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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 문화관광해설사가 들려주는 숨은 경주

오릉(2)


경주신문 기자 / gjnews21@hanmail.net1461호입력 : 2020년 10월 28일
↑↑ 김경애 시인,
경북문화관광해설사
새털구름 이고 가는 하늘높이로 청명한 한나절이다.
갓 찧어 구수한 찐쌀을 한 볼떼기 물고 다정한 이들과 동행하는 유적지다.
들여다볼수록 아름다운 가을이 빼곡히 차있다.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담암사(曇巖寺) 절터 위치를 두리번거리는 일행이다.
단층 친 오릉 큰 대문을 디디면 모과나무 배롱나무 호젓이 반긴다.
마당안길을 훑어 들어가면 능선을 감싼 솔숲에 다다른다.
능을 보고 절하는 소나무 풍경들이 그 옛날 신하들 행렬로 그득하다.


동도(東都)의 그 성곽들 촌가(村家)로 변하였는데,
구슬피리(玉笛) 한가롭게 부니 봄의 생각 걷잡기 어렵구나.
오릉이 연이은 곳에는 거친 풀이 돋아 있으니,
1천년의 오랜 일도 모두 아침햇빛 같도다.
-박원형(朴元亨)의 시-


【삼국사기】2대 남해차차웅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혁거세의 적자이다. 체격이 장대하고 성품이 침착하였으며 지략이 많았다. 어머니는 알영부인이며 왕비는 운제부인이다. 3년 정월 시조 묘를 세웠다. 5년 정월, 탈해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장녀와 혼인을 맺었다. 21년 9월 왕이 별세하였다. 사릉원에 장사지냈다.

3대 유리이사금이 즉위하니 남해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운제부인이며, 왕비는 일지 갈문왕의 딸이다. 유리가 왕위에 올라야 하는데, 덕망이 높은 탈해에게 사양하였다. 탈해는 “임금 자리는 보통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齒)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시험 삼아 떡을 깨물어 보았다. 유리의 잇금이 많으므로 왕위에 오르게 하고 왕호를 이사금(임금)이라 불렀다. 남해가 죽음을 앞두고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에게 “내가 죽은 뒤에는 너희들 ‘박’ ‘석’ 두 성을 가진 사람 중에 나이 많은 자가 왕위를 이어라”고했다. 그 후에 ‘김’씨도 흥하였음으로 삼성(三性: 박·석·김)들 중에 이빨이 많음에 따라 왕위를 잇도록 했다. 이러한 까닭에 왕을 이사금이라 불렀다. 2년 정월에 시조 묘에 제사 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복지정책행정을 실감할 수 있는 삼국사기 기록대목이 보인다.
관리에게 명하여 현지에서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을 위문하게 하고, 늙고 병들어 혼자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이를 부양하게 하였다. 소문을 듣고 이웃나라 백성들이 모여 들었다. 이 해에 백성들의 생활이 즐겁고 편안하여 처음으로 ‘도솔가(兜率家)’를 지었다. 이것이 가락(歌樂)의 시작이다.
도솔은 도리, 두래, 두류, 두리, 두솔 등의 순수한 우리말이다. 유리왕 때 지어진 도솔가는 불교와는 무관하다. 풍속이 즐거운 국가적 악(樂)의 노래 시초이다. 공동체의 노동요인 두릿노래, 나라를 다스리는 다살노래로 불려진다.

육부(六部)를 정한 후 두 편으로 나누어 왕녀를 각각 거느리고 편을 짜고 패를 나눠,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새벽 부(部)의 뜰에 모여 길쌈을 시작하여 밤 열시 경에 끝냈다. 8월 15일 그동안 짠, 길쌈을 심사하여, 적게 짠 편이 술과 음식을 차려 대접하였다. 이 때 노래와 춤과 여러 가지 유희가 일어나니, 가배(嘉俳)라 한다. 행사 시 진편에서 한 여자가 일어나 춤추며 탄식하듯 ‘회소회소’ 그 소리가 구슬프고 아름다웠다. 뒷날 사람들이 이 곡에 노래를 붙이고 회소곡이라 하였다. 회악(會樂)이라 불리는 가사는 전하지 않고 그 유래만 전한다.

34년 9월에 왕이 신하에게 말했다. “탈해는 신분이 국척이요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고, 공을 여러 번 세웠다. 나의 두 아들은 재능이 그를 따르지 못하니, 내가 죽은 뒤에는 탈해를 왕위에 오르게 하라 나의 유언을 잊지 말라.” 겨울에 왕이 별세하였다. 사릉원에 장사지냈다.

5대 파사이사금이 왕 위에 올랐다. 유리왕의 둘째아들이다. 왕비는 김씨 사성부인으로 갈문왕 하루의 딸이다.

창고를 풀어 백성을 구제하고 옥에 갇힌 죄수를 조사하여 두 가지의 사형 죄에 해당하는 자가 아니면 모두 석방토록 하였다.

홍수와 가뭄 변방에 생길 침략에 대비하여 농사와 양잠을 장려했다. 가소성과 마두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켰다. 22년 봄 2월, 성을 쌓고 이를 월성이라 이름 지었다. 가을 7월, 왕이 월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29년. 비지국(창녕), 다벌국(대구), 초팔국(합천, 초계면 일대) 정벌하여 합병하였다. 33년 겨울 10월에 왕이 별세하여 사릉원에 장사지냈다.

『신라왕릉 연구』이근직(李根直) 저서에 오릉 내에서는 구체적으로 특정 고분을 지칭하여 누구의 능이라고 명시하지는 않는다. 오릉의 전체적인 외형은 원형봉토분이나 봉분자락 일부에서는 호석으로 추정된 혼석(魂石)이 노출되어 있다. 오릉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삼국유사』 기이편의 신라시조 혁거세왕과 미추왕 죽엽군조에 의거하면, 통일신라 중대 이후부터 사릉(蛇陵)이라는 능호(陵號)와 함께 혁거세왕과 알영부인 그리고 나머지 3왕의 능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현재 오릉의 영역에는 알영부인이 탄생하였다는 우물로 전해지고 있는 알영정(閼英井), 조선 세종 11년(1429)에 세워진 제실인 숭덕전(崇德殿), 그리고 조선영조 31년(1755)에 세운 시조 왕릉비(始祖王陵碑) 등이 전해온다. 그리고 능원의 서남편 송림에는 숭덕전 남쪽일원의 담엄사지(曇嚴寺址)에서 출토된 초석과 석재들을 옮겨 놓았다.

오릉의 소나무는 능을 향해 절을 하듯 예의와 겸손으로 푸른 절개 멋스럽다.

휘어져 뻗은 솔가지, 길이 되는 나이테를 세월이 감고 가는 풍경이다.
바람이 건드릴 때 마다 스치는 솔향에 마음을 맡기면,
솔방울 밟고 가는 능 둘레길 정적에 멈추는 심신이 느슨하다.
능선 봉오리마다 안겨드는 선(線)들이 솔잎에 빽빽하게 묻어나는 오릉이다.
경주신문 기자 / gjnews21@hanmail.net1461호입력 : 2020년 10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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