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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대표적 항일 독립운동가, 감포읍 출신 한송(寒松) 김봉규(金鳳奎) 선생

고문과 악형으로 수 십 번 기절, 독립 위해 의거<義擧>하고 항일투쟁 펼쳐
선애경 문화전문 기자 / 1358호입력 : 2018년 09월 21일
고문과 악형으로 수 십 번 기절, 독립 위해 의거<義擧>하고 항일투쟁 펼쳐
선생은 지역의 자랑이며 자부심
국가보훈처, 실질적 역할하는 후손에도 혜택 줘야


↑↑ 1963년 대통령표창 당시, 사모관대를 입고 찍은 선생의 모습.

향리인 감포읍에서 1919년 3·1운동에 맹렬하게 참여한 이가 있다. 애국애족의 일념으로 항일운동에 헌신한 김봉규 선생(1892(고종 29)∼1967)이다. 선생의 숭고한 정신과 실천적 삶을 기리고 후세의 귀감으로 삼기 위해 올해 3월 감포읍 나정리 생가의 지척에 공적비가 제막되기도 했다.

 감포읍 나정리 127에 위치한 김봉규 선생의 생가는 감포읍 바다 인근 나정리 해수욕장 바로 근처로, 비교적 눈에 잘 띄는 도로변에 있는 평범한 가옥이었다. ‘독립유공자의 집’ 이라는 현판과 함께 ‘독립유공자 김봉규 선생 생가’라는 안내 표지판만이 여느 집과는 다른 기상을 내비치고 있었다. 

결혼 후부터 선생의 생가를 지키며 살고있는 김봉규 선생의 장손 고 김영길씨의 부인 정연옥 여사(71세, 선생의 종손부)는 자긍심을 가지고 살고 있다고 했다. 

정 여사는 “남편과 가족들로부터 조부님이 옥살이를 하실 때 손톱 밑에 대침을 박는 것이 너무나 참기 힘들었다는 말도 전해 들었습니다”며 당시 선생의 고초를 전해주었다. 지난 17일 찾은 생가에는 선생의 전 생애에 단 한 장의 사진만이 남아 있었다. 1963년 대통령 표창장을 받고 사모관대 차림으로 찍은 기념사진이 전부였다. 추상같은 기개가 서늘하게 넘치는 한 장의 사진은 그 울림이 강했다. 한반도 격변기에 태어나 온몸으로 항일 투쟁을 해 온 한 장부의 모습에서 가슴이 먹먹했던 것이다.

↑↑ 생가 지척에 세워진 ‘애국지사 한송 김봉규 선생 공적비’.

-군자금 모금 활약 중 일본 순사 총살하고 망명, 임정 밀서 전하고 체포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나라 위한 굳은 결의는 추호도 굽힘이 없어’
올해 3월 제막된 국한문 혼용체의 선생의 공적비문 전문을 최대한 원문의 느낌을 살려 그대로 직역해 옮겨 보았다. 한자로 표기된 부분을 한글로 옮겼고 이해를 돕기 위해 부득이한 경우 한자와 함께 표기했다. 이 비문은 대정 13년(1924) 형공 제337호 판결문과 대한민국 의병록에 의거하고 있어 선생의 공적을 알리는 가장 적확한 자료라는 판단에 근거해서다.

‘공(公)의 휘(諱)는 봉규(鳳奎) 호는 한송(寒松) 성은 김씨요, 본관은 김해다. 1892년 8월 10일이요, 감포읍 나정리에서 태어나니 천품(天稟)이 총명하고 호협(豪俠)하여 청운을 꿈꾸고 형설의 학문을 쌓다가 경술국치(1910년, 한일합병)를 당했으니, 이때 이바지 할 때를 기다리면서 와신상담하다가 마침 기미 삼일 운동의 함성이 천지를 뒤흔들자 용약(勇躍) 군중의 선봉으로 투항하다가 마침내 왜경에 체포 수감되어 3개월 여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나라 위한 굳은 결의는 추호도 굽힘이 없어 군국주의 주구(走狗)들을 아연케 하였다. 

