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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관찰사 신석우 경주를 말하다


경주신문 기자 / gjnews21@hanmail.net1398호입력 : 2019년 07월 11일

↑↑ 오상욱
시민전문기자
경북고전번역연구원장
유기(遊記)는 기록의 단상(斷想)으로 그 지역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다. 필자는 KCI논문 2017년도 『동방한문학회』에 게재된 「조선시대 경주지역 유람과 유기(遊記)의 특징 고찰」,『동방한문학』71집을 통해 19편에 해당하는 경주유기의 소재 발굴과 유기가 갖는 특별한 의미를 찾았지만, 방대한 한문학 자료를 분석해서 경주유기자료 집성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해장(海藏) 신석우(申錫愚,1805~1865)는 1828년 벼슬길에 올랐고, 1855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경상도에 큰 재해가 발생하자 급히 조정에 보고해 백성들을 구제하는 등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였다. 1856년에는 경주를 찾아 공무(公務)를 우선으로 하면서도 틈틈이 경주의 곳곳을 탐방하고 「동경방고기(東京訪古記)」기행문과 봉황대·첨성대·반월성·황남전·계림·숭덕전·태종무열왕·옥적·여러 왕릉·상서장 등 10곳을 「동경회고(東京懷古)」로 읊조렸다. 당시 경주부윤은 우암의 8대손 송근수(宋近洙,재임1855.12~1857.5)였다. 그는 경주 유람에 대한 기록을 쓰면서 일부는 지역학 자료를 참고하였고, 나머지는 직접 본 사실을 담았다. 주로 인용한 『동경지(東京志)』는 편저자 미상의 경주읍지로, 1669년 경주부윤 민주면(閔周冕)이 이채 등과 함께 증보한 것으로, 『동경잡기』·『동경통지』로 불린다.

「동경방고기」의 특이점으로는 경기도 장단에 묻힌 경순왕을 제외한 57왕릉이 동경에 있어야 한다는 신라 58왕 주장이다. 이계 남몽뢰·화계 류의건 역시 신라 55왕을 말하였고, 특히 청장관 이덕무는 44대 민애왕(閔哀王)을 지칭해서 뺀 55왕 만을 언급한 것을 보면, 현재 신라 56왕은 재고될 소지가 다분하며, 여기에 관해 깊이 있게 연구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또 반월성의 석문(石門) 그리고 계림정(鷄林井) 등 설명은 당시의 문화재 현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만약에 신석우가 본 반월성의 석문이 1738년 축조된 석빙고를 오인(誤認)한 것이라면, 이는 조선의 석빙고를 신라의 축조물로 보는 등 문화재를 바라보는 조선선비의 심각한 문제점이 아닐 수 없으며, 예나지금이나 문화를 보는 무지(無知)의 소치(所致)가 매우 안타깝다.

게다가 경주부윤 송근수의 형은 바로 수종재 송달수로, 1857년 총 64일간 여행을 떠나며 4/19~5/20 32일간 경주에 머물렀고, 송달수는 동생을 만나러 가는 길에 더불어 옥산·인산서원을 찾아 도통연원을 확인하는 등 뚜렷한 유람배경이 있었다.

본 자료는 앞서 선행 연구된 경주유기 19편 목록에서 빠진 자료로, 단편적인 경주의 유람기록을 담고 있으며, 동일 제명으로 앞서 1760년 석당 김상정이 지은 「동경방고기」가 있다.

-1856년 동경 고도를 방문한 기록(東京訪古記)
동경은 신라의 고도이다. 고적(古蹟)을 두루 찾아보고자 하였으나, 공무(公務) 때문에 객지에 머물며 여러 날 돌아다닐 수는 없었고, 또 고사에 의거해 글을 짓고자 하였으니 동경지(東京志)·전(傳)과 대부분 같았다. 다만 열람한 자료와 무열왕·최치원 등의 고사를 모아서 절구를 짓고 그것을 엮었다.

