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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화유산 산재한 황오동 철도관사마을-황오동 철도관사촌… ‘경주 속 근대 경주’로 도심의 소중한 자산

근대문화 정취 느낄 수 있어, 도시재생으로 새로운 활력을
선애경 문화전문 기자 / 1408호입력 : 2019년 10월 04일
↑↑ 황오동 철도관사촌 내 33호 관사(원효로 남쪽)에서 살고 있다는 김홍덕 씨.

황오동 경고지하도를 건너 양쪽 대로변에는 ‘관사참기름’, ‘관사탕제원’ 같은 다소 색다른 상호가 보인다.  이들 상호가 암시하지만, 대로변(원효로 북쪽과 남쪽) 양쪽 안마을에 70~80년 된 철도관사촌이 형성돼 오늘에 존속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황오동 철도 관사는 일제강점기 경주역에서 근무하던 철도원들을 수용하던 대규모 주거 단지였다.
조선철도주식회사 소속 사설철도였던 울산 경주간 41㎞의 경우 경동선(1921년 10월 개통)이 1935년 6월 표준궤 개수에 착수되었다. 이듬해 12월 준공해 동해남부선으로 운행을 시작하는데 부산과도 연결됐다.

↑↑ 왼쪽부터 도시재생뉴딜사업이 진행되는 황오동 철도관사 마을.

이어 포항 경주간도 표준궤로 개축돼 동해남부선이 확장됐다. 당시 경주역은 부산 철도국 관할로 조직체계는 역이었다. 기관차사무소, 보선사무소, 승무원 및 독신자 합숙소, 객화차분소, 전기분소, 배급소 등과 동해선의 경주철도 집단 관사 40여 동이 건립됐다.

황오동 관사는 위치나 규모 등으로 봤을 때 울산~경주 표준궤 완성시에 오늘날 경주역과 함께 조성된 배후 주택지다. 일본 현지의 주택이나 지역에 남아있는 다른 적산가옥과는 다른 형태의 관사는 색다른 적산가옥의 형식을 지니고 있었다. 오랫동안 지역 주민들에게는 원효로 북쪽은 ‘뒷관사’, 원효로 남쪽은 ‘앞관사’로 불렸다. 지역의 어르신들에게는 경고지하도 철도관사로 통한다.

대개의 집단관사는 박공지붕을 이고있는 70~80년 된 집들이었다. 일본식 마루와 회랑, 다락도 고스란히 간직한 집이 아직도 여러채 남아있었으나 리모델링된 상태이거나 부속건물 설치로 원형을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가 대부분이었다. 단독 관사도 보였지만 박공지붕이 두 채씩 길게 이어져있고 크고 작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으며 몇 가구가 이어져 살고 있는 형태도 있었다. 이국적 건축 양식이 남아있는 이곳 관사 골목은 타임머신을 타고 근대로 회귀하는듯한 감성을 일깨워 준다. 고대 경주에 가려진 근대 경주의 모습을 간직한 이곳 황오동 관사마을은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 당시 관사의 번호가 남아있는 집 36호

한편, 황오동 철도 관사의 가옥배치, 등급별 공간 구성 등에 대해선 이철영의 ‘일제시대 철도 관사 제도 연구(1996)’의 연구 논문을 참고했다.

그리고 황오동 관사마을이 유래된 시기와 배경, 마을 구조에 대해서는 국내 철도관사 단지를 전문적으로 탐방하는 블로거 ‘성산지기’ 김구현씨의 자료(2017년 황오동 관사마을을 탐방한 자료)를 참조했다. 향후 이 구역에서 이뤄질 도시재생사업의 계획은 경주시 도시재생지원센터를 통해 알아보았다.

↑↑ 2호 연립으로 지어 잘 보존된 집.

