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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아라키 준 박사가 연구한 일제강점기 경주의 민족운동

경주 3.1만세운동은 금관유치운동, 환등회로 이어지는 ‘도화선’…꺼져가는 민족의식과 민족적 자부심 고취시켜
선애경 문화전문 기자 / 1379호입력 : 2019년 02월 28일
↑↑ 아라키 준 박사가 당시 각종 신문에서의 환등 장소를 취합한 지도(1923~24년 계획·실시된 신라고적 환등회 분포도)에서 경주부근부터 대전, 서울, 개성, 평양, 신의주까지 환등행사가 시행됐음을 알 수 있다.

올해 100주년을 맞이하는 삼일절을 목전에 두고 있다. 경주시도 3.1절 행사가 다양하게 준비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에 아라키 준(54,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연구원) 이라는 일본인의 경주 근대사에 대한 상당한 학문적 연구가 뒷받침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2011년부터 경주 남산동에서 살면서 경주 근대사를 연구하고 있는 아라키 준 박사는 최근 1919년 경주 3.1운동 만세시위지 등에 대한 몇 가지 오류를 지적하고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해 주목을 끌고 있다.

또한 경주 만세시위는 그 자체의 규모는 크지 않았으나 이후 연이어 일어난 일련의 민족운동의 발단이 되었다는 점에서 민족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바로 경주 3.1운동에 이어서 일어난 ‘금관총출토유물 경주 유치(留置)운동’(1921~23)과 ‘신라고적 환등회(幻燈會, 1923~24년)’ 활동이 그것이다.

우선, 1919년 경주 3.1운동 만세시위지에 관해 아라키 준 박사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국내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로 지정한 1919년 경주 3·1운동 만세시위지인 ‘경주장터 신한은행 앞 사거리’가 잘못 지정돼 있다는 것을 알리면서 지난해 문제 제기를 한 바 있다. 자세한 자료 고증을 통해 ‘봉황대 주변’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

↑↑ 아라키 준 박사는 1990년 교토대학 문학부 사학과 현대사 졸업. 2000~2007년 주일한국대사관 한국문화원 근무. 2007~2011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문화예술학부 인류학과 박사과정. 2018년 8월 논문『식민지기 경주 유적·유물의 미시정치: 다양한 이항대립의 교차』로 한국학대학원 인류학박사학위 취득. 현재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연구원, ‘경주 아라키 카레’ 운영.

아라키 준 박사는 국가기록원의 공식적인 자료의 오류는 바로잡아야 한다며 경주지청의 판결문을 복사해 관계 기관에 제출하고 경주지역 3·1만세 운동 장소를 바르게 기록하도록 제안했었다. 그는 경주 만세시위를 주도한 것은 경주제일교회 기독교인들이었다면서 그들이 그 뒤 1921~1923년에 일어난 ‘금관총 출토유물 경주유치운동’을 주도하고 금관총 출토유물의 외부유출을 막았고 1923~1924년 부속 계남학교의 학자금 모금을 겸하여 신라고적을 시각적으로 소개하는 ‘환등회’를 전국적으로 전개함으로써 조선인 사이에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하였다고 밝혔다. 지난 21일 남산동 자택에서 아라키 준 박사를 만났다.

↑↑ 1919년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의 경주지역 만세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판결문 원문에서 ‘봉봉대’라는 글씨가 보인다. 봉봉대는 봉황대를 잘못 표기한 것.

-경주 3.1운동만세시위지는 신한은행 앞 사거리 아닌 ‘봉황대 일원’

“경주의 3·1만세 시위는 경주제일교회가 주도했으며 작은 장날이었던 1919년 3월 15일 ‘봉황대 일원’에서 일어났습니다”

이에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는 경주장터 신한은행 앞 사거리가 아니라 ‘봉황대 주변’으로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 주장의 근거자료는 1919년 4월 15일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의 경주지역 만세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판결문 원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라키 준 박사는 이 판결문에는 시위지가 ‘봉봉대’로 표기되어 있으나 ‘봉황대(鳳凰臺)’의 오기로 판단된다고 했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관계자는 “아라키준 박사의 주장에 따라 판결문을 확인하고 현지 조사를 거쳐 당시 경주지역 3·1만세운동 장소가 봉황대라는 것을 확인했다”면서 “독립기념관과 국가보훈처 등 관련 기관에 자료를 제출한 상태이며 조만간 수정될 것”이라 말했다.

