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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와 월성이 본적인 우리 지역 서훈(敍勳) 독립유공자 53인-독립유공자 53인, 더욱 선양하고 서훈되지 못한 선열 발굴 조명해야

우리 지역 독립유공자 서훈 중 건국훈장 애국장이 가장 높아, 선열들 공훈 균형있게 평가돼야
선애경 문화전문 기자 / 1397호입력 : 2019년 07월 04일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애국선열들을 더욱 생각하는 요즈음이다. 우리 경주에서도 제대로 된 평가 없이 홀대받아 온 선열의 명예를 선양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자 우리 후대가 해야 할 책무일 것이다. 풍찬노숙(風餐露宿)했던 독립유공선열들을 소홀히하고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도리가 아닌 것이다.

2019년 현재 기준으로 국가보훈처가 서훈한 독립유공자는 1만 5511명이다. 그 중에서 국가보훈처 및 경주남부보훈지청에서 파악한 우리 지역 독립유공자는 모두 53인이었다. 그분들 모두 그 공훈이 골고루 평가되고 기억되어야하지만 후손의 영향력이나 역할에 따라 공훈이 다르게 알려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매우 늦은 일이지만 지금이라도 고귀한 53인의 공훈은 물론, 아직 서훈되지 못한 유공자들이 더 늦기전에 발굴돼 조명되길 바래본다. 경주와 월성이 본적인 53인의 독립유공자들은 ‘건국훈장 애국장’이 가장 높은 서훈으로 나타났다. 애국장은 모두 11인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이육사 선생이 애국장인 것을 감안하면 그 공훈을 짐작할 수 있다. 먼저, 본적이 월성군인 유공자 10인 중 건국훈장 애국장은 7인(국내 항일 김봉규, 중국방면 김종철, 임시정부 손진형, 의병 이순구, 국내항일 장경탁, 문화운동 정내영, 국내 항일 정수기 선생)이었고 건국훈장 애족장이 2인, 대통령 표창이 1인이었다. 본적이 경주인 43인 중 건국훈장 애국장은 4인(의병 이두만과 의병 이판득, 의병 조근만, 국내 항일 허장환 선생)이었고 애족장이 24인, 건국포장이 5인, 대통령 표창이 10인이었다. 이번호에서는 서훈 등급이 높은 ‘애국장’을 수훈하신 분들의 간략한 공적만 요약했다. 이하 애족장, 건국포장, 대통령 표창을 서훈 받으신 분들은 이름만 밝혀둔다. 앞으로 지면이 허락되는대로 독립유공자 선열들에 대해 한 분 한 분 더욱 자세하게 보도하고자 한다.

한편, 경주시에서는 ‘경주의 항일 정신과 독립운동가들’이라는 주제로 오는 11월 학술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우리지역의 항일정신과 독립운동가의 업적 및 역사적 사실을 재조명해 애국 선열들의 명예선양과 그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하고자 함이다.

-본적이 경주와 월성으로서 서훈된 독립유공자는 53인, 우리 지역에선 ‘건국훈장 애국장’이 가장 높은 서훈이며 11인이 애국장 서훈
독립유공자는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말한다. 일본의 국권 침탈(1895년)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본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한 공로로 건국훈장, 건국포장 또는 대통령 표창을 받은 이다. 훈격의 종류는 건국훈장, 건국포장, 대통령표창으로 나뉘어진다. 건국훈장은 다시 대한민국장(1등급), 대통령장(2등급), 독립장(3등급), 애국장(4등급), 애족장(5등급)으로 나눠지며 이하 건국포장, 대통령표창의 훈격으로 분류된다. 국가보훈처에 의하면, 서훈 등급 보훈 심사 기준은 전문 학자들이 우선 심사한다고 했다.

옥고의 정도, 독립운동 활동 기간, 활약 공적 등을 기준으로 보훈심사위원들이 심사해 정해진다고. 그 중 본적이 경주와 월성으로서 서훈된 독립유공자는 53인이다. 경주남부보훈지청 관계자는 “국가보훈처에서 경주지역 독립유공자를 경주시와 월성군으로 나눠 기록한 것은 1955년 경주읍이 경주시로 승격되고 외곽 읍면 지역이 월성군이 되면서 당시 유공자의 호적상 본적에 따라 경주와 월성으로 나눠진 상태 그대로 표기 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 53인은 다음과 같다.

