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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 꼬리


경주신문 기자 / gjnews21@hanmail.net1417호입력 : 2019년 12월 05일

배추 꼬리


                                                           고영민



단단히 포기 진 배추를 뽑아
꼬리를 자르며,
나는 문득 이 배추들이 음전한 자태로
밭고랑에 앉아 있던 목숨이었다고 생각한다

뿌리가 아닌 배추의 긴 꼬리로
땅속에서,
비가 오면 좋아라, 꼬리를 치고
바람이 불면 좋아라, 꼬리를 치고
비료를 주면 좋아라, 꼬리를 치고

이슬내리는 아침과 서리 앉는 새벽까지
절은 머릿수건과 등줄기,
화끈거리는 가슴팍으로 잎새를 접어
겹겹의 푸른 그 결가부좌로 앉아
돌부리 헤집어 두둑을 돋아주는
늙은 밭주인의 호미질에
꼬리를 치고, 또 꼬리를 치고

산비탈 밭뙈기 한켠,
머리를 통째로 고랑에 박고
배추는 벗을 수도 벗겨낼 수 없는 속을 품고
댕강 잘린 악마디의 목숨으로 누워 있다
내내 흔들던 꼬리는 흙바닥에 고스란히 박아놓고
육중한 고요의 무게,
겨루었던 한포기 푸른 몸통을
내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꼬리는 땅속에서 남아
여전히 살랑살랑 꼬리를 치고,
또 꼬리를 치고



-배추가 꼬리를 친다는 말
↑↑ 손진은 시인
“배추 뿌리가 땅에 박혀 있다”고 말하면 그 말에는 관습적인 사고만 남고 내가 겪은 고유한 느낌은 삭제된다. 그것은 또 뿌리가 생명현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음도 알게 한다. 관습적인 사고나 시선에는 몸이 없고 핏줄이 없고 감각이 없고 생명의 움직임에 대한 자각이 없으며 따라서 에너지도 없다.

그런 점에서 고영민의 시는 신선하다. 언어로 표현하기 전에 몸에서 나오려고 했던 ‘생생하고 아름다운 느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느낌을 어떻게 언어에 담을 것인가. 그것만이 시인에게 문제가 된다. 시인은 배추의 생명 현상을 ‘꼬리를 치다’라는 몸의 느낌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배추가 단순히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는 외적 자극에 반응하는 하나의 생명체임을 고스란히 잡아낸 것이다.

그렇다. 배추 뿌리가 아니라 ‘긴 꼬리’는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비료를 주면 좋아라, 꼬리를 친다. 두둑을 돋아주는 늙은 밭주인의 호미질에도 꼬리를 친다. ‘꼬리침’의 결과가 배추의 속이 차오를 때까지의 성장과정이고, 그것을 넘어 배추가 “댕강 잘린 악마디의 목숨으로 누워 있”을 때에도, 잘린 채로 혼자서 “땅속에서 남아/여전히 살랑살랑 꼬리를 치고,/또 꼬리를” 치는, 생명현상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꼬리를 치다’라는 말이 단순히 언어의 기교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배추 꼬리’라는 말에서 발상을 착안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런 원초적인 느낌 을 통해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개인만이 알 수 있는, 생명의 현상을 잡아낸 것이다. 좋은 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몸 안의 생명 작용, 생명 활동, 생명 그 자체를 자각하게 하는 힘이 있다.

곳곳마다 배추 수확과 김장이 한창이다. 이 시기에 배추의 생명을 ‘꼬리’의 활동으로 잡아낸 시 한 편을 읽는 기쁨이 크다.
경주신문 기자 / gjnews21@hanmail.net1417호입력 : 2019년 12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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