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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특집(1)-조병갑·전봉준·최시형의 기막힌 운명

동학운동 전개에 얽힌 역사의 아이러니…
박근영 기자 / 1379호입력 : 2019년 02월 28일
↑↑ 동학농민운동을 이끈 녹두장군 전봉준(좌),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우).

고부군수 조병갑(1844~1911). 근대농민운동인 동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동학혁명의 불씨를 제공한 대표적인 악덕 지방관원이다. 이 인물을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는 단 몇 마디로 요약한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으로 민란이 확산됐다는 것이다. 이후 조병갑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이 조병갑과 녹두장군 전봉준,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이 기묘하게 연결돼 있음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조병갑의 대표적 횡포는 △농민들을 강제 동원해 만석보를 쌓고 수세를 징수한 것 △자신의 어머니 상 때 부조금을 거둬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봉준(1854~1895)의 아버지 전창혁을 곤장으로 때려죽인 것. 이외에도 온갖 죄명을 만들어 백성들을 가둔 후 보석금을 내게 하고 대동미를 이용해 횡령·착복하는 일 등으로 전봉준 등 농민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고부 지역에서 시작된 동학 농민운동은 주변지역으로 삽시간에 확대됐다. 조병갑은 전주로 도망가 전라도 관찰사 김문현에게 고변을 보고하지만 정황을 파악한 김문현의 장계로 의금부에 압송됐다. 고종은 조병갑을 강진군 소재 고금도로 유배 보냈다. 그러나 불과 일 년 만에 석방시켜 중앙으로 불러들인 후 고등 재판관으로 임명한다. 지방한직인 고부군수에서 일약 구한말 핵심권력인 판사로 영전한 것이다.

-전봉준의 아버지를 죽인 고부군수 조병갑
전봉준은 몰락한 양반으로 동학 접주(接主)와 지관, 장사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당시는 탐관오리들이 들끓고 외세의 침탈과 왕가의 권력쟁탈로 조정이 어수선하던 때. 이 틈을 비집고 1890년대 흥선대원군의 식객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1892년 무렵에 교주 최시형(崔時亨)에 의해 고부지방의 접주(接主)로 임명됐다. 바로 이 무렵인 1892년 4월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의 학정사건이 시작된 것이다.

고부 등에서 1만여명을 이끌던 전봉준은 민란 수준의 사건을 반봉건·반부패·반침략의 정치적 운동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마침 그에 앞선 1893년 2월경 1만여명이 동학교도가 경복궁 앞으로 가 폐정 개혁과 부패 관리 처벌 등을 내세워 상소했다. 전봉준은 이들의 상소가 성공하면 협력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한성부에 올라간 시위대가 해산되면서 보은집회도 해산됐다. 1만여명 이상 많은 인파가 몰린 대규모 시위는 한성부의 백성과 조정의 관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흥선대원군 역시 이 사건을 주목하고 전봉준과 정치적으로 결탁한다.

1893년 동학교도들이 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상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고부에서는 조병갑이 전봉준과 그의 일가를 잡아가두고, 전봉준의 부친에게 곤장을 때려 결국 그 장독으로 죽게 만든다. 이에 그렇지 않아도 전봉준이 봉기한 것이다.

1894년 3월 21일 자신을 총대장, 김개남(金開男)·손화중(孫和中)·차치구(車致九)를 장령(將領)으로 삼아 거병을 선언한 전봉준은 수백 명의 동학교도를 이끌고 만석보를 헐어버리고 고부 관아를 공격, 관아의 무기를 탈취하고 가난한 농민들에게 전곡을 나눠주고 악정을 일삼던 아전 등을 처단 또는 가뒀다.

이에 고부 주변의 정읍, 태인, 김제, 부안 등의 농민들이 합세해 군세를 떨쳤다. 농민군이 부근 고을로 진격해 관군(官軍)을 무찌르자 중앙에서 파견한 초토사 홍계훈(洪啓薰)을 황토현(黃土峴)에서 크게 이긴다. 이어 부안·정읍·고창·무장(茂長) 등을 장악하고 음력 4월 28일에는 전주(全州)를 점령한다.
조병갑은 난이 일어나자마자 달아났고 조정은 조병갑을 파직, 유배 보내고 후임 군수로 박원명을 임명했다. 이 무렵 전봉준이 홍계훈과 밀서를 주고받으며 흥선대원군의 정계 복귀를 기도했다는 설이 있다.

