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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경주 ‘시발택시’ 운전 시작해 30년간 경주 대중교통의 산증인 김유현 선생-“경주 구석구석 운행하지 않은 곳이 없었지요”

1960년~80년대 택시와 버스로 시골마을까지 쉼없이 종횡무진
선애경 문화전문 기자 / 1424호입력 : 2020년 01월 23일

건천읍 광명리에 살고 있는 김유현(76) 선생은 평범한 경주시민이지만 1960년~80년대까지의 경주 대중교통을 또렷하게 증언해줄 수 있는 산증인이다. 선생은 1960년대 채 스무살이 되기 전 당시로선 경주에서 유일했다는 ‘시발택시’ 소속의 택시기사를 시작으로, 1970~80년대 후반까지는 버스 운전기사로서 30여 년간 경주대중교통의 최일선에서 일했던 이다.

시민들의 발로, 경주 시내서부터 산골짜기 후미진 시골마을까지 쉼없이 종횡무진 운전대를 잡았던 것이다. 선생에게서 경주 대중교통의 지나온 이야기와 지금의 발전된 모습이 있기까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는 에피소드담을 들어보았다. 특히 진귀한 사진자료가 인상적이었는데 이제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자동차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간 선생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것에 연유했다. 1960년대 주유기와 택시사진들은 당시의 풍경을 소환해 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가 당시의 사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첨성대나 안압지 등에 있었던 사진사들에게서 찍은 것이라고 귀띰했다. 김 선생은 예전의 운전 경험 탓에 아직도 수동 기어식으로 특별히 주문제작한 자동차를 직접 운전하기도 한다. 기꺼이 성의를 다해 인터뷰에 응해주신 선생께 깊이 감사드린다.

↑↑ 1965년 ‘윌리스 베이비’라는 시발택시를 운행했는데 군용 지프 형태였다.

-약 8년 간 생산됐던 시발택시 중 한 대를 운전, 1960년대 경주에선 택시 9대 운행해

김유현 선생은 1961년(당시 17~18세) 경주역 앞에 사무실이 있던 택시회사 신진영업소에서 택시 조수로 출발해 1965년부터 택시운전기사로 일한다. 선생은 ‘윌리스 베이비’라는 시발택시를 운행했는데 처음 생긴 택시로 지프 형태였다.

‘시발’이라는 이름의 자동차가 생산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5년 이었고 1963년 말 시발자동차는 생산을 중단했다. 그때까지 시발자동차는 약 3000여 대가 생산돼 전국의 가로를 누볐다고 한다. 그때 시발택시는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었던 유선형의 자동차 형상들과는 다른 군용 지프의 모양으로 드럼통을 펴서 수공예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졌고 약 8년 간 생산됐던 시발택시 중 한 대를 선생이 운전했던 것이다.

경주의 시발택시는 쉐보레, 포드, 다찌 등 외제차 5대, 국내 시발택시 4대가 운행돼 총 9대의 택시가 경주시내에서 운행되었다고 한다. 시발택시는 경주에선 유일한 택시 회사였고 67~8년경 ‘경주택시’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새마을택시’가 생겼고 이후 협성택시 등이 생겼다고 한다. 한편 당시 주유소는 경주역과 팔우정 로터리 중간 지점에 있었는데 펌프식으로 좌우 회전시키면 땅속 오일탱크 속의 기름이 호스로 넘어와 주유됐다고 한다. 휘발유는 20리터에 250원이었다.

-1960년대 경주 시내 주요 관광지 택시 코스는 일명 ‘올코스’와 ‘중코스’로 나눠 운행, 주요 이용자는 외국인 관광객
“1960년대 가장 인기있는 택시노선은 역시 불국사와 석굴암이었습니다. 석굴암 등에서 일출(해돋이)를 보기위해 택시를 이용하기도 했는데 주로 외국인들이 불국사 호텔이나 여관에 숙박을 하고 미리 예약하면 저희는 선불을 받고 새벽에 손님을 모시러 갔었지요. 용케 멋진 일출을 보던 기억은 손에 꼽을 정도였어요”

당시 택시의 경주 시내 주요 관광지 코스는 일명 ‘올코스’와 ‘중코스’로 나눠 운행했는데 올코스는 경주의 대표유적을 전부 볼 수 있는 코스로 백률사를 시작으로 사면석불, 석탈해왕릉, 분황사, 황룡사지, 안압지, 반월성, 계림숲, 첨성대, 포석정, 삼릉, 무열왕릉, 김유신장군묘까지였다. 올코스 택시비는 900원이었고 여기에 불국사까지 가면 추가 요금 250원이 더 책정되었다고 한다.

이에 비해 중코스는 분황사, 황룡사지, 안압지, 반월성, 계림숲, 첨성대까지로 요금은 600원이었다. 외곽 고적지는 가지 않고 도심권 내 유적에 한하는 상품이었다. 한편 도심권 시민들의 택시 이용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주로 택시 이용자는 국내외 관광객이었고 다른 한 부류는 산판(나무를 찍어 내는 일판)에서 흥정하던 사람들(일명 ‘송충이’로 불림)이었다. 당시 그들은 산판을 찾아 흥정하기 위해 택시를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소위 나뭇꾼들을 태워 청도 운문사, 산내면 우라리와 대현리, 양남면 석읍리 등 경주 외곽의 깊은 산골짜기로 많이 다녔었지요. 불국사나 좋은 고적지엔 기생이 있는 고급 술집이 많았고 그 손님들은 고급 자동차를 이용해서 택시를 이용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 (우)드럼통을 펴서 만들었다는 시발택시 안에서.

