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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의 이계 이기희 선생이 하곡서당을 기록하다


경주신문 기자 / gjnews21@hanmail.net1455호입력 : 2020년 09월 10일

↑ 오상욱 시민전문기자
경북고전번역연구원장
우재학(禺齋學)·회재학(晦齋學)·퇴계학(退溪學)이 공존하는 경주 안강에는 크고 작은 사숙(私塾)의 공간이 많았고, 옥산문중에 속한 강학당(講學堂)으로 귀후재(歸厚齋) 이상규(李尙圭,1624~1696)가 운영한 독락당 서편의 귀후재가 유명하다. 게다가 옥산마을에서 서쪽으로 골짜기를 넘으면 하곡(霞谷)마을이 나오는데, 삼성산(三聖山)에 항상 안개가 끼어 있는 모습과 해질녘 안강 서쪽 하늘에 노을이 진다는 뜻의 하곡마을은 예로부터 빼어난 학자가 많이 배출되었으며, 쌍봉(雙峯) 정극후(鄭克後,1577~1658)의 성산서당(聖山書堂)과 자고(紫皐) 이재강(李在康,1814~1884)의 하곡서당(霞谷書堂) 등이 대표적이다.
양동마을의 자고선생은 회재 이언적의 10대손으로 조부 이정문(李鼎璺) - 부친 이오상(李五祥)의 가계를 이루며, 어려서부터 성리서(性理書)를 탐구하고 시문에 능하였다. 과거에 여러 번 응했으나 실패하였고, 후학양성을 위해 하곡의 무구담(無求潭) 가에 집을 짓고 학문연마와 함께 자연과 동화되어 일생을 보냈다.

이계(伊溪) 이기희(李紀曦,1863~1953)는 회재 - 잠계 이전인 - 치암(癡菴) 이순(李淳,1544~1580)의 후손으로, 조부 이진채(李眞寀) – 부친 이승수(李承壽)의 가계를 이었다. 옥산에 살면서 경사(經史)와 자집(子集)을 두루 섭렵하고 후학양성에 매진하였으며, 자고선생의 하곡서당 기문(『伊溪集』 卷3, 「霞谷書堂記」)을 지었다. 안동인 권효술(權孝述)이 지은 『이계집』 서문을 보면, “처사 이계 공은 옥산 회재선생의 먼 후손으로, 어려서 어버이를 잃고 7세에 비로소 글을 배웠다. 자질은 매우 둔하였으나, 농포(農圃) 조부께서 가엾게 여겨 매일 학업을 돈독히 하였으며, 이때부터 노력하여 뜻을 세우고, 독실히 내실을 기하였다. 성품의 고유함은 맡은 일 마땅히 해야 할 것에 조금의 허물도 없었으며, 가정에서 효우(孝友)를 행하고, 마을에서는 신의(信義)가 지극하였다.”평가하였다. 특히 『이계집』은 권1에 詩·書, 권2에 祭文·序, 권3에 記·跋·墓碣銘, 권4에 行狀·祝文·墓碣銘·通文·附錄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특히 양진재기(兩盡齋記)·율수재기(聿修齋記)·둔옹정기(遯翁亭記)·월산정사기(月山精舍記)·하곡서당기(霞谷書堂記)·판교재사기(板橋齋舍記)·은암송가산기(隱庵宋假山記) 등은 지역학 중요자료로 가치가 높다.

어느 날 자고선생의 후손 이희구(李僖久)·이태구(李泰久) 등이 옥산의 이계선생을 찾아가 선대의 글을 부탁하였고, 후학의 정성에 감동한 이계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하곡서당기(霞谷書堂記)
무릇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르치지 않고 배우지 않으면 인간의 도리를 알 수가 없으니, 알지 못하면 어찌 인간의 도리를 행할 수 있겠는가? 때문에 ‘가르침이 있을 뿐 차별은 없다(有敎無類)’ 또 ‘배우지 않으면 백성 가운데 최하가 된다(不學則民斯爲下)’고 하였으니 옛 성인이 후인을 위해 고심한 것이 절실히 드러나 있다.

우리 하곡의 여러 집안들이 양동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살았고, 세대가 여러 번 바뀌면서 자손들이 점점 많아졌다. 철종 정사년(1857) 무구담(無求潭) 가에 초가집 3칸을 세워 자손들이 공부하는 터전으로 삼았다. 또 자고(紫皐)공 이재강(李在康,1814~1884)께서 보고 들은 것이 많고 학문에 대한 소양이 넓어 평소 향당을 책임져 맡았고, 많은 이들의 바람으로 가르침을 주관하였으니, 어린 자는 공손과 공경을, 장성한 자는 경전 공부를, 그 사이는 시문(詩文)을 가르쳤다.

불행히도 공께서 돌아가시고 초가집은 완성되지 못한 채 세월이 오래되어 황폐해졌고, 포애(浦厓)공 이능겸(李能謙)이 집안 사람들과 논의하여 서실(書室)로 꾸밀 것을 생각하였다. 이에 부친의 형제와 자손들이 그곳에 가르침의 지극한 정성을 세우고, 이에 일을 맡기에 이르렀다.

고종 계사년(1893) 새로운 재목으로 시내 건너 황악(黃岳) 아래에 3칸 퇴주(退柱)를 세우고, 기와를 덮었다. 또 금 캐는 자들을 위해 장차 전복되 해가 될까 걱정되어, 이능환(李能煥)이 금산(金山) 아래로 옮겨 세웠다. 후원(後園)의 대숲은 앞 자연경관이 매우 좋았다. 두 번째 당을 짓는 역사에 남은 재력이 없어서 공은 또 자신의 논 11마지기의 7년 곡식 수입을 납부하여 영구히 지속되게 하였으니, 거의 옛 풍경의 모습을 회복하였다.

세상의 도가 지극하고 온갖 괴이함이 아울러 일어나서 우리 선비의 가르침을 펼칠 곳이 남아 있지 않으니 애통하도다! 이희구(李僖久)·이태구(李泰久)가 나(이기희)에게 서당의 기문을 부탁하였는데, 나는 “서당은 지금도 명성이 있거늘, 그대의 말이 지나치지 않은가?”하니, 이희구가 “그렇지 않습니다. 옛 것에 의거하면 그 교학(敎學)은 명분의 실상일 것이니, 어찌 기문을 기다리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전말을 자세히 기록하여 문미에 걸고서 후학으로 하여금 이곳을 오르면서 보도록 하여, 더욱 분발하고 갈고 닦아서 천성을 회복함이 있다면 옳은 일이 아니겠습니까?”하였다.
경주신문 기자 / gjnews21@hanmail.net1455호입력 : 2020년 09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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