이 동학1차 봉기는 그러나 뼈아픈 결과를 초래한다. 동학란을 진압하기 위해 조정의 요청으로 청군이 오고 동시에 톈진조약을 핑계로 일본군도 입국한다. 외세에 의해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동학군은 12개 항목을 들어 개혁할 것을 요구하고 화약을 체결한다. 이것이 전주화약이다. 이때 내세운 항목 중 대표적인 것이 노비 문서를 소각할 것, 천민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패랭이를 없앨 것 등 신분타파를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해산 후 조정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조선에 진군한 청군과 일본군은 조선에서의 권력투쟁을 일삼던 끝에 1894년 7월 25일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전봉준의 폭력성을 경계한 최시형, 그러나 조병갑은…
최시형(1827~1898)은 일찍 고아가 되어 종이 만드는 공방에서 일하다 최제우를 만나 수제자가 됐고, 1863년 제2대 교주가 됐다. 1864년 최제우가 처형되자 태백산, 소백산에 은신했다가 안동, 울진, 영월, 인제 등지에서 포교에 힘썼다. 이런 도피 생활 중 인제에서 《동경대전》을, 단양에서 《용담유사》를 발간하는 등 경전을 완성했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정국이 소란해 동학에 대한 탄압이 완화되자, 조직 강화에 힘써 종교로서의 체제를 갖췄다.

1892년 충청도 관찰사에게 교조신원과 포교의 자유, 탐관오리의 숙청 등을 요구하는 글을 보냈으나 묵살 당했다. 1893년 초 전봉준이 동학 이름으로 흥선대원군의 정계복귀를 돕는 것을 최시형은 경계했다. 그러나 전봉준은 동학에 대해 긍정적인 흥선대원군을 신뢰하고 계속 관계를 이어갔다.

1893년 2월 동학교도들은 제2차 신원운동을 전개해 고종으로부터 복원을 약속받고 해산했다. 그러나 또 다시 약속이 시행되지 않자 최시형은 제3차 신원운동을 계획하고 보은에 전국 동학교도들의 집결을 하달하고 대대적인 시위를 준비했다. 이 소식에 당황한 조정이 선무사 어윤중을 파견해 선처를 약속했고, 우선 경상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 영장(營將) 윤영기(尹泳璣) 등 탐관을 파작했다. 이에 최시형은 동학교도들은 자진 해산시켰고 앞서 기술한 전봉준의 봉기 역시 무산됐다.

1894년 고부 접주 전봉준이 농민과 동학도를 지휘해 동학 농민운동을 일으키자, 일체의 폭력을 반대한 최시형은 초기에는 이 난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난이 커지자 교주로서 이에 호응해 북접(北接) 산하 동학도들을 이끌고 가담했다가 관군과의 충돌을 피해 즉시 해산시켰다. 정부가 화약 당시의 요구 조건을 이행하지 않은 이유로 전봉준이 다시 거병하자 그도 북접 10만 명의 병력을 모아 남접군(南接軍)과 논산에서 합세했다.

그러나 남접과 북접이 합친 동학군은 월등한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관군과 연합한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에 눌려 공주전에서 참패했다. 이어 논산, 장수 등지에서 연패한 동학군은 마침내 전열이 무너졌고 운동은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다. 전봉준은 입암산성, 내장산 등으로 도망 다니다 수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돼 교수형에 처해졌다. 최시형은 영동·청주 등으로 피신했다가 원주에서 송경인의 밀고로 역시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 교수형 되었다.

바로 이 최시형의 최후에 동학혁명의 단초를 제공한 고부군수 조병갑이 등장하는 것이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다. 최시형을 재판하고 직접 사형을 언도한 판사가 바로 조병갑이기 때문이다. 조병갑이 판사로 부임한 지 불과 한 달만의 일이다.

조병갑은 최시형 재판 이후에 승승장구하며 영화를 누렸다. 그의 아들 조강희는 일제강점기 통감부 기관지였던 경성일보(京城日報)와 매일신보(每日申報)에 근무했고 친일신문 동광신문(東光新聞)에서는 주필 겸 편집국장을 지내며 역시 영화를 누렸다. 조강희의 딸 조기숙은 노무현 정부에서 홍보수석을 지냈다. 논란이 되자 동학 농민운동 후손들에게 사과했지만 논란을 잠재우기 위한 면피용 사과였다며 빈축을 샀다.

이후 동학은 최시형의 처남인 의암 손병희(1861~1922) 선생에 의해 천도교로 개명됐고 천도교는 3·1독립운동을 주도함으로써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큰 역할을 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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