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최종편집:2021-04-16 오후 07:42:53 회원가입기사쓰기전체기사보기
뉴스 > 문화관광해설사가 들려주는 숨은 경주

포석정, 숨겨진 이야기


경주신문 기자 / gjnews21@hanmail.net1350호입력 : 2018년 07월 16일
↑↑ 윤영희
경북문화관광해설사
경주에는 유적도 많지만 그 중에서는 꼭 보고 가야할 곳도 있다. 특히 「남산을 보지 않고 경주를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신라, 경주를 둘러보는 가장 중요한 곳으로 꼽히는 곳 중의 하나가 바로 남산이다. 신라, 그 시작은 경주 남산, 나정에서 박혁거세의 등장으로 잉태되고 55대 경애왕이 견훤의 침략으로 포석정에서 생을 마감하면서 신라는 사실상 문을 닫는다. 당시는 고려 태조 10년(왕건, 927), 후백제의 견훤이 문경(근품성)을 공격하고 이어서 대구, 팔공산 근처에서 크게 패하여 왕건은 목숨이 위태로웠다. 그러나 신숭겸등 신하들이 목숨을 바쳐 왕건을 구하였다.

왕건을 놓친 견훤이 영천(고울부)를 습격하며 경주근교까지 다가오자 경애왕은 왕건에게 사신을 보내 그 급박함을 알렸다. 이에 전열을 가다듬은태조는 군사 1만 명을 보냈으나 견훤의 군사가 먼저 이르렀다. 음력 11월 한겨울, 그렇게 망국의 한을 품고 숨진, 경애왕의 가슴 아픈 역사를 품은 포석정에는 유상곡수연을 즐겼던 전복모양의 유구만 외로이 남아있다. 여기서 사람들은 신라는 왕실의 방탕함으로만 기억한다. 그 아픈 역사의 이면에는 왜곡된 이야기들이 숨어있다. 이제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첫째, 포석정에는 제단과 신궁이 있었다.

남산은 신라인들이 성스럽게 여기던 산이었다. 법흥왕(514~540),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되기 전에는 나라를 지켜주는 신들이 계시다고 여겨 제단을 마련하여 남산의 신들에게 제사를 올렸다. 신궁은 조선시대의 종묘와 같은 왕실사당으로 기일이 되면 제사를 모셨다. 그리고 나라에 큰 일이 생기면 조상께 고하고 남산의 신들께 도움을 청하곤 했다. 근데 제사는 몸으로, 말로만 지낼까? 술, 노래, 춤 등을 바치며 나라를 지켜달라는 간절한 마음도 담았다. 제례가 끝나면 음복하는 공간도 있기 마련이다. 즉, 음주가무는 제사의 구체적인 내용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흥이 많은 사람들이다. 옛 문헌을 보면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시대까지는 제사가 바로 축제였다. 왕실에서 주관하는 축제는 백성들도 좋은 옷을 골라 입고 같이 참여하여 하루 밤낮동안 계속된다. 신라시대에는 그 현장이 바로 포석정, 제례가 끝나면 연이어 축제로 바뀌면서 모든 사람들이 같이 어울리며 민심도 살핀 것 같다.

둘째, 가까이 별궁이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성남이궁(城南離宮)이란 말이 있는데 그 뜻은 월성의 남쪽에는 별궁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사를 치루려면 준비해야 할 것도 많다. 포석정인근은 남산의 많은 계곡중에서도 넓고 맑은 물이 흐르는 등 경관이 수려한 곳으로 꼽힌다.

셋째, 〈포석사〉라는 사당을 두었다.

나라에 공이 많고 존경받던 풍월주(화랑들의 우두머리)들의 위패를 모셨다. 조선시대, 한양에는 종묘를 지어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그 앞에는 공신당(功臣堂)을 두어 왕을 잘 보필한 신하들도 같이 모신 것처럼 신라시대에는 신궁과 함께 포석사를 두었다. 《화랑세기》에는 김춘추(29대 태종무열왕)이 김유신장군의 여동생인 문희와 포석사에서 혼례를 올렸다는 기록도 나온다.

마지막으로, 이곳은 《수도경비사령부》같은 군사본부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수도경비는 국가의 흥망과 직결되는 아주 중요한 업무다. 포석정 담 옆길을 따라 올라가면 금오정을 지나 팔각정, 삼화령을 지나 동남산으로 이어지는 남산순환로가 있다. 금오정에서 시내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왼쪽에 〈게눈바위〉가 있는데 이는 궁궐뿐 아니라 도성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아주 전망 좋은 곳이다. 그 곳에서 군사들은 낮밤을 가리지 않고 궁궐과 도성의 경비에 만전을 기했을 것이다. 근처엔 산성도 4개가 있다, 북쪽의 토성을 비롯해 26대 진평왕은 돌로 성을 쌓았고 문무왕은 남산성을 증축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들 산성의 중심이 바로 ‘게눈 바위’다. 국가방위는 한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차대한 일이다. 왕과 대신들이 수시로 행차하여 점검하고 장졸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음식도 나누며 등도 토닥여 주었음에 틀림없다. 이처럼 포석정은 다양한 이야기를 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애왕의 방탕함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당시는 이미 신라가 무너질 대로 무너져 회생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허울뿐인 경애왕은 홀로 이 곳을 찾아 신들에게 하소연하고 역대의 왕들에게 힘없이 손을 내밀 수밖에...

한 마디로 포석정은 단순히 신과 왕들께 제사만 지낸 것이 아니라 왕실대소사를 사당에 고하고 왕족들이 혼례를 올리며 잔치도 하고 군사본부도 있었던 곳이다.
경주신문 기자 / gjnews21@hanmail.net1350호입력 : 2018년 07월 16일
- Copyrights ⓒ경주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스토리네이버블로그
네티즌의견 0개가 있습니다.
 
!!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개인정보를 유출하는등 법률 및 신문사 약관에 위반되는 글을 삼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게시물에 대한 민형사상의 법적인 책임은 게시자에게 있으며 운영자에 의해 삭제되거나 관련 법률에 따라 처벌 받을 수 있습니다.
 
INTERVIEW
경주오디세이
경주라이프
포토뉴스
경주인살롱
사회
칼럼
가장 많이 본 뉴스
방문자수
어제 방문자 수 : 39,946
오늘 방문자 수 : 41,364
총 방문자 수 : 4,558,609,355
상호: 경주신문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계림로 69 / 발행인·편집인 : 손동우 / 발행인 : 정학구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손동우
mail: gjnews21@hanmail.net / Tel: 054-746-0040 / Fax : 054-746-0044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북, 다-01024
Copyright ⓒ 경주신문 All Rights Reserved. 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요강을 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