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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포항에 목선(木船)은 없었다… 감포 목선(木船) 이야기 상(上)

감포 목선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지금도 배 목수 명맥은 이어져
선애경 문화전문 기자 / 1431호입력 : 2020년 03월 19일
↑↑ 감포조선소에서는 지금도 FRP선박 수리시 손상 부분에 대해 목재로 본을 뜨는 작업이 진행된다(사진 제공: 김용덕 선생).

목선은 선체(船體)를 목재로 만든 배다. 우리의 감포항에서도 1990년대까지는 목선이 건조되었고 주로 어획용으로 많이 이용했다. 목선은 건조가공이 쉬운 반면 주재료인 나무가 구조역학적으로 약하고 부식이나 마모가 빠른 편이다. 이런 연유로 합성섬유강화 플라스틱(fiberglass reinforced plastic:FRP)와 같은 재료에 밀려나 점차 줄어들어 지금은 그 자취를 감췄다. 감포 목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젠 더 이상 목선 만드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하물며 목선은 기억속에서의 한 자락 풍광으로나 존재하니 목선을 만들었다는 일도 잊혀진지 오래다. 고기잡이 배를 만들었던 목수들. 그들은 어떻게 살아왔을까.

감포에서도 목선 제작이 활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여러 차례의 수소문 끝에 2000년대까지 목선을 수리하던 복용주(70·감포 거주)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목선제작업에 입문해 배 짓는 일을 천직으로 여기고 일해온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또 감포조선소에서 FRP선박을 만들 때 본을 떠놓는 작업으로 목선 제작을 하고 목선 수리를 하며 명맥을 잇고 있는 기술자(김용덕 선생)가 있다는 사실은 ‘기록’의 가치로서 매우 진귀했다. 이들은 감포항의 오늘이 있기까지 현대사의 산증인 들이다.

그러나 감포읍 어디에서도 실제목선은 한 척도 볼 수 없었고 목선을 제작했던 당시 옛사진들도 구할 수 없었다. 목선도, 목선에 관련한 사진과 자료들이 거의 멸실 위기에 있었다. 그러나 3월 말경, 감포조선소에서 김용덕 선생이 FRP선박 수리에 목재로 본을 뜨는 작업을 볼 수 있어 현장 사진과 다채로운 이야기를 하(下)편에서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 현재 감포항에 정박해있는 어선들 중 목선은 한 척도 보이지 않는다.

-“자로 머리도 맞고 쥐어 박히면서 어깨 너머 보고 배웠습니다. 입문해 10년 만에 본격적으로 원품 일을 하고 제대로 노임을 받았지요”

복용주 선생은 감포읍에서 태어난 감포 토박이다. 예전엔 지금의 수협폐수처리장부터 해안선이 이어져서 조선소가 연접해있었고 그 조선소에서 배를 건조(建造)해 출항시켰다고 한다.

선생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간 한문을 익힌 후 열일곱에 이 일에 뛰어들었다. ‘조선(造船)일을 배워보라’는 권유 때문이었다. 당시 배 만드는 일은 바로 가르쳐 주는 예가 없었다고 한다. 입문하고 5~6년까지는 우선 목수일을 배워야했는데 연장을 갈아주고 심부름 하는 등 작업 보조로 허드렛일의 연속이었다. 도끼로 나무를 패는 작업을 하고 불을 때서 나무를 쪄내는 일을 도맡아서 했다. 일 년 내내 일을 해도 명절에 까만 고무신 한 켤레 얻어신는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월급도 없었다.

“5년이 지나니 월급이 조금 나아졌고 점차 제대로 본품을 맡아 일하는데는 약 10년이 걸렸습니다. 입사해 10년 만에 본격적으로 원품 일을 하고 제대로 노임을 받았지요. 꼬박 10년이 걸린 겁니다” 1977년경 20대 후반에야 목선 만드는 일에 본격적으로 합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 입문했을때는 기계(동력)를 쓰지 않고 돛을 달아서 바람만으로 운행하는 일명 돛단배로 조업을 했을 때였습니다. 일을 배울 당시엔 그런 배를 만들진 못하고 수리를 하곤 했습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 즉 선배님들이 선생님이었습니다. 자로 머리도 맞고 쥐어 박히면서 어깨 너머 보고 배웠습니다(웃음). 험한 일을 모조리 감수해야 했었죠”

↑↑ 배 짓는 일을 평생 천직으로 여겼다는 복용주 선생.

