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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유림숲(柳林)… 강변 숲의 풍치 뛰어나 시민들이 숲 메웠다

1300년 된 유서깊은 유림숲, 그 원형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선애경 문화전문 기자 / 1450호입력 : 2020년 07월 31일
↑↑ 강변도로 개설 전의 유림의 전경(사진은 신경주지역개발(주) 최재영 대표이사 제공).

‘아아, 숲의 정령들이시여. 그대들이 이 땅에 뿌리박고 그늘을 드리워 우리의 마음은 한없이 넉넉하고 풍성했습니다. 우리는 그대들을 떠나보내지만 두고두고 마음속에 오늘의 슬픔을 되새길 것입니다’
‘수백 년 된 팽나무, 왕버들, 회나무, 녹개나무가 2500m²였고 강에는 황어와 은어, 연어가 철따라 오르고 다슬기는 지천으로 널렸다. 지난 세월 유림은 강변 숲의 풍치가 뛰어나 특히 봄여름에는 술과 음식을 소달구지에 싣고 와서 하루해가 짧다는 듯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즐기던 시민들이 숲을 메웠다’

 
↑↑ 강변로 길은 예전의 숲을 삼켜버렸다.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는 유림숲(柳林)을 그리워하는 글들이다. 시민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하며 어머니의 따뜻한 품 속 같았던 유림숲은 숲의 황폐화와 강변로 개설 공사 등 시의 개발계획에 의해 그 원형을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됐다. 강변 숲은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유림숲을 기억하는 많은 시민들은 현대화의 물결이 할퀴고 간 초라해진 지금의 숲을 바라보며 아쉽고 그리운 정에 가슴 저미는 감회를 금할 길 없다고 회고한다.

수령 100~150년 생 68본을 밀어내고 새로 난 강변로 길은 예전의 숲을 삼켜버렸고 그림 같았던 강촌마을을 무너뜨려 강촌의 풍경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유림숲은 계림숲, 황성숲과 더불어 신라시대부터 명맥을 유지해왔던 역사적인 숲이었다. 홍수 때마다 마을을 지켜왔고 더운 여름날엔 시원한 그늘이 되어준 즐거운 놀이터였다. 70~80년 전엔 초등학교 학생들의 소풍놀이 장소로, 한국전쟁 이후엔 숲이 시작되는 ‘봇두막’ 옆에서부터 널부러진 탱크의 잔해가 수년간 방치돼 있기도 했다고 한다. 1970년대까지 만해도 경주 유일의 물레방아가 ‘삐그덕’ 거리며 돌던 풍경도 있었다. 유서 깊은 나무 한 그루를 피해 수 마일을 돌아가는 다른 나라의 예는 적용되지 않았다.

↑↑ 비록 숲은 사라졌지만 유림숲을 그리며 마을의 안녕을 위한 ‘유림 제단’이 있다.

-서천변 따라 조성된 강변도로선이 유림숲 통과하도록 돼 있어 유림숲 대부분 사라져

1997년 경주시 보고서에서는 ‘유림은 형산강가에 조성된 숲으로 조성목적은 수해 방지림으로 추정된다. 이 숲은 삼국시대에 설치된 임수(林藪) 중 고양수에서 주변의 개간과 개발로 인해 황성숲과 분리됐고 점차 축소돼 현재에 이른 것으로 추정한다. 서천의 동안(東岸)에 길게 조성된 선형의 숲으로 인근 지역에는 밭이나 오래된 주택들이 입지하고 있다. 서천변을 따라 조성된 강변도로 계획선이 유림숲을 통과하도록 돼 있어 유림숲 대부분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현재의 유림은 주변 개간과 개발로 원래의 숲이 대폭 축소되었으며 수세가 점점 위축되고 있다. 계속되는 서천 호안의 침식으로 식재 기반이 약화되었고 매연과 부유분진, 토양오염 등으로 생육 기반이 약화되었고 후계림이나 대체림을 식재해 보존하지 않으면 안되는 위기에 처해있다’고 보고했다. 또 ‘유림숲의 현황으로는 팽나무 73본 중 고사목은 28본, 왕버들 3본, 상수리 5본, 회화나무 3본, 아카시아 16본, 해송, 느티나무, 벽오동, 이팝나무, 시무나무 각 1본 종이 남아 있다. 유림숲은 문화적, 정신적, 심미적, 치유적, 휴양적 가치 등 숲 자체로서 다양한 가치를 지녔다’고 기록한 바 있다.