-1968년 권태룡 경주시장의 관용 자가용 운전기사로 일하기도...1970년부터 ‘동마교통’ 소속 버스운전기사로는 약 20년간 일해

선생은 해병대를 제대하자마자 경주지청 검사의 자가용 운전기사로 잠시 일했는데 다른 지역으로 발령이 난 검사가 추천해 1968년 당시 권태룡 경주시장의 관용 자가용을 운전한다. 경주시장의 관용차량은 미군이 운행하던 차를 개조한 지프차량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경주시장의 운전기사로 유명세를 날리기도 했었던 그에게 뜻하지 않은 시련이 닥쳐온다. 1969년 4월, 그의 나이 26세때 육영수 여사 일행의 불국사와 석굴암 시찰 환영식에 참석하기 위해 경주시장과 다녀오다가 8톤 트럭과 충돌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워낙 큰 사고인지라 사고 상황은 처참했다. 경주시장은 물론 선생도 머리를 크게 다쳐 사경을 헤매다가 기적처럼 구사일생 했다고 한다.

경주시장이 오랜 병원 생활로 궐석이 되자 당시 포항시장이었던 배수광 시장이 경주시장으로 취임했다고 한다. 이 사고 이후엔 시청에 재취업이 되지 않아 고적감시원으로도 생활하다가 1970년 29세때부터 동마교통 소속 버스운전기사로 약 20년간 일하게 된다.

↑↑ (좌)경주역 앞에 세워진 관광버스를 배경으로. (우)1960년대 펌프식 주유기 앞에서.

-“1970년대 손님이 가장 많았던 황금 버스노선은 안강기계, 입실석계 노선, 봄 가을철엔 불국사가 최고의 황금노선”

1970년대 버스는 지입제(개인이 차량, 기계 따위의 소유물을 가지고 업체에 소속)로 차주가 있었다. 지입제 시절, 성건동 구미정미소 사장이 구입한 동마교통 버스 2대 중 한 대를 5년간 운행했는데 그 버스는 직영화 이후에도 2년을 더 운행했다. 대형 버스가 도입되기 전 동마교통 초창기에는 16인승 마이크로 버스가 십 수대 있었는데 1972년 대형 버스가 활성화 되기 전까지 운행됐다고 한다.

버스 지입제 시절엔 운전기사, 조수, 차장(안내양)이 동승해 항상 3인 1조의 운행이었다. 이 3인은 서로 마음이 잘 맞아야 했고 선생은 운행하던 버스를 수리해가며 깔끔하게 관리했다.

운전실력도 우수하고 버스를 아끼며 관리하는 운전기사와 함께 조수도 등급이 있어서 훌륭한 기술을 보유한 조수는 차주들이 욕심을 내 영입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조수는 맨 뒤에 앉아 동승하며 버스 정비를 맡았고 차장은 미혼의 여성들이었다. 결혼해서 차장을 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그런 사실을 숨겨야만 했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976년 직영화 이후부터는 조수가 없어지고 차장과 운전사만 버스를 운행한다. 이후 1987년 즈음에는 조수마저 사라지고 운전사만 운전하는 시기가 온다.

“버스가 고장 나면 운전사와 조수가 밤늦게까지 차 수리를 전담했습니다. 고통이 심했지요. 그 고생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근무조건도 한 달에 28일 정도로 쉬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였어요. 잠도 겨우 5~6시간 밖에 잘 수 없었고요. 그때는 배차 시간이 길어 잠시잠시 쪽잠을 청해 겨우 피곤을 덜었습니다. 당시 버스기사들의 처우가 워낙 열악해 저 뿐만 아니라 다들 힘들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노선은 지금과 유사하지만 배차요원이 불국사, 아화, 기계, 봉계, 석계 등 배정해주는 대로 곳곳을 순환하면서 운전했다고 한다.

“경주 구석구석 운행하지 않은 곳이 없었을 정도였어요. 당시 경주 시내권은 사람이 크게 이용객이 많지 않아 한 바퀴 도는 정도였고 동천은 거의 사람이 살지 않아 노선 배정도 거의 없었습니다. 손님이 가장 많았던 황금 노선은 안강·기계, 입실·석계 노선이었습니다. 그러나 봄 가을철엔 불국사가 최고의 황금노선이었습니다”

“그때는 손님 이외에 큰 짐들이나 짐승도 버스에 태웠는데 따로 짐의 크기에 따라 운임을 받았습니다. 짐을 싣는 것은 힘 좋은 조수의 몫이었지요. 그리고 지금이야 도로 환경이 좋은 편이지만 당시는 주로 비포장이어서 버스 펑크 사례가 가장 많았습니다. 펑크(빵꾸)가 나면 운전사와 차장, 조수는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우선, 차량의 미끄러짐을 방지하기 위해 큰 돌로 고정시키고 승객들은 그대로 태운 채 대형 ‘쟈키(차량을 들어 올리는 기구)’로 버스를 들어올리고 조수는 타이어를 빼고 새로 갈아 넣었죠. 불과 3분여 만에 해결하곤 했습니다(웃음)”

그간 버스회사의 판도도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1970년대 당시에는 한일영업소, 신진영업소, 동마교통 본사 등 세 곳의 버스회사가 있었다. 직영화 이후 동마교통이 무리하게 확장하다가 부도가 나자 천마교통이 동마교통 50여 대 전부를 인수하게 되었으나 신진영업소가 후일 모든 버스회사를 인수해 통합하고 오늘의 금아교통에 이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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