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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그립습니다...동전(東田) 서영수 선생을 추모하며

시인이시여… 그토록 사랑했던 고향 경주에서 영면하소서
선애경 문화전문 기자 / 1454호입력 : 2020년 09월 03일

‘내 고향 경주, 겨레의 고향이다. 여기에 나서, 여기서 자라, 여기서 묻혀야 할 나의 땅, 경주를 나는 사랑한다’ -‘경주 하늘’ 서문.

‘나의 시는 누가 뭐래도 나의 시, 어설픈 나를 닮은 한평생 5백여 편의 시, 언제나 내 것은 눈치 볼 필요 없는 내 것이니까’ ‘평생 지방이 좋아 고향 경주가 좋아 고집하여 살아 온 오늘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바람의 고향’ 시집 자서(自序).

 
↑↑ 2008년 ‘동리목월 작품 배경지를 찾아서’ 문학기행.

경주는 다시 큰 별 하나를 잃었다. 시인이자 경주 문화예술계의 어른 한 분을 잃은 것이다. 전 한국예총 경주지회장을 지낸 서영수(1937년~2020) 시인이 향년 81세의 일기로 지난달 25일 별세했다.

깊은 애도 속에 선생을 떠나보냈지만 기자를 포함해 선생과의 기억 한자락 정도는 많은 이들의 가슴 한 켠에 두고두고 남아있을 듯하다. 선생의 생애에 관한 자료와 이야기들을 짧은 시간에 모자이크처럼 끼워 맞추는 일은 간단치 않았다. 생전의 선생을 기억하는 이들의 에피소드담과 함께 본지에 보도되거나 기고한 선생의 글도 찾아보았다. 선생의 흔적을 더듬는 일은 현대의 경주 예술문화를 망라하는 것에 다름없었다. 본지 신년시와 창간 축하글도 기고했던 생전의 선생을 인터뷰했던 당시와 원고를 부탁드렸던 일도 떠올라 더욱 숙연해졌다.

 세세만년 잊혀지지 않는 시를 남기기 위해 종신토록 매진할 것을 다짐한 순정한 시인은 자신의 한계를 투명하게 인식하고 성실한 자기성찰을 추구하는 정결한 심성의 소유자였다. 60여 년 시작(詩作) 생활을 통해 많은 시를 남긴 선생은 훌륭한 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동리목월문학관 창립, 목월생가 복원, 경주예총지회장, 경주문협 활동 등을 통해 경주 문화예술의 오늘이 있기까지 중추적 역할을 하며 지대한 공로를 남긴 이다. 경주문단의 산증인으로 30년 동안의 교직생활(경주고등학교 국어과)을 통해 제자들에게 문학의 꿈을 심어준 스승이기도 했다.

선생은 대부분의 사진과 기록에서 베레모를 쓰고 있었다. 짙은 눈썹이 특히 인상적인 선생은 불그레한 안색에 늘 잔잔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었다. 평생 경주를 떠나지 않았던 선생은 2016년 경 홀연히 인천으로 거처를 옮겼다. 서울 문인들과의 교류도 잦아 그럭저럭 잘 지내신다는 전언도 듣고 있었다. 인천으로 가셔서 그 서운함과 허전함이 컸던 차제에 다시 그토록 사랑하던 고향 경주로 돌아오시니 영면에 드시기 위함이었다. 후일 다양한 이들의 기억들과 소회를 자세하게 정리하고 업적을 재조명해볼 것을 선생의 영전에 약속드리면서 두서없이 부족하기 짝이 없는 글로 소략해 정리해 보았다.

↑↑ 2012년 동리목월문예창작대학 졸업식.

-청마의 입김과 목월의 사랑, 미당의 아낌을 받은 학생 서영수, 문학적 재질과 수준 높아져… 문단 정치에 연연하지 않고 민족 정서와 소박한 인간 본성의 소리 찾아

  장윤익 문학평론가(전 동리목월문학관장)는 ‘동전서영수시선(미리내, 1997)’에서 ‘경주에서 만난 원형적 생명의 미학’이라는 평론을 통해 서영수 시인의 시 세계를 평했다.

장윤익 평론가는 이 글에서 ‘경주가 낳은 경주의 시인 서영수는 경주를 무척이나 사랑하여 줄곧 경주에 살면서 대부분 경주를 대상으로 우리 문학사와 향토사에 길이 남을 시를 쓰고 있다’고 전제했다.

‘순수와 토착정서와 신라 정신이 예술적 아름다움으로 승화된 서영수의 시는 거창한 철학이나 사상을 토로하지 않는다. 그의 시편은 경주의 하늘과 산과 새소리를 경주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시의 톤으로 노래한다’고 했다.