-‘소장 이하 30여 명이 경계태세를 하고 있었다’...경주 3.1운동만세시위에 적어도 30여 명은 넘었고 수백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정
판결문 원문을 바탕으로 한 독립기념관 기록(번역문)에서는 경주 3.1운동의 경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 1921년 봉황대 노서리의 언덕(후일 금관총으로 명명)에서 발굴된 대표 출토유물인 ‘금관’은 ‘금관총출토유물 경주유치(留置)운동’으로 전개된다.
‘경주지역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13일 경주 장날을 이용하여 박래영·윤기효 등이 만세시위를 계획하다가 실패하였다. 3월9일에 노동리 교회(경주제일교회의 전신)의 영수인 박문홍은 목사 박래영·윤기효 등과 함께 만세운동의 계획을 세우며 동지를 규합해 갔다. 그리하여 이들은 청년 5, 6인을 모아 노동리 교회에서 모임을 갖고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제작하였다. 태극기는 3월 12일 밤 박문홍이 책임을 맡아 자신의 집에서 3백여 개를 만들었으며 3월 13일 새벽 곳곳에 배포하였다. 그런데 태극기의 배포사실이 일제의 경계망에 포착되면서 경주경찰서에서 3월 13일 새벽에 4대로 편성한 기동대를 투입하여 만세주동자들을 체포하였다. 이로써 박래영은 거사를 불과 몇 시간 앞두고 일본 경찰에 붙잡혔으며, 3월 13일의 경주장터에서의 만세시위도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만세운동 의지는 군중에게 계승되면서 경주의 작은 장날인 3월 15일에 박봉록 등 청년들의 주도하에 30여 명의 군중들은 박래영 등이 제작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한편, 아라키 준 박사는 밑줄 친 독립기념관 기록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사실 원래 기록에는 ‘소장 이하 30여 명이 경계태세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지 만세시위 인원수는 밝히지 않고 있다. 장날이었고 경찰이 투입됐으므로 적어도 30여 명은 넘었고 수백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정한다. 잘못 해석한 부분이다”라고 했다.

↑↑ 천도교 경주교구 연혁에서 천도교 경주교구가 경주 3.1운동 국권회복을 위한 영남지역의 대표 기도소였음이 확인됐다.

-경주 3.1운동을 기독교만의 공로로 치우쳐 평가하는 것은 조심해야

“특히 제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근거자료인 1919년 4월 15일 독립운동관련 판결문의 12명 중 기도교인을 포함해 ‘이에 찬동하여 대중과 함께’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볼때 함께 찬성한 이들이 누구인지, 어떤 세력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외의 인원도 동참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추정을 조심스레 할 수 있습니다. 3.1운동은 당시 조선민중의 염원이었고 그 대표로 제일교회가 중심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다른 이들이나 동학 관련세력 등도 참여했던 운동으로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그는 천도교의 영향도 존중해야한다며 최근 경주 3.1운동에 관한 천도교의 관여를 나타내는 자료인 천도교 경주교구 연혁이 발굴된 것으로 방증했다. 천도교 경주교구가 국권회복을 위한 영남지역의 대표 기도소였고 다만 구체적으로 천도교가 경주 3.1시위에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 혹은 경주제일교회와 어떤 협조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판결문이나 비밀요사에서 천도교 관련 기록이 없어 수수께끼지만 기독교만의 공로로 치우쳐진 평가는 조심스럽다는 설명이었다. 이는 앞으로의 연구 과제로 두겠다고.

-‘도동리(道東里) 교회’라는 표기는 오류, ‘노동리(路東里) 교회’로 바로 잡아야
한편, 아라키 준 박사는 1934년 ‘고등경찰요사’ 기록을 살펴본 바, ‘도동리(道東里) 교회’라는 표현을 처음 발견해낸다. 1919년 4월 박문홍 선생의 판결문에서 ‘노동리(路東里) 교회’이던 것이 15년이 지난 1934년 일제 고등경찰요사에서는 ‘도동리(道東里) 교회’로 잘못 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제 고등경찰의 잘못된 기록은 해방후 독립운동사를 편찬할 때 그대로 고스란히 옮겨진다. 일본인의 오타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도동리 교회라는 잘못된 표기는 수정해 노동리 교회로 바로 잡아야 한다고 했다. 역사바로세우기는 이런 기본적인 것부터 자세히 살펴야한다는 지적이었다.

↑↑ 금관총출토유물유치운동에는 동아일보, 경주청년회와 함께 경주제일교회의 적극적 관여가 확인된다. 3.1운동 판결문 주역 중 경주제일교회 ‘박문홍’의 이름이 청원서에도 자필서명으로 보이고 있다.