-배 한 척 만드는데 4~5인이 한 조가 되어 일하고 3~4개월 걸려// “감포항에는 대략 30여 척 정도의 목선 있었고 20여 명 기술자 있었습니다”

목선을 가장 많이 만들었을때는 1975년~6년경 전국적으로 슈퍼태풍이 지나간 뒤 목선들이 대거 파선된 해였다. 정부에서 보조해 5~6인이 타는 5톤급 목선(지금 조업하는 소형배에 해당하는 규모라고 함)을 만들라는 지시가 하달되자 감포에서도 목선 건조가 폭증했다.

“배 한 척을 만드는데 4~5인이 한 조가 되어 일하는데 3~4개월이 걸렸습니다. 나무를 켜고 대패질부터 함께 합니다. 아름드리 나무를 ‘편’을 친다고 하는데 쪼개는 작업이었습니다. 일 년에 몇 척 정도만 만들 수 있었지요”

‘도목수’는 배를 만들 때 전체도면을 그리고 배의 규모나 크기에 따라 자세한 골격을 만들어주던 이였다. 일하는 이들은 그 도면대로 일을 했다. 한 척을 만들다가 중도에 그만 두는 이는 없었다. 배를 완성할때까지는 함께하는 작업이었으므로.

감포읍내 목선은 대부분 감포에서 만들어졌고 감포항에는 대략 30여 척 정도가 있었다. 5톤 이상의 오징어 잡는배 등은 10톤, 30톤, 50톤(2~3척)까지 목선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목선을 만들었던 당시의 감포읍 기술자는 20여 명 정도였다.

-“나무를 곡면으로 휘게 하기 위해서 드럼통에 삶고 버너로 가열해서 붙였는데 그 공정이 무척 힘들었습니다”
“다같이 협업해 밑장(배의 바닥)을 만들어놓고 골격을 세우고 그 골격에 목재를 걸어 나무를 틀어 붙여야하는데 그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나무를 오므리기 위해서는 ‘이다’(나무를 켜서 송판 형태로 만드는 것)를 드럼통에 넣어 삶았죠. 또 나무를 부드럽게 곡면으로 휘게 하기 위해 버너로 가열해서 붙였는데 그 공정이 무척 힘들었습니다. 나무를 연결하는 식인데 한 장을 만들어 붙이는데도 쉽지 않았어요. 각 부분의 골격을 세운 뒤 윗 판을 걸쳐 조타실 등을 만들고 동력실에는 기계도 안착시킵니다. 목선에도 모터를 달아 조업했는데 당시 목선의 동력원은 중고자동차의 엔진을 떼다 배에 장착시켰어요. 이후 선박용 엔진이 따로 출시됐지요”

당시 목선의 주요 목재는 일본에서 생산되는 스기목이었다. 이 목재를 먼저 건조시켜야 했는데 이는 물에 들어가 목재가 팽창되어도 물이 덜 들어가게 함이었다.

“스기목 껍질도 유용했어요. 껍질로 새끼 꼬듯 꼬아서 목재의 틈 사이를 일일이 메꾸는 작업도 병행했거던요. 꼼꼼하게 목재 사이의 틈을 완벽하게 막아 누수를 막은 것이지요”

목선 수리는 조업하다가 암초에 부딪히거나 선박끼리 부딪혀 고치는 경우가 많았다. 큰 태풍이 올때는 정박선끼리 충돌해서 수리하는 경우도 있었다. 스기목을 사용해 수리하거나 이보다 얇은 목재로 수리하기도 했다.

“특히 선수(船首) 부분을 수리하는 것이 힘들었지요. 목재를 뜯어내고 다시 붙여야했거든요. 앞부분의 곡면을 수리할때는 목재를 비틀기도 하고 휘어주기도 해야해서 고난도의 과정이었습니다. 수리비용도 만만치 않았고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당시 배 한 척의 시세는 중소기업에 해당할 만큼 부자로 여겼어요. 선주는 재벌이었죠(웃음)”

↑↑ 속초 칠성조선소 목선의 예.