-철도관사... 1930년대 중반부터 건립에 착수했으며 평평한 대지위에 2호 연립의 격자형으로 배치하고 필요성에 따라 등급제로 관사 배당해

먼저 이철영의 ‘일제시대 철도 관사 제도 연구(1996)’의 연구 논문에서는 철도 관사의 건립배경을 이렇게 밝혀놓았다. ‘일제주택의 유입과정에서 생성된 관사제도는 주택난 해결과 업무의 능률화 외에 한인과의 격리 거주를 통해 그들의 우월성을 나타내려는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실시되었다’ 라고. 이 연구에서는 또 ‘철도 관사의 특징 중 하나는 등급제이며 이는 임시군용철도감부에서 관사를 3등부터 8등으로 설정하는 기준설계안을 마련해 이 중 일부를 실시하면서 시작되었다. 각 역에는 필요한 등급의 관사가 시설됐다. 경주는 일제강점기 철도 분기점으로 대규모 관사가 건립됐다. 집단 철도관사의 배치 형식은 방형의 평평한 대지위에 2호 연립의 단위 주호를 격자형으로 배치했다.

주거 단지 중앙부에 주도로를 놓고 2호 연립의 주호 사방으로 6미터 넓이의 도로를 둘러 접근성이 높은 가로망을 형성했다’고 한다. 경주의 경우 경주역사에 인접해있었는데 ‘당대 경주철도역 건축분소장 직책을 지냈던 현지 주민 이정우씨의 증언에 의하면 1930년대 중반부터 건립에 착수했으며 해방 전까지 건립된 관사수는 80여 호에 이른다’고 밝히고 있다.

또 주택 재료나 구조에 있어서도 건립 시기에 따라 차이가 난다고 하면서 먼저 건립된 북측관사의 경우 외벽은 일본에서 들여온 삼목을 사용해 판벽으로 사용했다면 후에 지어진 남측 구역 관사는 방한 및 방화를 고려해 외벽을 몰탈뿜칠로 마감한 등속이 다르다고 했다. 한편 경주관사의 평면유형은 6등급, 7등급 갑과 을, 8등 관사 등 4종이었다. 이는 철도 공무원의 직급이나 가족수에 따라 차등 배분하기 위한 고려에서 나온 곳으로 추정한다.

등급별 관사의 배치는 단지 중앙의 동서도로를 중심으로 등급별로 차등배치했는데 북서측 구역에는 8등 관사를, 원효로 남쪽 구역에는 7등 갑(甲)과 7등 을(乙) 관사를 2호 연립으로 묶어서 배치하고, 북동측 구역에는 7등 관사와 역장 관사인 단독 6등 관사를 배치했다고 한다. 6등급은 당시 역장과 각급 분소장에게 배당되고 25.7평 정도였으며 7등급 갑과 을 관사는 각급 장 아래 조역이나 주임에게 배당됐으며 갑은 20.8평, 을은 18.9평 정도로 가족의 수에 따라 적합한 주택이 배급됐다. 8등 관사는 14.5평 정도로 가장 규모가 작은 관사로 일반 계원들에게 공급됐다.

↑↑ 원효로 북쪽의 6등급 관사로 당시 경주역장이 살던 집.

-“당대 관사촌의 틀이 고스란히 유지되고 있는 편, 다수의 가옥들이 주민들의 순수한 주거 목적으로 이용되는 곳”

블로거 ‘성산지기’ 김구현씨의 자료에서는 황오동 철도 관사의 조성시기를 1936년 전후로 추정한다고 하면서 한지영의 경주 황오동 관사 연구(1993)에서도 건립시기를 1934~35년으로 밝히고 있다고 했다. 표준궤 완성시 집단관사의 규모나 오늘날 현존하는 옛 가옥의 수효를 보더라도 가로망을 비롯해 당대 관사촌의 틀이 고스란히 유지되고 있는 편이라면서 경주를 찾는 관광객의 동선에서 동떨어져 지역에서 이렇다할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경주역 남동쪽에 바로 연접해있는 관사촌은 경주시가지를 횡단하는 원효로가 가르고 지나가 관사 단지를 남북으로 가르고 있다. 동서와 남북으로 놓인 주도로가 십자로 교차하며 관사 영역을 넷으로 나눈다.

증언에 의하면 원효로 북쪽 지역이 먼저 건립되고 후에 남쪽으로 확장됐다고 한다’면서 당초 가옥수는 40여 동(80세대)이었다고 밝혔다. ‘과거 역에서 관사로 오갈 때 넘던 건널목은 지금은 지하도로 바뀌었다. 한편, 황오동 관사는 전쟁 통에도 가옥의 소실 피해가 많지 않았다. 현재 7할 정도가 현존해 보존율이 높은 편’이라고 했다.