↑↑ 금관총출토유물유치운동에는 동아일보, 경주청년회와 함께 경주제일교회의 적극적 관여가 확인된다. 3.1운동 판결문 주역 중 경주제일교회 ‘박문홍’의 이름이 청원서에도 자필서명으로 보이고 있다.

-1919년 3.1운동이후 1921년 ‘금관총출토유물 경주유치(留置)운동 성공’...“민족성 소멸돼가는 위기에서 간접적이지만 위대한 신라의 유물 부각해 민족적 의식 고취해”

3.1운동이 지방도시 경주까지 벌어졌다는 것은 3.1운동의 파급효과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경주 3.1운동은 타 지역에 비하면 규모가 작은 편이었다. 그것을 주도한 경주제일교회의 역사적 위상이 특별히 돋보인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경주제일교회는 독립운동·민족운동에 큰 기여를 하기에 이른다. 이는 3.1운동이 발발한 지 2년 반이 지난 1921년 9월 말에 경주에서 미증유(未曾有)의 사건이 일어났던 것에 기인한다. 그것은 도로공사와 택지개발로 인해 봉황대 노서리의 언덕(후일 금관총으로 명명)에서 대량의 고대신라 왕족·귀족의 보물들이 발견되었고 대표 출토유물이 바로 ‘금관’이었던 것이다.

아라키 준 박사는 “화려한 부장품의 발견으로 경주는 고대신라의 수도로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게 되고 경주가 국제관광도시가 된 본격적 시발점이 됐습니다. 불국사와 석굴암보다 금관의 발견은 대단한 사건이었죠”라고 했다.

한편, 금관을 비롯한 출토유물에 대해서 조선총독부는 경성(서울)으로 이송해 경복궁 내 설치된 총독부박물관에서 보관·전시하려고 했다.

“당시 총독부가 문화통치를 시작할 때였고 그것의 상징적인 예로 보여주기 위한 저변의 도구로서였습니다. 총독부의 이 움직임에 맞서 ‘경주의 유물은 경주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경주 조선인과 거류 일본인이 힘을 합치게 됩니다. 이 움직임에 대한 평가는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당시 조선인들과는 다른 논리였지만 일본인들은 금관이야말로 경주에 관광객을 유치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봤을테고 경주에 살다보니 애향심도 있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결과적으로 ‘금관총출토유물 경주유치(留置)운동’은 성공적으로 전개됐으며 해당 유물은 경주박물관 ‘금관고’에서 보관·전시하게 된다. 이에 대해 아라키 박사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금관총 출토유물은 당시의 유치운동이 성공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라고 했다.

한편, 유치운동의 분위기를 고조시킨 주역은 동아일보였다. 금관총 유물을 경성으로 이송하는 움직임에 대해 경주시민이 반대운동을 벌인 소식을 전하는 기사 등과 유치운동 소식을 지속적으로 보도하고 모금 협조를 당부했던 것이다. 동아일보 경주지국과 경주청년회(1920년 3월 설립) 그리고 경주제일교회는 강한 유대로 연결되어 있었다. 즉 유치운동에는 동아일보, 경주청년회와 함께 경주제일교회의 적극적 관여가 확인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더 직접적인 증거로 1921년 10월 15일 총독부로 발송된 금관총 출토유물 경주 유치를 위한 청원서에서 경주 3.1운동 판결문 주역 중에 경주제일교회 ‘박문홍’의 이름이 청원서에도 자필서명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저의 역사학적 상상력으로 추측하건대, 동아일보를 통해 신라의 민족적인 유물의 존재를 전국에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되었고 민족성이 소멸돼가는 위기에서 간접적이지만 위대한 신라의 유물을 부각해 민족적 의식을 고취하고 더욱 각인시키게 된 것으로 봅니다. 최 윤 선생 등 지방의 유력자들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고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습니다. 따라서 봉황대 금관총 구역은 경주제일교회의 역사와 경주의 독립과 민족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곳입니다. 만약 경주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한다면 당연히 여기서 해야 합니다. 봉황대에 3.1운동시위지로서도, 금관총 출토유물유치운동에 관해서도 어떤 표식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단순한 고고학적 고분 발굴기 뿐만 아니라 지역의 사회적인 요소를 작게라도 포함시켜야 하겠습니다”

↑↑ 일본인이 제작한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불국사 석굴암 석굴 정면.

