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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손곡동 요수재의 추모당을 찾아서


경주신문 기자 / gjnews21@hanmail.net1386호입력 : 2019년 04월 18일
↑↑ 오상욱 시민전문기자
경북고전번역연구원장
경주 손곡동은 경주최씨 자희옹 최치덕(1699~1770)의 종오정(從吾亭)과 만송 최찬해(1884~1960)의 만송정(晩松亭) 그리고 밀성박씨 지당 박만흥(1678~1742)의 요수재(樂水齋) 등 조선후기 선비문화와 이를 계승하고자 하는 후손의 노력이 공존하는 소중한 공간이다.
특히 요수재는 18세기 초반에 건립된 밀성박씨의 재실(齋室)로 지당선생의 아들 인당(仁堂) 박세운(朴世雲)과 죽당(竹堂) 박세혁(朴世爀) 후손들이 유지·계승해오고 있으며, 200여년이 흘러 경주유림과 각계각층의 지지를 받으며, 후손들이 문중의 화합과 번영을 도모하기 위해 요수재 서편에 추모당(追慕堂)을 건립하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바쁜 현대인의 일상과 후손의 부재로 추모당은 사라질 위기에 처하고, 당시 높게 걸린 현판 등은 현재 동천동 인당공파 문중으로 옮겨 보관 중이다.
박효달(朴孝達)-박사익(朴仕益)-박의일(朴義日)-박영옥(朴英玉)-박만흥(朴萬興)-박세운 등으로 요수재의 가계가 이어지며, 박사익은 병자호란 이후 가솔을 데리고 처음으로 경주 아리(阿里,천군동)로 옮겨와 살았다. 박의일은 아리에서 손곡동으로 이거하면서 현재의 집성촌을 이뤘으며, 어려서부터 밖으로는 엄숙하고 안으로는 지혜로웠고, 약관의 나이에 문예가 크게 도달하였으며, 박나헌(朴懶軒)과 정졸재(貞拙齋) 이하원(李夏源,1664~1747) 두 문하에 나아가 문행으로 명성을 떨쳤다. 박만흥은 요수재 터를 잡고 효행을 가르치며 산수경치를 즐겼고, 인당과 죽당 두 아들에게 가학을 계승하였다. 특히 인당선생은 가학을 이어받아 1765년에 가훈구조(家訓九條)[1.부모에게 효도하라(孝父母) 2.형제 간에 화목하라(和兄弟) 3.제사를 받들어라(謹祭祀) 4.손님을 잘 대접하라(敬賓客) 5.학문에 힘쓰라(力學文) 6.명예와 이익을 멀리하라(遠名利) 7.사치를 금하라(禁侈華) 8.괴이한 일을 끊어라(絶怪異) 9.재물을 절약하라(節財用)]를 지었고, 죽당선생은 거가십계(居家十戒)를 지어 집안 다스리는 요체에 대해 가르쳤다. 이러한 효행과 수신의 가르침은 가학으로 계승되었고, 손곡동 요수재를 중심으로 인당과 죽당의 후손들이 1968년 요수재 주변에 ‘추모당’현판을 걸고, 선대의 유업을 받들었다.
1968년 영가권씨 권중석(權重奭)이 상량문을, 송운(松雲) 최홍락(崔鴻洛,1885~1974)이 기문을, 이듬해 정월에 7세손 박주동(朴疇東)이 기문을 추가하였다. 송운선생은 경주 천군동 남쪽 아리(阿里) 출신의 근대 한문학자로, 양몽재(養蒙齋)를 통해 많은 문하생을 양성하였고, 저서로는 『송운집(松雲集)』이 전하며, 지역에 많은 글을 남겼다.
지금의 추모당은 사라졌지만 다행히도 현판이 소중히 보관되어 지난 역사를 알 수 있게 되었고, 장래에 추모당이 재건되어 후학의 배움터가 되길 희망해본다.

추모당기(追慕堂記)
세상에 어질고 재주가 빼어난 인물이 어찌 우연히 생겨났겠는가? 천지의 기운과 산천의 정령은 아름답고 훌륭한 풍경이 많거늘, 영남의 남쪽에 용이 날고 봉황이 날아오르며 웅장하고 빼어난 형세 가운데 계림(경주)이 가장 아름답다. 계림의 땅은 신령스러워 훌륭한 인재가 많이 나오는데, 동쪽으로 손곡에 이어져 인당(仁堂) 박세운(朴世雲,1717~1778)선생께서 이러한 청명하고 순수한 기운을 받아 태어나셨다. 신성(神聖)의 후예이고, 덕망있는 고관대작(高官大爵)이 대대로 빛났으며, 신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천여년 동안 제사가 이어졌고, 대개 영험한 뿌리(선조)와 무성한 잎(후손)이 유래가 있어왔다.
공은 빼어난 재주가 있어서 어려서부터 시(詩)와 예(禮)를 익혔으며, 밖으로는 명리(名利)를 하찮게 여기고, 안으로는 덕을 닦았다. 책을 펼쳐 성현을 대하며, 성현의 심법(心法)과 가르침의 뜻을 궁구하였고, 어진 선비의 경지에 충분히 이르렀으니, 그 조예의 깊이가 후생이 감히 쳐다볼 바가 아니도다. 다만 공의 실기(實記)를 살펴보건대 구조유훈(九條遺訓)은 진실로 덕이 있는 군자의 말씀이고, 모두가 몸소 행하여 얻은 여유에서 나왔으니, 이것으로 공의 높은 경지를 볼만 하도다.
살펴보건대, 공의 선친께서는 문행(文行)이 빼어나 당세의 선비들이 높이 받들어 귀하게 여겼고, 세상을 피한 한가로운 취미가 산수사이에서 있었다. 일찍이 집 하나를 짓고자 하였으나 마음만 앞서고 여유가 미치지 못하였는데, 공께서 능히 유지(遺志)를 받들어 두 동생과 함께 힘과 정성을 다해 선친께서 잡은 터에 요수재(樂水齋)를 지어 조상의 사적을 크게 드러내었으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공의 후손이 선대의 계통을 이어서 힘을 다해 요수재를 이미 완성하였고, 공의 주손 박병기(朴炳基)가 족인(族人) 박태성(朴泰星). 박우동(朴禹東)과 함께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였다.
무릇 요수재의 자연경관은 … 비록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처럼 아름답지 않지만, 맑고 깨끗이 흐르는 물을 보면 내 마음의 찌꺼기가 다 사라지고, 맑고 맑은 샘물소리를 들으면 내 마음의 사특한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못함을 생각하게 되니, 이곳은 은거의 장소로 충분하다. 무신년(1968) 중양절에 월성최씨 송운(松雲) 최홍락(崔鴻洛)이 삼가 짓다.
경주신문 기자 / gjnews21@hanmail.net1386호입력 : 2019년 04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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