-마을 수호림 유림 신조비(柳林 新造碑)...‘싱그럽던 옛 모습으로 다시 한 번 소생하소서“

유림숲을 없애고 포항 방면으로 뚫린 강변도로에 ‘유림마을’을 알리는 교통표지판이 유림숲의 흔적을 보여주지만 지금은 조그만 언덕에 새로 만든 비석만이 옛 모습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유림마을 주민들이 사라진 유림숲을 그리워하며 2002년 5월에 세운 ‘마을수호 유림 신조비’가 그것이다. 비석 왼쪽과 뒷면 등의 비문에는 유림마을 주민들이 유림숲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잘 드러나 있다.

새로 난 길은 예전의 숲을 삼켰지만 숲 안쪽에 위치해 개발의 화를 일시적으로 피했던 80여 가구 중 마지막으로 남았던 20여 가구도 2007년 허물어졌고 현재는 아파트가 들어서있다. 이 비석에서 강변을 따라 100여m 떨어진 곳에는 ‘유림 제단’이 있다. 비록 숲은 사라졌지만 마을주민들의 마음속 살아있는 유림숲을 그리며 마을의 안녕을 위해 제사를 모시던 장소다.

유림 신조비에는 ‘(초·중략). 아! 무상한 세월이여. 그 풍성하던 유림숲의 정경이여. 유구한 역사속에 현존하는 우리들과 영욕을 같이하던 우리 유림이여. 삭막한 우리들 가슴에 초라하게 상처받은 이 터 위에 싱그럽던 옛 모습으로 다시 한 번 소생하소서. 2002년 5월 유림동민일동 추진위원 혜강 박병용, 최영원 삼가 짓다’라고 새겨져있다.

↑↑ 2007년 유림 신조비에서 바라본 모습(최재영 대표이사 사진 제공).

-생활환경 보전림이었던 유림숲, 버드나무가 많아 ‘유림(柳林)’여러 문헌에서 기록하고 있어

‘경주풍물지리지’에 의하면 ‘유림숲은 갓뒤 서쪽 형산강의 가에 있으며 버드나무, 팽나무, 아까시 등으로 이뤄진 숲으로 특히 버드나무가 많아 유림이라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1938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의 임수(林藪)’에선 ‘유림은 경주군 황성리 소재로 연장 800m, 폭 평균 80m 내외며 하천변 평지다. 경주 읍내의 북서쪽 약 3㎞에 위치한 북천과 서천의 합류점의 하류, 서천의 동쪽 연안에 위치한다. 동쪽은 용수로를 설치해 넓은 황성리의 농경지와 연결했다’라고 하며 ‘수림 상태는 거목으로 팽나무, 왕버들 50주 내외가 있고 그 중 최대의 흉고 직경은 100cm다. 상류 남단에는 왕버들이 많고 북단에는 팽나무 등의 유령목이 있다. 하부에는 아카시아 혼효림으로 형성된 울창한 지대다’라고 기록했다.

또 ‘동경잡기’에 신라 38대 임금 원성왕(785~798) 시절의 ‘김현감호’ 이야기나 ‘임금님의 사냥’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이 지역 숲은 호랑이가 살았을 정도로 울창했으며 남녀 간의 사랑이 싹튼 숲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 2005년 당시 숲 안쪽에 위치해 개발의 화를 일시적으로 피했던 강촌의 집들(블로그 ‘빨간 여름’).