김만득, 김봉규, 김종철, 서달수, 손진형, 이순구, 장경탁, 정내영, 정수기, 황병기, 김기도, 김두오, 김민환, 김봉식, 김성권, 김성길, 김세종, 김은충, 김일성, 김재호, 김종호, 김철, 김학봉, 김화섭, 박문홍, 손동창, 손문익, 손석봉, 손시헌, 손진창, 신동하, 양태원, 이대백, 이두만, 이무범, 이석채, 이인석, 이중근, 이치용, 이판득, 이홍석, 정을기, 조경규, 조근만, 채순봉, 최명표, 최상제, 최성렬, 최수창, 최완, 최준, 최해수, 허장환 선생이다.

한편, 유공자 후손 확인 절차는 독립유공자와 후손의 관계를 입증할 수 있는 서류를 국가보훈처 또는 주소지 관할 보훈청으로 제출하고 신청자가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 확인되는 경우 훈장을 전수한다. 훈장 전수후 보훈처에 유족 등록 신청서를 제출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에 인물 사진이 게재돼 있는 분들만 모았다. 위에서부터 김기도, 김민환, 김봉규, 김재호, 김종철, 김학봉, 김화섭, 서달수, 손석봉, 손시헌, 신동하, 이홍석, 채순봉, 최상제, 최수창, 최해수 선생.

-아래에선 경주와 월성이 본적인 독립유공자 중 서훈이 애국장인 11명을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독립유공자공훈록은 공적조서를 바탕으로 독립운동 기간의 공적 및 주요 활동의 역사적 사실을 전문가의 집필을 통해 책으로 발간한 내용이다. 단, 공적 심사 이후 학술 연구 등을 통해 추가 확인된 내용은 수록돼 있지 않음)’에 근거한 기록을 바탕으로 소략했다.(가나다 순).

