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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 문화관광해설사가 들려주는 숨은 경주

향교(2)


경주신문 기자 / gjnews21@hanmail.net1432호입력 : 2020년 03월 26일
↑↑ 김경애 시인
경북문화관광해설사
명륜당(明倫堂) 반듯한 담장 안으로 길 밝히는 햇살이 온화하다.
그 옛날 글을 읽고 쓰던 소리 희망으로 곧추세웠을 고풍스런 강학당(講學堂). 대청마루 걸터앉아 바라보는 하늘엔 흘러드는 구름도 꿈으로 부풀려있다.

신라는 화랑 오계(五戒)를 수신의 도리로 삼았으며 신문왕 682년 국학을 세웠다. 오늘날의 국립대학에 해당되는 교육기관 설립은 유교경전을 가르침으로, 신(神) 중심의 사고에서 인간 중심의 사고로 의식을 전환시켜, 나라와 백성의 얼을 다스리는 공자(B.C 551~479)가 창시한 사상이다. 『논어(論語)』를 통하여 예(禮), 의(義), 인(仁)의 덕목으로 인간 도(道)를 깨우치는 인도주의 사상인 것이다.

『경주시사慶州市史』편 ‘신라 국학 설립의 가장 큰 역할은 김춘추였다. 진덕여왕 2년(648)에 아들 문왕(文王)과 함께 당(唐)에 갔을 때 태종에게 간청하여 당의 국학을 견학한바 있다’

‘국학의 교육과정은 전공과목, 공통필수과목, 수의과목(隨意科目)으로 되어 있고, 전공과목은 삼분과별(三分科別)로 나뉘어져 첫째: 예기, 주역, 둘째: 좌전 모시과, 셋째: 상서(尙書) 문선과(文選科) 등의 3과이며, 수의과목은 산학(算學)이었다. 공통 필수과목은 도의교과(道義敎科)인 논어와 효경인데, 신라국정의 지표인 덕업일신(德業日新)의 정신이 여기에 반영되어 있는 것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29대 태종무열왕(654~661)이 된 김춘추는 국학에 대한 관심을 귀국 후 국정에 반영시키며 통일의 기반을 다졌을 터이다. 마침내 30대 문무왕(661~681)이 통일을 이룩한 시기라, 31대 신문왕은 부왕(父王)이 이룬 전쟁 없는 통일 이후 감축된 국방비를 교육비 예산에 편승 집행하여, 신라 최초의 국학을 설립해 인재양성으로 국력을 도모했을 것이라 사료된다.

유서 깊은 그 자리에 조선이 건국된 지 이백여년 동안 유교사상의 교화로 강학(講學)·제향(祭享)공간을 겸비한 향교가 지방 인재교육의 터전으로 세워졌다.

관학으로 한양에 성균관과 4부 학당을 설치하고 사학으로 서원과 서당이 있었다.

조선시대 향교는 초등교육기관으로 교육은 명륜당에서 행했고 교생은 50명이다.

입학생은 양인(良人) 신분으로 8세 이상의 남자어린이며 농한기엔 기숙사에 생활하면서 『소학』,『사서오경』 등 유학경전을 배우고 농번기엔 농사를 돌보았다.

매년 6월 시험을 치고 우등생에겐 생원진사시의 초시를 면제하고 복시에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을 주었다. 지방교육의 중추역할로 훌륭한 인재양성과 지역사회의 구심점을 이루며, 학문의 맥을 이은 천년의 배움터로 예술문화의 꽃을 피웠던 것이다.

교과 내용은 경서(經書)와 시문(詩文)이 주요 과목이었다.

유교사회의 도덕규범이 되는 문장들을 엮은 소학을 1차 교재로 중시하면서 경사위주로 하는 실학교육(實學敎育)을 실시하였다.

주요 과목은『소학』,『효경』,『삼강행실(三綱行實)』등의 초급교재를 비롯해 사서오경(四書五經),『성리대전』,『심경』,『근사록』등의 주자서(朱子書)와『통감』,『문선(文選)』,『고문진보』 등의 문학서가 사용되었다.

유가의 핵심적 덕목이며 행동실천의 윤리 규범이기도 한 사서(四書)에 있는 내용을 간추린 <백록동규> 가르침을 강당에 걸어두고 수칙으로 삼았다.

⦿넓게 배우고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고 명확하게 판단하여 착실하게 행동해야 한다
⦿말은 충실하고 미덥게 하며, 행동은 돈독하고 공경하며, 분노를 징계하며 욕심을 막아 선으로 옮기고 허물을 고쳐야 한다.
⦿자신의 의(義)를 바르게 하고 그 이익을 도모하지 아니하며, 자신의 도리를 밝히되 그 공으로 꾀하지 않는다.
⦿자기가 하기 싫어하는 바를 남에게 넘기지 말고, 행동이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으면 도리어 그 잘못을 자신에게 찾는다.

인간 진실을 추구하는 성리학을 발전시켜 민족문화의 정신을 고취시킬 스승은, 그 지방에서 사표(師表)가 되는 인물을 선발하여 학장 직책으로 교생을 가르쳤다.

조선 전기 문과급제자로서 경주향교 교관으로 파견된 사람은 손꼽을 정도다.

불권헌(不倦軒) 황정(黃玎)이 1474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한 뒤,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10년간 경주향교 교관으로 재임하였다.

회재(晦齋) 이언적도 1513년 23세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 별시에 급제하였다. 권지교서관부정자(權知校書館副正字)에 임명되어 1515년 경주향교 교관으로 부임되어 「원조오잠(元朝吳箴)」,「서망재망기당무극태극설후(書忘齋忘機堂無極太極說後)」를 지었다.

유의건, 이기여, 이운봉 등이 소임을 맡아 소학과 정주(程朱) 등 성리학을 강했던 것으로 여러 문집에서 기록하고 있다.

2000년 6월에 대성전을 중수하다가 대들보를 내렸는데, 상량문의 연도는 만력 30년(1602)으로 적고 있다.
경주신문 기자 / gjnews21@hanmail.net1432호입력 : 2020년 03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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