‘서영수의 문학은 경주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고 경주를 통해서 겨레의 고향을 찾고 거기에서 인류의 보편성을 찾아내는 것이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이라는 것을 그는 잘 인식하고 있다’

‘청마의 입김과 목월의 사랑, 미당의 아낌을 받은 학생 서영수의 문학적 재질은 수준 높은 시의 시계로 나아가게 한다. 문단 정치에 연연하지 않고 민족 정서와 소박한 인간 본성의 소리를 찾는 서영수는 불후의 명작을 남기기 위해 생명의 근원을 미적 가치로 형상화하는 시인이다. 서영수는 경주를 무척이나 사랑하여 경주와 인연을 가지고 있는 모든 일을 시적 형상화를 통하여 여러 시집을 발간했다’

↑↑ ‘2013 경주예총 송년의 밤’ 행사에서 ‘경주예총50년사’편찬위원들, 예총회원과 문화계 원로들이 함께 하고 있다.

-“‘서영수’를 대표할 만한 역작을 만들고 싶은데 못쓰고 있다”

2012년 일곱 번째 시집 ‘바람의 고향’으로 ‘제48회 한국문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아 기자가 직접 인터뷰 한 내용 중 부분을 발췌했다.

‘청마 유치환 선생은 매우 근엄하신 분으로 내 일생을 두고 잊지 못할 분이다. 경주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1956년 당시 청마 유치환 선생이 경주고등학교 교장으로 계셨는데 매우 근엄하셨다. 청마 선생은 나를 끔찍하게 아껴 교내 문예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 특히 경주 출신으로 각별한 사제지간이었던 동리선생은 ‘동전(東田)’ 이라는 호를 지어주기도 했다.

1953년 신라문학동인회 주최의 한글백일장에서 경주중학교 3학년 당시 일기장에 낙서처럼 쓴 ‘안압지에서’ 가 중고등학생을 포함해 백일장 장원을 차지했다.

‘벼가 익어가는 가을 하룻날/ 너와 마주섰다.// 오늘은 몹시도/ 바람이 불어/ 너의 품에는 저렇게도/ 갈대가 우나보다.// 헤아릴 수 없는 해와 밤이/ 낙엽처럼 묻혀도/ 종내 말을 않는 네 언저리에서/ 가을은 가을대로 익고.// 천년 아득한 옛날/ 찬란한 왕궁을/ 한번은 더 말할 것 같기에// 나는 이렇게/ 어린 왕처럼 거닐어 보는 것이다./ 어린 왕처럼 거닐어 보는 것이다.//-‘안압지에서 전문’

이 시로 자신감을 얻는 계기가 되었고 그때부터 밤을 새워 소설과 시를 읽어댔다. 경주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부터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했다. 또 운이 좋게도 서정주, 조지훈, 박목월, 김동리, 선생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 사랑으로 1978년 ‘청마백일장’을 제정하게 된다.

경주에 살면서 경주에 바치는 일종의 서사시 같은 약 100여 편의 축시와 조시 등을 썼다. 경주에 살면서 내게 청탁 들어 온 시들을 많이 써주었는데 이들의 시에는 경주의 역사가 담겨진 시가 대부분이다. 또 여생동안 경주의 흙냄새가 나는 역작을 쓰고 싶다. ‘서영수’를 대표할 만한 역작을 만들고 싶은데 못쓰고 있다.

↑↑ 시인의 묘 옆에 세워진 대표작 '안압지에서' 시비.

-중학교 다닐 때부터 학생문단을 주름잡아/ 청마 선생의 러브레터를 이영도에게 전하는 배달부 역할 하기도

정민호 동리목월관장이 본지에 연재한 ‘시와 술과 경주 문인들의 이야기’ 중에서 서영수 시인에 관한 에피소드를 소개한 바 있다. ‘서영수는 중고등학교 다닐 때 청마 유치환을 만나 그의 애제자로 청마의 사랑을 받았다. 벌써 중학교 다닐 때부터 학생문단을 주름잡던 서영수이기 때문에 그의 시는 이미 전국에 알려진 학생시인이었다.

그는 전국 백일장에 ‘안압지에서’란 시를 써서 ‘어린 왕처럼 거닐고 싶다’는 패기를 보이기도 했다. 서영수는 학교 다닐 때 ‘별과야학’이란 학생시집까지 낸 일이 있었으니 전국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전국백일장에 나가기만하면 장원 아니면 차상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한편, 이영도 시조시인이 마산 부산이 생활 근거지였었는데, 잠시 서울로 가서 우거하고 있었던 때가 있었던 때 서영수는 서울에 대학을 다녔으니 청마 선생의 편지(이영도 여사에게 보내는 러브레터)를 가지고 가서 이영도에게 배달부 역할을 단단히 했다. 청마는 그만큼 서영수를 믿었기 때문이리라. 나중에 청마가 돌아가시고 이영도 시인은 청마에게 받은 편지를 모두 모아서 책으로 묶었으니 ‘사랑 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가 바로 그것이다’라고 회고했다.