-2002년경 까진 목선 수리 간간히 했으나 FRP작업 병행할 수 없어 배 목수일 접어

당시 건축목수와 조선목수와는 차이가 났다. 일반 목수보다 이들의 자부심은 컸다. 감포읍내에서 고급기술자로 인정받았고 경제적으로 수입은 좋았으나 일이 규칙적이지 않고 줄어 선생은 1980년대 2~3년간 중동해외근로자로 다녀오기도 했다. 1970년 초반까지는 활황이었던 목선 건조가 점차 줄어든 것은 1970년 후반 즈음 이었다. 그러다가 90년대 초반에 FRP가 나오면서 목선은 점차 명운을 다한다.

“목선은 자주 수리를 해야 하고 조업을 자주하다보면 마찰이 생겨 물이 새는 경우가 많은데 비해 FRP는 내구성이 뛰어나다는 점이 각광을 받은 거죠. 그런데 FRP로 건조하기 위해선 어차피 목선으로 틀(모형, 본)을 만들어야 합니다. 목재로 틀을 만드는 일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지요. 저도 FRP작업과 함께 계속 배 만드는 일을 해보려고 했으나 FRP소재 자체가 화학소재여서 피부염으로 너무 고생해 도저히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1995년경 감포조선소 총책임자를 맡아 배를 상가(승가대에 배를 끌어올려 수리하는 일)시키고 선주들이 원하는대로 수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FRP작업을 병행할 수 없어 그 일 마저 접었습니다. 이후로도 목선 수리일은 있어서 2002년경까진 목선 수리를 간간히 했었지요”

“저보다 선배로는 팔순이 넘은 김용태, 김동만 선배님 등 10여 분이 계셨고 이후 저보다 아래로는 김용덕(67) 이라는 후배가 유일하게 이 기술을 잇고 있습니다. 지금도 감포조선소에서 FRP선박 수리 시 손상 부분에 대해 목재로 본을 뜨는 일 등을 하고 있습니다”

-“배를 진수하는 날이면 몇 개월 고생한 보람을 느꼈죠. 그동안 40~50척 목선 만드는데 참여했어요. 평생 천직으로 여기고 살았는데...,”
“배를 완성해서 진수(進水, 새로 만든 배를 조선대에서 처음으로 물에 띄움)할때가 가장 보람을 느낄때였지요. 고생은 했어도 고사 지내고 풍어제하면서 잔치가 벌어지곤 했습니다. 어떤 선주들은 고생 많았다면서 금반지를 해주거나 양복 한 벌이나 넥타이 핀을 해주는 등 선물을 주기도 했어요. 진수하는 날이면 몇 개월 고생한 보람을 느꼈죠. 뿌듯했습니다. 배 이름을 일일이 기억은 다 못해도 제가 참여해 제작한 목선으로 고기를 많이 잡았던 예도 많았었죠”

선생은 평생 40~50척의 목선을 만드는데 참여했다고 한다. 태풍이나 사고가 있었을때는 수리도 하면서 건조도 해야 하는 등 야간 작업을 할때도 많았다. 특정한 휴일 없이 거의 사계절 내내 일을 했고 비가 와야 쉬었다고 한다.

“주위에선 목선 일을 배우면 무형문화재가 될거라고 말했지요. 이 일 배울때 서러움도 많이 받았고 고생을 무지 했죠. 제가 하도 고생을 해서 후배에게는 제가 먼저 많이 가르쳐 주었고 빨리 전수했죠. 이 일을 평생 천직으로 여기고 살았는데 결국은 FRP 일을 병행하지 못해 2002년 본의 아니게 중단해서 지금도 안타깝고 한스럽습니다. 지금이라도 감포에서 활약했던 목선 기술자들의 경험과 증언을 바탕으로 감포항에 목선 한 척 세울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선후배와 함께 힘을 모아 작은 일조라도 하고 싶습니다”

2025년이면 감포항 개항 100주년이다. 개항 100년 역사에 맞춰 감포항의 상징물로서 멋진 목선 한 척이 항구에 정박해 있는 상상을 해본다.
선애경 문화전문 기자 / 1431호입력 : 2020년 03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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