-1923년 ‘경주고적환등’...위대한 민족문화인 고대 신라문화를 전국적으로 시각매체 통해 조선인들에게 전달해 민족적 자부심 심어

이로써 경주가 부상하고 신라가 홍보되기 시작한다. 이 유치운동이 성공한 뒤 1923년 7월 7일자 동아일보에는 ‘경주고적환등’ 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게재된다. 경주읍 사립계남학교(경주제일교회 부속학교)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신라유적지의 사진을 소개하면서 모금활동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아라키 박사가 각종 신문에서의 환등 장소를 취합한 지도(1923~24년 계획ㆍ실시된 신라고적 환등회 분포도)에 의하면, 경주부근부터 대전, 서울, 개성, 평양, 신의주까지 경부선을 타고 이 환등행사가 시행됐음을 알 수 있다. 이 환등회 역시 단순한 모금 활동이 아니었다. 민족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함이었고 민족의식과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하고자 함이었다.

평양시 환등행사의 경우, 1923년 11월 19일자 동아일보에서는 ‘신라의 천년고도인 경주는 조선의 문화와 예술의 발상지 조선인으로서 반다시 지(知)하지 아니하여서는 안 될 역사상 참고자료가 다(多)한대 금번 경주군 사립계남교를 위하야 신라고적환등사진 순회영산단을 조직하야 가지고 조선전도를 순회하는 중....지난 16일 평양에 도착하야 즉시 평양신학교에서 영사를 행하고 17일은 숭실학교 강당에서 영사회를 개최한바 입장자가 7,8백명에 달아야 대성황을 일우엇으며...첨성대, 무열왕비, 봉덕종, 석굴암, 다보탑의 신라 5대 미술과 박, 석, 김, 손, 이, 최, 배, 설, 정 9성의 시조강생원인이적(始祖降生原因異蹟) 등 ... 역사상 필요한 사진인 바’ 라고 쓰고 있다.

“이 기사에서 보듯, 환등회는 단순히 계남학교 학자금을 모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널리 신라문화를 소개해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하려는 정신운동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인들이 고대신라문화를 시각적으로 접할 기회는 거의 없었고 처음으로 접하는 문화유산이었으니까요. 이 환등회는 대단한 발상이었고 평화롭고 합법적으로 펼친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독립운동사에 있어 환등회에 대한 평가는 높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무력 투쟁쪽에 비중을 두었고 문화운동쪽은 다소 미온적이어서 과소평가 돼 온 것이 사실이니까요. 일본인의 허가를 받아 시행한 만큼 ‘친일 행위’라는 경계가 애매한 부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경주제일교회는 위대한 민족문화인 고대 신라문화를 전국적으로 시각매체를 통해 조선인들에게 전달하여 민족적 자부심을 심어주었다는 점에서 한국독립·민족운동사에서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들이 신라의 불교문화를 민족전통문화로 소개하는 데 앞장서서 한국인 사이에 범종교적으로 민족문화를 바라보는 인식의 틀이 마련되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점도 혁명적이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경주 3.1운동만세시위를 생각해보면 그 자체는 소규모의 시위로 끝났으나 금관유치운동, 환등회로 이어지는 하나의 씨앗, 즉 도화선이 됐다는 것이 더욱 중요한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아라키 준 박사는 3.1운동이 하나의 브랜드처럼 여겨져 3.1운동에만 집중하다보니 이어지는 역사 전개를 소홀히 하는 것이 안타깝다며 거듭해서 경주 3.1운동에 이은 역사 전개를 고려하면 그 기점으로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 경주주민의 모금으로 1923년 10월경 건립된 금관고.

-“이론을 압도시키는 경주의 독특한 힘 덕택입니다. 제가 일본인이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죠”

끝으로 일본인으로서 한국과 경주의 근현대사에 대해 매우 심도있는 연구를 하고 있는 그에게 그 원동력을 물어보았다.

“경주였기에 가능합니다. 제 연구 배경으로서의 ‘경주’라는 소재가 너무나 위대하고 경주가 가지고 있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 덕분이었습니다. 쓰기만해도 학문적 소재가 되니까요(웃음). 저도 노력은 하고 있지만 역사성을 비롯한 경주가 지니고있는 이론을 압도시키는 독특한 힘 덕택입니다. 그리고 제가 일본인이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학자적 포용력도 연구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경주와 경주에 살고있는 덕분"이라며 몸을 낮췄다.

선애경 문화전문 기자 / 1379호입력 : 2019년 0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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