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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특집(2)-동학 발상지가 전라도 고부라고요?

경주시민·학생들조차 동학성지 잘몰라…
근대인권 개혁의 선두주자 여성 존중, 어린이날도 제정…

박근영 기자 / 1380호입력 : 2019년 03월 07일
↑↑ 수운 최제우 대신사(우), 의암 손병희 선생.

“심지어 경주 학생들과 시민들조차 동학 발상지가 전라도 어디인 것으로 압니다”

최근 천도교와 관련한 한 경주 인사의 볼멘소리다.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동학에 관한 기술이 지극히 단편적이고 그나마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그에 따른 농민운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동학의 발상지를 헷갈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학은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지금의 경주시 현곡면 용담정에서 득도하면서 일으킨 근대종교다. 사람을 하늘 같이 받들어야 한다는 동학사상은 우리나라 근대 인권운동에서 눈부신 업적을 이뤘다. 지난호에서 기술한 대로 신분철폐, 신분의 차별 타파를 최초로 공론화 한 것이 동학이며 여성참정권과 아동 존중을 처음으로 주창한 것 역시 동학의 정신이다. 동학은 3대 교주 의암(義菴) 손병희(1861~1922)에 의해 면모를 일신한다.

손병희는 동학사상을 체계화해 대중적 종교의 형태로 발전시켰으며 동학의 이념을 구체적인 출판 사업으로 문서화시키기도 했다.

천도교는 개화기 우리나라 문명사에도 큰 발자국을 남겼다. 항일계몽의식을 함양한 잡지 개벽(1920년)을 간행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지라 할 수 있는 부인(1922년-신여성(1923년)의 전신)을 발간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잡지인 어린이(1923년)를 손병희의 처남인 소파 방정환이 주도해 창간했다. 어린이라는 말을 최초로 쓴 것도 바로 천도교에서 비롯됐고, 어린이 날 제정 역시 천도교의 노력에서 비롯됐다.

-보성전문 인수, 김성수에 인계, 민족대표 33인 중 15인이 천도교 인사
손병희는 나라의 장래는 교육에 달렸다는 생각을 품고 일찍부터 교육 사업에 눈뜬다.  구한말 재무대신 이용익이 설립한 보성전문을 인수한 것이 바로 그 시초. 보성전문은 3·1운동 주도 직전 더 이상 운영할 수 없음을 깨닫고 인촌 김성수(1891~1955)에게 인계된다.

참고로 손병희는 마지막 경주최부자 문파 최준(1884~1970) 선생에게 보성전문 인수를 먼저 권유했으나 최준 역시 백산무역(주)을 통해 독립운동을 계획하던 중이라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함께 김성수를 설득한다. 이 과정에서 손병희는 자주 경주최부잣집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엇보다 천도교의 영향력이 컸던 것이 3·1운동이다. 흔히 3·1운동을 말할 때 ‘손병희 외 민족대표 33인’이라고 한 것에서 보듯 손병희는 3·1운동을 이끈 가장 중요한 인물이고 구심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민족 대표 33인 중 절반에 가까운 15인이 천도교 인사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3·1 독립선언문을 인쇄한 곳도 천도교가 인수해서 운영하던 보성고 내 인쇄소인 보성사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3·1독립 운동에서 천도교의 역할은 대부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천도교가 독립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던 근거에는 전국적으로 짜임새 있게 구성된 조직력과 당시 추산 300만명에 가까운 엄청난 신도수 때문이었다. 그들이 조직적으로 성미운동을 벌여 재정을 지원했다. ‘성미’란 부엌에 성미 주머니를 걸어놓고 밥을 지을 때마다 식량을 식구마다 한 숟가락씩 덜어내 담는 것을 뜻한다. 이를 모아 한 달에 한 번씩 헌납하는 것이다.

이런 방대하고 열성적인 조직은 자연스럽게 자금력으로 이어져 현재 종로구 경운동에 위치한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설립할 당시 현재의 건물보다 최소한 3배 이상 크게 지을 자금을 모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천도교의 지나친 부각을 경계한 일본이 건축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에 일본인 설계사 나카무라를 초빙하는 등 궁여지책 끝에 현재의 천도교 중앙교당을 건축할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이런 방해에도 불구하고 1921년 2월 준공 당시로서는 지금의 명동성당(1892년 완공)과 쌍벽을 이루는 서양건물이었고 1926년 건립된 조선총독부 건물과 함께 3대 서양건축물로 손꼽히던 건물이었다.

-3·1운동 최대 주도세력, 운동 후 급격한 쇠락의 길 걸어
이 같은 천도교의 위상은 그러나 3·1운동을 기점으로 급격히 쇠퇴한다. 손병희 자신도 3·1운동의 주모자로 일경에 체포돼 옥고 끝에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됐고, 3년 형기 도중 극심한 병증으로 출감했다가 곧 이은 1922년 숨을 거뒀다. 천도교 교단은 손병희의 죽음과 핵심인물들의 구속으로 구심점을 잃었고 교단은 전국적인 운동을 도모하면서 지은 부채로 인해 재정적 타판에 이르렀다.

최근 3·1운동에 대해 역사담론가(?) 설민석 씨가 민족대표들이 3·1운동 당일 기생파티를 벌였다고 망언해 물의를 일으켰는데, 실상 민족대표들은 일경의 눈을 속이기 위해 기생이 있는 요리집인 ‘태화관’에 모였으나 태화관은 3·1운동 발원지인 탑골공원과 직선거리로 100m 이내에 있었고 만세소리에 맞춰 한용운 선생(1879~1844)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태화관 주인에게 일러 일경에 알리라고 전했다. 뒤늦게 들이닥친 일경들은 민족대표 29명 중 선언식에 참석하지 않은 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 등 4명을 제외한 민족대표 29인 전원을 체포했다.

이어 길선주, 유여대, 정춘수 등 3인은 자수했고 김병조는 타국으로 망명했다. 또 독립선언서를 집필한 최남선 선생(1890~1957)과 박인우, 송진우, 현상윤 등 독립운동을 방조한 16인도 체포, 모두 48인이 내란죄로 잡혔다.

이후 천도교는 내분과 외환을 겪으며 사분오열됐고 일제감정이 극에 달하면서 천도교 내에 친일세력이 횡행하는 등 고난을 겪으면서 급격히 교세를 상실했다.

해방 후에는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상대적으로 활황세였던 북한의 교세를 잃었다. 현재 천도교는 약 10만명 정도를 신도로 교단을 구성하고 있다.

이렇듯 천도교가 우리나라 근대사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고 3·1운동과 관련해서는 그 어떤 종교단체보다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이 같은 천도교의 숨은 역사는 종교적 관점을 떠나 반드시 재조명돼야 하며, 특히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2019년은 각별한 차원에서 천도교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그 중에서도 경주는 수운 최제우 선생의 고향이자 득도의 성지이고 해월 최시형 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천도교에 대한 다양한 학술·문화적 접근과 행사를 시도해 볼 만하다.
박근영 기자 / 1380호입력 : 2019년 03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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