-‘인천서 공원에 나와 있는데 친구도 없고 적적하다’/ “선생은 부족한 듯 겸손했지만 우직한 고집을 가지고 계셨어요”/ “경주의 파블로 네루다 같은 시인이었습니다”

윤광주 선생이 들려준 에피소드 한 자락.
“지난해 2019년 가을, ‘별과야학’을 서울 인사동의 책을 취급하는 옥션에서 경매에 나와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됐어. 그래서 인천에 계시던 형에게 ‘혹 가지고 있느냐’ 물었더니 한 권이 집에 있다고 해 굳이 매입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대뜸 불어보는 말이 ‘얼마에 올라와 있노?’ 하길래 ‘50만원부터 올라와 있다’고 했지요. 다시 대화는 이어졌는데 ‘공원에 나와 있는데 친구도 없고 적적하다’고 했던 것이 고인과의 마지막 대화였어. 경매에 그 옛날 시집이 올라와 있는 것도 신기했고 형이 시집 가격부터 물으니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나요”

선생은 또 2010년 3월~2014년 2월까지 경주예총 22대 회장을 역임했는데 당시, 경주예술사를 총망라하는 ‘경주예총50년사’를 발간하는데 힘을 쏟았다. 당시 서영수 회장은 경주예총 50년을 이뤄낸 경주 예술인들의 고난과 감동의 소회를 숨기지 않았었다. 한중권 전 경주예총 사무국장은 ‘경주예총 50년사’ 발간은 서 회장의 핵심사업중 하나였다고 회고하면서 “회장님은 경주의 파블로 네루다 같은 시인이었습니다. 풍기는 이미지가 비슷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조철제 경주문화원장이 전하는 에피소드도 들어보았다.

“서영수 선생과 함께 경주고등학교에 재직한 기간은 20여 년 입니다. 국어과에 함께 있었기에 여러 추억이 많지요. 글을 쓴다는 것은, 즉 ‘시인은 저렇게도 순수하고 순박해야만이 순수한 시를 쓸 수 있구나’를 자주 느꼈었지요. 가장 향토적인 경주에 관한 서정시를 자주 쓰신 것 같아요. 우울한 이들에게 편안함을, 가난한 사람에게는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문학적 에너지랄까. 그런 위안을 주는 시인이었어요. 선생은 부족한 듯 겸손했지만 그래도 우직한 고집을 가지고 계셨어요. 평소 어느 누구보다도 존경받고 덕망을 지닌 분이었습니다”

“한 가지 재미난 기억으로는 회식 자리에서 종종 화투를 치곤했는데 서영수 선생은 ‘달광’과 ‘똥광’ 하나만 들어오면 귀밑이 벌개질만큼 좋아하는 모습이 들통났었지요. 하하. 숨기지 못해 남들이 다 알아버리게 할 정도로 감추지를 못하셨던 겁니다. 그만큼 순수하셨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뵌 것은 경주 읍성 향일문 상량식 때였습니다. 2018년 향일문 상량문 글을 지을 사람으로 서영수 선생을 추천해 지금의 향일문 상량문을 짓게 되었는데 매우 현대적이면서도 시적으로 지은 유려한 장문의 글이었습니다. 상량식이 있던 11월, 선생이 내려 오셔서 뵀는데 얼굴빛과 거동이 불편해보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것이 선생을 마지막 뵀던 모습이었습니다”

“지역에서 어른 한 분, 원로 한 분을 모시기 어려운 시대잖습니까. 진정한 스승이 귀한 시절에 문학의 원로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큰 시인이 가셨지만 그 분의 인품과 문학세계는 길이 남을 것입니다”

서영수 시인
은 1937년 경주 건천 출생. 경주중고등학교를 거쳐 중앙대학교(구 서라벌예대)문예창작과를 졸업. 1955년 학원문학상을 수상하고 대구일보(56년), 영남일보(57년), 세계일보(64년) 등의 신춘문예에 시로 당선이 된다.
시집 ‘별과야학(59년)’, 1972년 박목월의 추천으로 현대시학으로 문단에 등단해 시집 ‘낮달(1979)’ ‘동전시초(東田詩秒)(1985)’ ‘경주하늘(90년)’ ‘선도산 일기(1994)’ ‘엊저녁 달빛(97년)’ ‘바람의 고향(2011)’ 등을 비롯해 많은 시와 시집을 남겼다.

제11·15대 경주문협지부장을 역임하면서 청마백일장을 창설하고 경상북도문인협회장을 재역임하면서 경북문학상을 제정하는 등 크고 작은 일들을 추진해온 왕성한 활동은 지역사회에 귀감이 되었다.

선생은 한국문인협회 고문, 한국현대시인협회 중앙위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동리목월기념사업회 부회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경주지회 회장, 한국예총 경주지회장, 경주문화원 이사 등을 맡아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왕성한 문학 활동과 지역사회 예술을 발전시킨 공로로 경북문화상(1986), 경주시문화상(1992년), 금오대상(1988년), 국민훈장석류장 수훈(1999년), 한국문화예술공로상(1990), 금복문화예술상(1991) 등을 수상했다.
선애경 문화전문 기자 / 1454호입력 : 2020년 09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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