그는 또 ‘오늘날 남아있는 원효로 남쪽 지역은 17곳으로 양쪽 다 남은 집은 10곳, 한쪽만 남아있는 집 7곳이고 원효로 북쪽 지역도 17동의 관사가 남은 것으로 집계되었고 양쪽 다 남은 집은 9곳, 절반이 남은 집은 6곳, 단독형이 1곳이며 또 승무원 합숙소의 일부로 보이는 흔적까지 나타났다’라고 밝히며 ‘황오동 관사마을은 재건축은 흔하지 않으나 증개축이 유난히 두드러져 가옥이 고밀도로 얽혀있고 절대 다수의 가옥들이 주민들의 순수한 주거 목적으로 이용되는 곳이다. 이것이 황오동 관사촌의 대표적 특성’이라고 했다.

↑↑ 독신자 합숙소 혹은 승무원 기숙사로 추정되는 관사.

-간혹 당시 건물이 지어진 관사의 번호가 아직 남아있는 집들도 보여

원효로 북쪽에는 6등급 관사가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것으로 보이는 가옥이 두 채 있다. 현재는 워낙 변형이 많아 각각의 관사가 몇 등급인지 사실상 파악하긴 어렵다. 시 관계자는 “변형은 되었지만 지붕의 형태와 작은 창문 등이 갖춰져있는 등 기본족인 골격을 가진 집들을 관사로 분류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 관사 중 한 채는 최근 골조만 남겨두고 공사중인 곳도 있었고 옛 역장의 관사였던 9호는 원형을 그대로 보존한 채 신중하게 리모델링 중인 곳도 있다. 이 6등급 역장 관사를 중심으로 주변에는 근로자 숙소로 추정되는 관사가 기역자로 길게 지붕이 이어져 있다. 다닥다닥 연이어 지어진 이 관사들은 현재는 여러 소유자로 각기 주인이 다르다고 한다.

간혹 당시 건물이 지어진 집의 번호가 아직 남아있는 집들도 몇 채 보였다. 이들 관사촌에는 세입자가 원주민들과 세입자가 많이 살고 있는데 그들 중 세들어 사는 외국인 근로자들도 많다고 한다. 원효로 남쪽 앞관사에 살고있는 김홍덕 전 통장의 집은 33호였다. 원효로 북쪽 관사 중 합숙관사의 한 집에서 50여 년 살고 있다는 주민과 관사에 살다가 개축해 이곳서 53년째 살고 있는 주민들의 대화에 잠시 끼어들었다. 주민들과 대화를 이어가던 중 철커덩 거리며 지나가는 기차소리는 우리들 이야기에 한동안 오버랩 되었다.

↑↑ 당시 관사의 번호가 남아있는 집 9호

-동해선의 경주철도 집단 관사 40여 동 건립, 근대문화자산 활용한 사업발굴 가능한 지역

70여 년이 지난 현재에도 당시 이뤄진 도로망은 그대로 존속되고 있으나 도시화로 주도로변의 관사들 대부분은 헐리고 2~3층 규모의 상가건물이 신축됐다. 단위 주호들은 외곽에 담장을 두르거나 부속사를 증축해 폐쇄감이 상대적으로 커졌다.

경주시 도시재생지원센터는 ‘관사촌은 일제강점기 경주역과 함께 조성된 관사, 목조 전봇대 등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어 근대문화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구역’이라고 하면서 ‘근대문화유산과 생활자산이 산재해있어 일제강점기 경주역과 역사를 함께한 근대문화유산인 관사를 간직한 차별화된 경주의 모습을 만날 수 있어 근대문화자산을 활용한 사업발굴이 가능하다’고 전망했다.

또 ‘경주시 관내 거주지로서 입지가 양호하나 건축물, 기반시설 노후 및 정비부족으로 낙후된 지역이미지가 팽배해 있다’면서 시는 국토교통부의 도시재생사업 공모인 ‘일상이 여행이 되는 마을, 1918 뉴라이프 마을’ 사업을 준비해 마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도록 지속적인 사업을 추진중이라고 했다. 본격적인 도시재생 뉴딜 사업이 코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선애경 문화전문 기자 / 1408호입력 : 2019년 10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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