-강촌 숲마을의 정취 돋워...팽나무, 왕버들나무 등 수 백 년생 풍치림 무성하고 황어, 은어, 연어가 철따라 오르고 다슬기 지천으로 널려있어

유림 신조비에 표현된 유림숲의 개관(槪觀)이다. ‘숲의 규모는 지금의 보수문(堡水門)을 기점으로 북으로는 형산강 철교 북쪽 강전보에 이르렀고, 동서는 봇도랑으로부터 형산강 강변까지고, 봇도랑 빨래터에서 동서폭이 약200m이고, 그 면적이 2500평방미터(2500m²)에 이르렀다. 숲에는 팽나무(포구나무), 왕버들나무, 회나무, 녹개나무 등이 대종이고 수 백 년생 이상의 풍치림(風致林)이 무성하였고 형산강에는 황어, 은어, 연어, 모래무지 등의 담수어가 철따라 오르고 다슬기가 지천으로 바닥에 널려있어 강촌 숲마을의 정취를 돋우었다.

북천을 건너 황성공원숲 호림(虎林)을 지나 봉림(鳳林)에 이르러 멀리 동쪽에 간묘(諫墓), 지금의 계림중학교 뒤)가 있고, 길 따라 내려오면 수문조절장치 부근에 빨래터가 있었고 여기서 봇도랑다리를 건너 숲을 동서로 가로질러 형산강을 건너는 통나무다리로 현곡 금장리와 오류리로 교통했다. 한편 빨래터에서 강변북쪽으로 내려오면 철교 남쪽에 ‘ㄷ’자형의 돌담안에 동향으로 신목과 제단을 갖춘 당집이 있었다. 마을의 길흉사가 있을때면 신주께 고하고 절하며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23대 진평왕이 간묘(諫墓)와 나린당(임금님이 나리신 곳) 나원리로 통하는 경치좋은 사냥길이 이 숲길 이었을 것이다. 한편 빨래터 동편에 연자방아가 길 좌우에 있었으며 빨래터 서북간 50m 지점에 유림숲의 명물인 물래방아가 있어서 정감이 한층 더했다’

↑↑ 1997년 당시의 유림숲 현황도.

-유림숲 지키기 위한 노력들 다수, 간담회와 캠페인 통해 경주시의 개발 논리에 제동 걸었으나...,

이 숲을 지키기 위한 노력들도 많았다. 지난 1997년부터 지역 언론과 경주지역 시민단체에서는 여러 번의 간담회와 캠페인 등을 통해 경주시의 개발 논리에 제동을 걸었으나 결국 숲은 황폐화되었고 사라지고 말았다. 경주시도 유림숲 후계림 조성을 약속했고 유림숲 고목들을 이식할 것으로 약속했다고 한다.

본지 제327호(1997년 5월 29일), 제328호(1997년 6월 5일)에서도 각각 ‘유림숲 살리기 캠페인’과 ‘유림숲을 보호수로 지정하자’는 제목으로 지속적인 시민운동을 후원하며 적극 지지했다. 위기에 처한 유림숲의 원형을 복원할 것과 유림숲을 보호수로 지정 보존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경주환경운동연합과 시민들은 1999년 9월 유림에 대한 가치를 일깨우고 자연과 문화재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해 유림숲 고유제를 올린다. 유림숲 정령들에 대한 위로와 한 잔 술을 올리는 고유제였던 것.

‘유세차 기묘 9월 초 4일, 삼가 엎드려 유림숲의 정령들에게 한 잔 술을 올리나이다. 유림숲은 신라 진평왕 때부터 사서에 등장하는 1300년 된 유서 깊은 숲으로 서라벌과 함께 숨 쉬며 희로애락을 같이 해 온 숲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제 이 숲은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 망각의 저 편으로 사라져야 할 운명에 처했습니다. 신라 왕후장상을 비롯한 화랑들이 노닐었고 날아가는 기러기도 풍광에 취해 쉬어갔다는 금장대를 마주하는 이곳. 형산강을 거느리고 고고한 자태를 뽐내던 그대. 숲의 정령들이여. 앞으로는 숲과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자연친화적인 도시행정을 펼쳐가도록 끊임없이 감시하고 건의해 갈 것입니다’ -1999년 유림숲 고유제 제문 중 부분 발췌.
선애경 문화전문 기자 / 1450호입력 : 2020년 07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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