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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 문화관광해설사가 들려주는 숨은 경주

진평왕릉(下)


경주신문 기자 / gjnews21@hanmail.net1346호입력 : 2018년 06월 21일
진평왕은 그 이름조차 석가모니의 아버지 이름과 같은 백정이었다. 왕비도 석가모니의 어머니와 같은 마야부인이라 했으니 그들은 당연히 석가모니와 같은 아들이 태어나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진흥왕 때부터 석가모니와 가까운 일족이라는 특별한 자부심으로 무장을 했지만 마야부인이 낳은 첫아이는 아들이 아닌 딸, 바로 덕만이었다. 두 번째도 역시 딸이었다. 장차 석가모니와 같은 아들을 낳아 부처님의 나라처럼 태평성세를 열겠다는 기대는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성골의 위상은 땅에 떨어졌다. 왕의 실망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지만 그보다도 왕실의 체면은 더 웃음거리가 되었다.

원래부터 석가모니와 가까운 일족이네 어쩌네 하는 왕실을 처음부터 못마땅해 하던 진골 귀족들이 대놓고 비웃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수군거림이 귓가에 이명으로 쟁쟁거렸다. 진평왕은 사냥을 다니며 그 수치를 잊으려고 했다.

논호림이나 유림에 가득 매를 놓고 개를 풀어 그 뒤를 따르다보면 왕은 한결 마음이 풀렸다. 꼬리가 댕겅한 개, 댕갱이는 특히 꿩을 잘 잡았고 날개에 푸른 기가 도는 수지니는 그 긴 다리로 제 몸의 몇 배나 되는 오리도 채어왔다.

그런데 그런 왕의 사냥 길을 막아서는 신하가 있었으니 바로 왕의 오촌 당숙인 병부령 김후직이었다. 병부령이면 전쟁이 나면 나라의 안위를 책임지는 요직 중의 요직이다. 그 후직이 글을 올려 왕의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우리가 선대왕 이래로 불법을 받아들여 생명이 있는 것은 이유 없이 죽이지 말라는 가르침을 잊지 않고 있는데 대왕께서는 어찌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산천을 뛰노는 짐승들에게 살을 겨누시는지요.”

“.......”

“말을 달리며 사냥을 하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미치게 할뿐더러 여색에 빠지거나 사냥질에 빠지거나 한 가지만 있더라도 망하지 않는 이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목숨을 내놓은 듯 후직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왕은 얼굴색이 변하며 이마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왕을 태운 말과 댕갱이는 달리고 싶어 끼깅거렸다. 왕의 어깨에 올라앉은 수지니도 눈알을 도록거리며 부리를 비벼대기 시작했다. 왕은 후직을 밀치고 말에 박차를 가했다.

말은 길게 콧김을 내뿜고는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무리들이 함성을 지르며 그 뒤를 따랐다. 쓰러진 후직의 몸뚱이 위로 무리들의 발이 지나갔다.

‘내가 신하된 자로서 왕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다니……,’

후직은 깊이 병이 들었다. 병이 깊어 임종의 자리에서 후직은 세 아들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왕이 사냥을 다니는 길목에 묻어달라고 하였다. 죽어서라도 왕의 잘못을 간해야 한다고, 자못 비장하였다. 마침내 후직은 죽고 아들들이 유언을 지켜 왕의 사냥을 다니는 길목에 아버지를 묻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왕은 여느 날이나 다름없이 사냥을 떠났다. 늘 다니는 그 길을 지나는데 어디선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왕이시여 아니 되십니다, 걸음을 멈추소서! 듣고 보니 후직의 목소리였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후직은 죽지 않았더냐?”

왕의 얼굴은 아연 두려움이 어렸다. 목소리도 떨려나왔다. 그러자 신하들이 울면서 새로 생긴 무덤을 가리켰다.

“……저 무덤이 바로 후직의 무덤이옵니다.”

후직의 목소리는 봉분의 흙도 채 마르지 않는 무덤에서 계속 울려나오고 있었다. 왕은 우두둑 어금니를 깨물었다. 후직은 나 때문에 죽은 것이로구나! 왕은 말머리를 돌려 다시는 사냥을 가지 않았다.

왕은 딸 덕만을 돌아보았다. 당나라에서 보내온 그림만 보고도 그 꽃이 향기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는 똑똑한 딸이었다. 침착하고 사려 깊으며 사물의 이면을 보는 현명함이 있었다. 이제는 남자 성골을 마냥 아쉬워하기만 할 수는 없다 싶었다. 몸은 늙어가고 시간이 없었다. 지금부터라도 덕만을 고강도 정치수업에 들어가야 했다. 사촌동생 용춘도 불러들여 내성사신 겸 병부령으로 삼아 울타리를 만들어 주었다.

진평왕은 수, 당과의 외교관계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했고 국가 행정을 체계화하고 국왕의 통치권을 강화시켰다. 남산신성을 쌓아 국방에도 신경을 썼으며 왕 25년에는 친히 북한산성 전투를 이끌기도 했다.

승려들을 중국으로 유학을 보내고 또한 많은 젊은이들이 변화의 흐름을 맞아 외국으로 나가는 활발한 도약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렇게 오십사 년을 장기 집권했다. 아버지가 반백년의 장기집권이었으므로 덕만이 왕위에 오르는 것은 오십도 넘은 나이였다.

왕의 승하 조짐을 사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흰 무지개가 궁궐 우물에 들어가고 토성이 달을 범했다”

이듬해 정월에 왕이 승하하고 마침내 최초로 여왕의 시대가 열렸다.






정순채 경북문화관광해설사

경주신문 기자 / gjnews21@hanmail.net1346호입력 : 2018년 06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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