-김봉규 선생(1892~1968), 국내 항일
1919년 3·1독립운동 때 향리에서 시위에 참여하였다. 1920년 송두환, 최윤동, 이수영 등과 같이 대구 일대를 중심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군자금 조달활동을 전개했다. 일반국민으로부터 직장인, 부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그 대상자를 정하고 경남 합천 의령지방에서 활발히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때 임정군자금 모집원을 미행하던 의령서의 일본경찰 갑비(甲斐)가 그와 김종철을 체포하려 하자 동지 김종철이 일경을 사살하고 함께 도피하였다. 그 후 체포되어 1924년 징역 4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김종철 선생(1888-1941), 중국방면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만주 봉천으로 가서 동지 송두환, 최해규 등과 의용단에 가입하고 군자금 모금차 국내로 돌아왔다. 1920년 동지 김봉규와 경남 일대에서 활동하며 일경에 피체되었으나 만주로 탈출한다. 이어 상해로 가서 의열단에 입단하고 상해·만주 등지를 왕래하면서 1928년까지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손진형 선생(1871~1919), 임시정부
1905년 이강년 의진에 참가해 좌종사부에 소속되어 일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1912년 이용규 등과 민족운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경주경찰서에서 4개월간 구속돼 고문을 감수한 후, 특사로 석방되었다. 1914년에 만주로 망명,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15년에는 은밀히 귀국해 국내정세를 조사하고 군자금도 모집하였다. 1916년 밀정에 속아 체포돼 울릉도에 유배되었다가 1918년 석방되기도 한다. 1919년 상해에서 김창숙을 도와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에 적극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교통위원으로 선출돼 독립운동의 기본 방략을 세우기도 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두만 선생(1887~사망년도 미상), 의병
1907년 정미의병항쟁이 시작됐던 당시 선생은 그해 7월경 이석조 의진에 들어가 활동했다. 1908년 이석조 의병장의 지휘 아래 청도군 정자동에서 동장으로부터 1백 원을 모집하고 방기동 이반설의 집에서 일본 지폐 2백 원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이순구 선생(1884~1983), 의병
1906년 정용기, 이한구의 산남의진(山南義陣)이 조직되자 이에 입대해 주로 통신과 정찰의 책임을 맡고 의진 밖에서 이세기, 남우팔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활약했다. 의병장 정용기가 순국한 후 그의 부친 정환직이 의진을 통솔하게 되자 그 막하에서 활약하던 중 1908년 의성 구봉산에서 적과 접전하다가 다리에 총상을 입고 불구가 된다. 1912년 만주에서 광복회에 가입하여 활약했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이판득 선생(1875~1908), 의병
선생은 1908년 경주에서 의병장으로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본군에게 체포돼 순국한다. 1907년 일제는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항쟁은 한층 치열해진 가운데 경주 지역은 산남의진의 활동 영역이었다. 선생은 경주군 외동면 괘릉동에 거주하면서 소규모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활동하고 있었다. 1908년 군자금 모집 활동 등을 하다가 외동면 괘릉에서 체포돼 경주로 호송 중 순국한다. 201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장경탁 선생(1923~1945), 국내 항일
선생은 1939년 16세의 소년으로 조국광복을 위해 북간도로 이주, 항일독립운동에 참가하였으며 1942년 국내에서 항일민중봉기를 일으킬 목적으로 귀국하였다. 1942년 함북 아오지탄광에서 광부들을 규합하여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지하공작을 펴던 중 1944년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일경의 가혹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독립의지를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1944년 징역 4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고문의 여독으로 1945년 옥중 순국한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정내영 선생(1900~1961), 문화 운동
1920년 송두환, 김종철, 최해규, 정동석, 김봉규 등과 경북 제2유림단 의거에 참여해 독립운동의 군자금 모집을 했으며 1924년 징역 1년 6월형의 언도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중국과 국내를 비밀리에 다니면서 계속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정수기 선생(1896~1936), 국내 항일
1922년 독립운동에 참가할 목적으로 북경 의열단 고문인 김창숙을 찾아가 독립운동을 위해 황무지를 개간해 그 이익금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계획을 가졌다. 이 계획을 수행하기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1923년 손후익과 함께 국내에 돌아왔다. 선생은 1923년 4월부터 경북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1925년 다시 독립군 양성을 위한 거액의 군자금 모집계획을 지시 받고 경북 일대에서 활동을 계속한다. 1925년 서울 남산공원에서 손후익, 이재락 등과 자금 마련을 위해 수차 회동한다. 선생은 안동, 영주, 봉화 지방을 맡아 활동하다가 1927년 만주로 피신하였다가 동년 8월 김창숙과 함께 수감되었다.1928년 징역 2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고문으로 인해 불구의 몸으로 출옥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조근만 선생(출생연도 미상~1908년), 의병
1907년 9월부터 10월까지 경주, 자인 등지에서 마중군 등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의병 활동을 전개하다 체포돼 순국했다. 1907년 마중군, 탁영조 등과 함께 무기를 휴대하고 경주군 후초에서 군자금 300원을 모집하였고, 동년 음력 10월 무기를 휴대하고 자인군 섬림의 이장으로부터 군자금 250원을 모집한다. 그 외 경주군 서면 아화시장에서 우편부를 처단하고 우편물을 빼앗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1908년 강도살인죄로 교수형에 처해져 상고했으나 1908년 기각당해 순국했다. 201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허장환 선생(1896~1946), 국내 항일
선생은 1919년 7월 중 독립군과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제주도로 건너갔다. 제주도민에게 ‘블라디보스톡에서 독립군 20만을 양성하여 9월중 국내로 진격해 조국을 독립시킬 계획이나 아직 7만 명이 부족하니 협조를 부탁한다’고 했다. 1919년 8월경, 군자금과 여비를 구하기 위해 활동하는가하면, 1919년 체포되어 징역 1년 2월을 받고 1921년 4월 출소한다. 선생은 신간회에 가입해 활동하고 경주청년동맹 양북지부에서 활동하다가 1928년 체포되었다. 1929년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 1932년 3월 출소하였다. 다시 1933년 경주적색농민조합 김두오에게 사회운동의 실천방법을 지도하는 등 야학활동으로 체포되었으나 1935년 석방되었다. 200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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