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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사월입니다...목월 선생의 고향 건천읍 모량리(牟梁里)에 다녀왔습니다

‘윤사월’의 고장 모량리… 보리농사 잘 돼 장관을 이뤘다지요
선애경 문화전문 기자 / 1441호입력 : 2020년 05월 28일
↑↑ 마을 곳곳에서도 ‘모량(牟良)’이라는 이곳 지명의 유래처럼 누렇게 보리가 익어가고 있다.

느끼시는가요? 올해는 봄이 유난히 길다는 것을요. 지난 23일, 윤사월이 시작됐습니다. 두 번째 사월을 맞이한 거지요. 목월 선생의 시 ‘윤사월’을 한 번 되새겨 보았습니다.

‘송화(松花)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사월이 다시 한 번 시작되는 시절, 이 시의 배경이 된 목월 선생의 생가가 있는 건천읍 모량리가 떠올랐고 선생의 시적 호흡이 영글던 고향 모량에 다녀왔습니다. 저절로 목월 선생의 시들이 맴돌았습니다. 모량2리에 있는 목월생가엔 보리와 호밀이 한창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코로나19로 더욱 적요해진 문학관에 숨통을 틔우는 황금색 물결이었지요.

 
↑↑ 하루 아홉 번 운행되는 버스.

하루 아홉 번의 버스가 다녀가는 시골마을 건천읍 모량리는 날것의 이미지가 강합니다. 꺼끌거리는 보리이삭의 그것인양 아직도 세련되지 못해 촌스러운 마을이죠. 그러나 모량리엔 100여 년 된 유서깊은 모량역을 비롯해 목월 선생의 생가, 독문학자 김연순 교수가 손수 일군 ‘베른하르트 문학관’, 1943년 설립된 모량초등학교가 있는 서정적이고 저력있는 마을입니다.

마을 곳곳에서도 ‘모량’이라는 이곳 지명의 유래처럼 누렇게 보리가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을은 다소 방만한 형태로 넓게 퍼져있는 형상이었습니다. 좁은 골목을 돌다보면 어느새 널찍한 골목이 나타나는 식이었지요. 수 십 가구씩 형성된 부락이 여러 곳으로 나눠져 있는 형태랄까요? 그래선지 이 마을의 도로명도 여럿이었습니다. 복원된 목월 생가로부터 양 갈래로 모량서당길, 행정길이 이어지고 모량2리길, 모량방내길, 모량하리길, 모량산막길 등으로 시골마을치곤 제법 구역이 나뉘어져 있는 편이었지요. 예전엔 모량에서도 3일, 8일 장이 섰을 만큼 큰 마을이었다고 합니다.

↑↑ 모량2리에 있는 목월생가의 정자 앞에는 ‘윤사월’ 시비가 서 있다.

-모량리(牟梁里)...보리농사가 잘 되어서 장관 이뤄 모량(牟良)이라고도 해

모량리는 신라 육부촌 중 세 번째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에 속했으며 ‘점량부(漸梁部)’, ‘모량부(牟梁部)’라 불리었다.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편찬할 당시(1280년경)에는 ‘장복부(長福部)’라고도 불렀다. 옛날 여름철이면 이곳에 보리농사가 잘 되어서 장관을 이뤘다고 해 모량(牟良)이라고 이름 지어졌다.

모량의 다른 뜻으로는 ‘큰 다리(松橋) 너머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라고도 한다. 1914년 일본인들이 나쁜 의도로 행정구역통합 시에 모량(‘毛良’)으로 불렸다가 1998년 지역민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확실한 고증과 사료를 바탕으로 지금의 모량리(‘牟梁’里)로 옛 이름을 되찾았다.

모량리에는 ‘행정(杏亭)’, ‘삼교(三橋)’, ‘안모량(內牟梁)’ 등의 자연부락명이 전해진다. ‘행정’은 약 300년 전 이곳 일대 어느 집이든 살구나무가 없는 집이 없을 정도여서 봄이면 살구꽃으로 뒤덮혔고 마을이 살구나무숲을 이루었는데 그때 살구나무 정자가 있다고 해서 ‘행정’ 혹은 ‘살구징이’라고 불리워졌다. ‘삼교’는 이 마을에 3개 방면으로 통하는 다리가 놓여 있어서였고 ‘안모량(內牟梁)’은 모량리 서쪽 산의 기슭에 있는데 모량리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어서였다.

↑↑ 마을 어귀에서 어르신들이 정담을 나누고있다.

-“이 골목서 우리 어릴 때는 보름날 풍물놀이 하고 줄다리기도 했습니다”

목월생가로 이르는 ‘행정길’에는 기념비가 하나 있었는데 ‘안길 포장 공사에 협조해주신 출향인과 주민여러분의 고마운 뜻을 이 기념비에 새긴다(1990년)’면서 여러 주민들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빙그레 웃음이 났다. 십시일반 주민들이 만든 도로 포장길을 걷는다고 생각하니 그 길이 더욱 살갑게 느껴졌다.

‘모량산막길’에서는 모량구판장을 만난다. 50여 년 됐다는 이 구판장은 얼마 전 주인이 바뀐 채 운영되고 있었다. 구판장 안에는 마을 주민 여럿이서 막걸리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생필품 몇 가지와 음료와 과자 몇 가지가 놓여진 이곳은 아직은 마을 주민들의 사랑방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구판장 앞에는 하루 아홉 번 운행되는 버스 시간표와 인근 영천 장날과 11곳의 경주시 전역 장날이 적혀있는 표가 붙어있어 정겨웠다.

↑↑ 보름날 줄다리기를 했을 정도로 넓은 골목.