봉황대는 경주부의 남쪽 몇 리 작은 언덕에 있다. 부의 지세는 평평하고 넓어 그다지 험하고 높지 않고, 산천과 마을을 한 번에 다 둘러볼 수 있었다. 세상에 전하길 ‘동경의 북쪽은 허결(虛缺)하여 여인들은 북상투(땋아서 틀어 올린 머리)로 그 기운을 누르고, 개와 가축은 꼬리가 짧다.’고 전한다. … 봉황대 아래에 큰 종이 있는데, 종각이 대종을 덮고 있다. 동경지(東京志)에 ‘본래 봉덕사 종이었는데 훗날 영묘사(靈竗寺)로 옮겨다 걸었다.’하였으니, 이곳은 필시 영묘사(靈妙寺)의 터일 것이다.

지나는데 첨성대가 평야 중간에 보였다. 벽돌처럼 다듬은 돌로 대를 쌓았고, 모양은 동글고 뾰족하였다. … 그 둘레는 17보가 되고, 높이는 3장(丈) 쯤 되었다. 대의 중간에 모난 문이 설치되었는데, 내가 “첨성대 중간에 돌사다리가 마치 나선처럼 있다면 오를 수 없겠는가?”라 하니, 고을 사람이 “그렇지 않습니다”하였다. 내가 “중간에 나선형 사다리가 없어서 땅의 평평한 곳에서 모난 문에 이르기까지 또한 잡아당길 것이 없어 이를 수가 없다. 이곳에 사다리를 설치해서 오르내릴 수 있지 않겠는가?”라 하였다.

황남전 경순왕상(敬順王像)을 참배하였는데, 그곳은 부의 황남리에 있다. … 숭덕전은 신라시조를 배향한다. 사릉(蛇陵)은 그 위에 있다. 나정(蘿井)은 그 곁에 있고, 우물이 나온 곳이다. 능은 장사지낸(歸藏) 곳이요, 여러 왕릉의 대부분이 사릉의 경내에 있다. 신라는 58왕으로 능원(陵園:왕족의 무덤)은 동경지에 다 기재되지 않았다. 지금 부의 바깥 들판에 우뚝하게 쌓은 것이 여럿이다. 혹자가 “이곳은 모두 능묘(陵墓)입니다”라 하였다. 경순왕은 고려조에 몸을 의지해 지냈고, 장단(長湍:경기도)에 장사지냈으며, 비록 그곳을 알지는 못하지만 경주에는 당연히 57곳이나 된다.

반월성은 탈해가 차지하고, 파사왕이 쌓은 곳이다. 긴 언덕은 초승달 같고, 앞의 큰 시내는 문천(蚊川)이라 한다. 성 안에는 녹음이 짙고, 돌을 쌓아 만든 문이 있다. 그 안의 제도는 마치 성문은 돌무지개문 같았다. 문미의 돌에는 ‘崇禎紀元後再辛酉(1741) 移基改築’이라 각석되었지만, 본래 어디에 있었고, 어떤 연유로 옮겨와 건축되었는지 모른다. 돌비석이 있는데 완악해서 읽을 수 없는 게 한스러웠다.

월성의 남쪽에 인산서원이 있는데, 우암 송시열을 배향한 곳이다. 첨알하고 물러났다. … 오늘 70리 떨어진 반구[언양]에서 자고자 하였으나, 고적을 방문하느라 날은 이미 포시(晡時.오후3~5시)에 가까웠다. 마침내 길을 떠나 한 쇠락한 곳을 지나는데, 종자가 “이곳은 포석정입니다. 마음이 두려워 들어가지 못하겠습니다”라 하였다. 밤이 되자 황옥적(黃玉篴)·황옥적(黃玉篴)을 보고는 불어 볼 것을 부탁하였는데, 청옥적은 더욱 청량(淸亮)하여 가늘고 긴 알운(戛雲)의 울림이 있었다. 신라는 오랑캐의 풍속으로 중국의 세상을 바꾸려 한 노력과 원수를 갚고 강토를 개척하는 공적은 무열왕이 성대하였고, 고운 최치원은 황엽청송(黃葉靑松)의 글을 지었지만, 비록 신라가 망하게 되었다고 믿을 수는 없다. 또한 동도회고(東京懷古)의 말미에 부친다. 상서장은 금오산 북쪽에 있다고 전한다.
경주신문 기자 / gjnews21@hanmail.net1398호입력 : 2019년 07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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