동의 권오설 등

김동리의 형 김범부를 일본에 유학 보낸다. 범부가 안부 편지를 보낸 것이 이를 증명. 해월 최시형도 이 집에 자주 다녀갔는데 아들인 최동희는 이 집에서 최완과 함께 일본 유학을 보낸다. 최동희의 편지도 10편이 전해진다. 또 광주에서 3.1운동 주도를 한 인물로 최근 조명을 받고있는 안동 권오설의 안부 편지도 있는데 역시 이 집안에서 유학 보냈다는 것.

↑↑ 만석꾼 집안의 추수기.

-만석꾼 집안의 추수기 200년치의 기록이 묶음으로 250권 남아있어

추수기의 기록도 한 집안에서 200권이 넘게 보관된 예는 없다. 당시의 경제적인 상황, 경주 일대의 날씨와 기후 변화, 곡물 정보 등 다양한 연구 가치를 지니고 있다. 만석 재산을 소작하면서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의 학술적 가치는 가늠키 어렵다.

또 근대 ‘경주 월성초등학교가 1927년 공립으로 개교’라고 돼 있는데 문서에는 ‘1911년 월성여학교(월성초등학교 전신)설립자 최 준’이 ‘경주군청 주사(오경수 전)’에게 보낸 개교식 안내초청장이 발견됐다. 또 개교식 당일 연설문도 있다. 이는 해방되고 기록하다보니 앞선 기록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잃어버린 16년의 세월을 되찾아 월성초등학교의 설립자로 다시 조명돼야 할 과제로 남았다. 이외에도 1800년초의 200년된 가첩, 지금의 혼서와는 크게 구별되는 혼서들, 한글체로 쓴 부인들이 지은 내방가사, 행록, 행장기, 그림으로는 채색민화 등도 발견됐다.

↑↑ 부내면 ‘기구성책’.

-“우리 지역에서보다 타 지역에서 탐을 내고 있으니 안타까울뿐이지요” 위대한 기록유산, 아카이브 구축해 전시와 유물관 설립 서둘러야

경주최부자 11세 주손이자 경주최씨중앙종친회 명예회장인 최염 회장은 “발견된 자료 중 일부는 서울의 근현대박물관에서 독립운동과 관련해 전시할 요량으로 몇 점 대여해 경주보다 먼저 다른 지역에서 선을 보이고 있습니다. 독립기념관이나 대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관련문서들의 기탁요구를 간절히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역에서보다 타 지역에서 탐을 내고 있으니 안타까울뿐이지요. 우리는, 경주의 문화유산이므로 다른 지역으로의 기탁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기탁하는 순간, 경주의 문화유산이 타지역의 자산이 돼 버리니까요”라고 말하는 최 회장의 의지는 확고했다.

↑↑ 국채보상운동 광고 문안.

최근 국채보상운동이 핫이슈로 부상하자 대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전시기획을 하는데 있어 최부잣집이 가진 국채보상운동관련문서를 수차례 대여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최창호 이사는 “수많은 문서 중 일부만 번역이 된 상태입니다. 이런 기록들을 학술적으로 정리하고 연구하는 것은 학자들의 몫이지만 특히 초서로 쓰여진 문서가 많은데 이는 국가 지원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자체적으로 번역을 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번역에의 어려움이 많습니다. 해제 작업만도 상당한 비용이 발생합니다”라고 했다.

 차근차근 사비를 들여 진행하고 있으나 방대한 문서들을 작업하기엔 역부족인 상황이다.

 최 이사는 또 “위대한 건축물이나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아름다움은 전국 어디서나 많이 볼 수 있지만 지난해 창고에서 발견한 기록유산들은 진정한 최부잣집의 정신적 보물입니다. 조선후기의 역사를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아직 해제되지 않은 200~300년 전의 서류와 귀중한 문서만 해도 만 점이 넘습니다. 최부자집을 더 알려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록유물으로서 이런 소중한 자료인 경주 자산을 제대로 조명해야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우선은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해 누구라도 볼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라고 했다.

↑↑ 한글체로 쓴 부인들이 지은 내방가사.

발견된 문서들은 경주 전역의 지역사 연구는 물론, 조선 후기 당대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진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재조명되고 때론 전복될 내용이 실린 문서들도 많다. 엄청난 자료로서 이 집안만의 유산은 아니다. 이들 문서들은 역사, 경제사, 향토사, 독립운동사, 각 인물사 등 각각의 연구 영역에서 조사하고 연구할 부분을 엄연한 과제로 던져주고 있으며 경주의 전시관에서 당당히 시민과 관광객을 만나야 한다.

↑↑ 부내면 ‘기구성책’.

바로 이것이 아카이브를 구축해 전시와 유물관 설립을 서둘러야하는 이유다. 경주시민과 경주시, 나아가 경북도의 관심이 절실한 시점이다. 이 보물들의 발견은 다시 한 번 기록유산에 대한 경의를 표하게 한다.

-사진 제공 : 오세윤 작가.

선애경 문화전문 기자 / 1399호입력 : 2019년 07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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