마을 한복판에 위치한 마을회관 정자에는 ‘고향을 사랑한 가난했던 어느 소녀가!’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아마도 이 고장 출신의 출향인이 고향 어르신들 쉼터로 기증한 것일거라는 상상이 보태진다.
마당일에 한창이던 마을 주민을 만났다.

“예전엔 13반까지 있었을 정도로 컸던 마을이었어요. 지금은 6반으로 줄었다고 해요. 더러 빈집은 있어도 객지인들이 사들여놓은 상태로 알고 있습니다. 여전히 인심은 변함없고 토박이 어르신들이 주로 살고 계시지요”

“저는 열일곱살까지 이 마을서 살다가 객지로 떠났지요. 수 십 년 만인 최근에 다시 고향집으로 돌아왔어요. 낡았던 집이었는데 수리해서 지금은 단정해졌지요. 이제부터 고향에서 쭉 살겁니다”

이 골목은 시골골목치고는 유난히 길다랗고 넓었다.

“이 골목서 우리 어릴 때는 보름날 풍물놀이도 하고 줄다리기를 했을 정도였어요. 그때는 짚으로 새끼를 꼬아 만든 큰 동아줄로 당기곤 했지요”

↑↑ 마당에 가득한 꽃을 장날마다 내다판다.

-“경주시내서 40여 년 살다가 5년 전 이 마을 마당 넓은 집으로 이사왔어요”

모량방내길 골목을 걷다가 대문살 사이로 꽃들이 가득하게 보이는 한옥집을 만났다. 마당 가득히 온갖 꽃으로 꽉찬 집 안으로 들어가보니 주인 아주머니가 꽃들을 옮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가게 없이 바깥양반이 장날 다니면서 꽃을 가져다 팔아요. 경주시내서 40여 년 살다가 5년 전 이 마을로 이사왔어요. 꽃들을 펼쳐놓을 수 있는 마당이 넓은 이 집을 샀지요”

바로 옆에는 예전 축사였던 곳을 온실로 만들어 놓은 곳이 있었는데 겨우살이가 불가능한 꽃들을 이곳에서 월동 시킨다고 했다.

“예전에 우리 부부가 함께 일 할 때는 울산, 포항 등지로도 팔러 다녔지만 요사이는 남편 혼자 안강, 감포, 대단지아파트 등으로 돌아다니면서 팔아요. 3~4일 장사하고 하루 물건 하러 가다보면 세월이 후딱 가버려요”

↑↑ ‘베른하르트 문학관&한독문화연구소’.

-‘베른하르트 문학관 & 한독문화연구소’...주민들과도 유기적으로 소통

박목월의 생가와 이웃하며 모량하리길에 있는 ‘베른하르트’ 문학관(Thomas-Bernhard-Archiv)은 독문학자 김연순(93) 교수가 거주하던 집 모량재(毛良齋)에 문학관을 열었다고 한다. 거장 토마스 베른하르트(Thomas Berenhart 1931~1989)는 ‘독일 현대문학의 카프카’로 불리는 오스트리아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였다. 모량리 주민들과 유기적으로 소통하면서 어느새 주민들 마음속에 자긍심으로 자리잡고 있는 이 문학관은 작가의 조국인 오스트리아의 베른하르트 문학관 보다 3년 앞서 만들어진 문학관이다. 또한 그곳에서조차 보유하지 못한 희귀자료들을 소장하고 있어 학술적 가치는 대단하다고 한다.

↑↑ 박목월과 조지훈 선생의 첫 만남을 이어준 모량역.

-‘모량역’의 전설적인 일화...박목월과 조지훈, 두 거장의 첫 만남 이어준 매개체

모량리 마을을 한 바퀴 돌고서는 근처 모량역을 찾았다. 한 업체에 사무실로 임대를 한 역사 대합실은 창백해보였다. 언제나처럼 변함없는 역 플랫폼으로 기차 한 대가 지나간다.

모량역엔 전설적인 일화가 하나 전한다. 청록파 탄생의 초석이 된 박목월과 조지훈, 이 두 거장의 첫 만남을 이어준 매개체가 바로 이곳 모량역이었다는 것.

 
↑↑ 옛집들 사이로 신축 주택이 보인다.

일제강점기 암울했던 1940년대 어느 봄날 저녁, 서울서 내려오는 조지훈 시인과 건천의 목월 시인이 처음으로 만났다는 스토리를 안고 있는 역이다. 조지훈이 박목월에게 ‘목월(木月)에게’라는 부제가 달린 ‘완화삼’을 지어 편지 형식으로 보내게 되었고 목월은 그 화답시인 ‘나그네’로 응답한다. 이 시를 읽은 조지훈은 크게 감동하고 건천읍 모량리 박목월의 집을 방문하기 위해 모량역을 찾게 된다. 이에 목월은 플랫홈에서 조지훈의 방문을 환영하는 피켓을 들고 기다리고 이 두 거장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모량역이 다시 문학의 향기로 거듭 날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 모량역의 풍광과 역사(驛舍)가 아름다워 몇 년전 박목월 생가와 연계해 문화공간으로 바꾸려 시도해보았으나 용도변경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하니 안타까울 수 밖에.

 
↑↑ 야생 산딸기

지난 25일, 점심식사 후에 모량리를 찾았는데 주인을 잃은 앵두와 오디, 작고 실한 야생의 딸기를 따먹을 수 있어서 훌륭한 디저트로 손색이 없었다. 달디 달았다. 집집마다 낮달맞이, 패랭이, 접시꽃, 장미가 한창이었는데 뻐꾸기 소리가 유난히 선명했던 모량리였다. 그렇게 한참을 마을길을 걷고 있는데 지나가던 버스 한 대가 마을 승강장에 ‘끼익’ 섰다. 어르신 한 분이 짐 보따리를 들고 내렸다. 유년의 기억 한 자락이 겹쳐졌다. 건천읍 모량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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