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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고무신과 이채형의 만남


경주신문 기자 / gjnews21@hanmail.net1387호입력 : 2019년 04월 25일
어느 해 가을, 신라문화제 때 고무신 선생을 초대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미당 서정주 선생도 함께 초대되어 왔었다. 당시 고무신은 서울서 거주하고 있었고, 박주일 선생은 경주문협 지부장으로 있을 때이니, 꽤 오래 전의 일이다. 그 때 미당 서정주 선생도 초대되어 시화전을 열고 동시에 백일장, 문학의 밤을 신라 문화제 축제의 행사로 실시했다.

그 때 고무신 선생은 문학 강연회에서 즉흥 연재로 ‘청마와 미당’이란 주제로 강연을 했다.  내용인즉, 청마는 경주의 시인으로서 신라인답게 생활한 분이요 미당은 백제인으로 서울에 살면서 그것도 신라와 전연 관계없는 사람이 <신라초(新羅抄)>등, 시집으로 ‘신라를 우려먹는 사람’이라는 말까지 했다.

그는 그의 취중연설을 통하여 청마와 미당을 비교함으로 장내를 시끄럽게 한 것은 너무도 유명하다. 그는 연설을 마치고 웅성거리는 강연장을 빠져나와 혼자 대포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나중 문학행사가 끝나고 전체 회원과 초청 인사들이 모이게 되는 ‘옥이식당’에 고무신이 나중에 나타나서 술상에 막걸리 잔을 던짐으로써 그 날의 행사는 막걸리 세례로 막을 내렸다.

이튿날 고무신 선생이 나타난 것은 문협 시화전이 열리는 ‘티파니’ 다방이었다. 몇 명 회원들이 <티파니>에 나가 시화 작품을 지키고 있을 때, 강동 단구에 있는 젊은 작가 이채형이 명주 바지저고리에 두루마기까지 걸치고 유쾌한 표정으로 경주에 나타났다. 그는 그때 서라벌 예대 문예창작과에 재학하고 있었다. 귀향하여 고향인 강동에서 작품을 쓰고 있다가 문협 행사에 모처럼 성장(盛裝)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날 오후 우연히 <티파니>에 앉으니 김기문, 이채형, 고무신, 필자, 시청 문화과 직원 몇 사람이 시화를 감상하고 있었다. 고무신 선생은 어제 마신 술 때문에 오늘 아침 해장을 했고, 그 해장술이 오후가 넘도록 깨지 않는 듯 얼굴이 구릿빛이요 입과 코에서는 연신 술 냄새가 계속 풍겨 나왔다. 이채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무신이 앉아있는 앞까지 가서 공손하게 인사를 올린다. 이것이 후배가 선배에게 올리는 예의 바른 인사였다. 그런데 고무신 선생은 다리를 꼬고 앉아 다방 천정만을 쳐다보며 관심 없다는 듯 “흥”하고 외면하는 것이 아닌가. 이채형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는 모양이었다. 고무신은 그 옆에 비어 있는 자리로 가서 앉는다. 고무신은 이채형과 이야기하는 것이 귀찮은 표정이었으나 이채형은 어떡하더라도 고무신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박 선생님, 하고 이채형이 고무신 선생을 불렀다. 고무신은 이채형의 부르는 소리에 “왜 불러”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는 다시 다리를 고쳐 꼬며 천정만을 쳐다본다. 이채형이 다시, “선생님, 저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막걸리 한잔 사겠습니다”하고 정중히 말했다. 그러나 고무신은 대답도 없이 한 번 훑어보고는 또 말이 없다. 그래서 이채형은 다시 “선생님, 저 촌에서 살고 있는데요. 선생님 모시고 대포 한잔을 올리고 싶습니다. 실례가 안 되면 선생님을 모시겠습니다”하고 최대로 정중한 말투였다. 지극한 공손은 오히려 상대를 기분 나쁘게 했는지 그것이 고무신한테는 불만인 모양이다. 이윽고 고무신이 입을 열었다. “젊은 그대가 원하신다면 먹어 줄 용의는 있지” 했다. 주위에 있는 우리는 속으로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정민호(시인·동리목월문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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