그 뒤 의기는 더욱 격렬하여 1920년 4월부터 항일구구운동에 투신, 독립을 전취(戰取)하려는 일념에서 상해임시정부와 만주 등지의 독립단과 긴밀한 유대하에 송두환, 최윤동, 노기용, 정래영, 김종철 그 밖의 여러 지사와 더불어 조국 독립을 위하여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맹렬히 활약하였다. 

각 지방의 동지들을 규합하는 한편, 국외로부터 무기를 반입하고 예경회, 의용단 임명장, 애국금 수합위원, 사령서, 군사경비단 단제 인쇄물 등을 가지고 각처로 잠행하면서 독립 자금을 모집하여 수 차례 상해임정에 밀송금 하였다. 

그러다가 동년 12월, 동지 김종철과 독립군자금 모집 차 경남 의령군 모 재벌가에 잠입하다가 매복중의 왜경에게 검거되어 경찰서로 연행 도중, 봉총(奉銃)으로 왜인 순사 갑배수(甲裵秀)를 사살하고 동포 순사에겐 중상을 입힌 후 두 사람은 만주로 망명 탈출하여 4년여 조국의 독립 운동을 전개하다가 모종의 밀명(密命)을 띠고 밀입국하여 동지들과 공작 중 불행히도 1924년, 한국독립운동단의 활동상황이 탄로가 나서 동지들과 함께 피검되니 혈기방장한 젊음의 나이로 4개월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으니 이것이 경북항일단 독립운동의 전말이다. 

↑↑ 선생이 직접 쓴 ‘항일투지’ 내용 중 일인으로부터 고초를 겪은 내용.

공은 출옥 후에도 불타는 투지는 꺾이지 않아 다시 동지들을 모은 한편, 해동청년회라는 비밀 조직을 만들어 회관을 건립하고 후진들의 독립정신 고취에 쉴 줄을 모르시니 왜황의 악랄한 예비검송령이라는 올가미에 걸려 괴로움을 겪음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나 구국에의 일편단심은 변함이 없었다.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1945년 8월, 조국 광복을 맞음에 감격과 환희 속에서 여생을 조국 대한의 자유 번영과 향토 발전을 위해 진력(盡力)하다가 1967년 2월, 향년 76세로 영면하시니 묘는 전촌리 포일산 해좌(亥坐)이다. 

장하도다! 굳건한 기백으로 불사조 같이 한평생 지낸 공에게 대통령 건국 포장이 추서되니 그 뜻과 그 용기 후생의 귀감으로서 찬연히 빛나리라. 생각하면 조국이 국권을 되찾고 전 국민이 재생의 기쁨을 누리게 된 것은 실로 공(公)과 같은 투사들이 쏟은 정성의 소치라 아니할 수 없다.

길이 빛날 거적(巨跡)의 편린이나마 적어 후인의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대정 13년(1924) 형공 제337호 판결문과 대한민국 의병록에 의거해 비문을 새기는 바이다. 부경대학교 정헌교 교수가 글을 짓고 정수암 선생이 제자(題字) 쓰고, 대한민국 석공 명장 윤만걸 선생이 세웠다’.

↑↑ 선생의 생가에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애국장 등이 걸려있다

-‘죽음을 각오하고 일인 순사들의 악독한 고문과 악형으로 수 십 번 기절’
공적비문과 함께 김봉규 선생이 생전에 직접 쓴 ‘항일 투지’와 선생에 대한 판결문 정리본에서 선생의 공적을 좀 더 보완해 보았다.

선생은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대구일대를 중심으로, 일반국민으로부터 부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그 대상자를 삼아 군자금 조달활동을 전개한다. 1920년 12월 선생은 양북 출신 김종철 선생과 함께 군자금 모집을 위해 합천군을 방문해 군자금 1만원 제공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어 경남 의령군 유곡면 칠곡리 남정구 집에 침입해 군자금 협조요청을 한다. 

그러나 일본군 순사부장 갑배수와 한국인 순사 손기수에 체포돼 의령경찰서 신촌주재소로 연행 되던 중 ‘단총으로 연달아 세 발(선생이 두 발, 김종철 선생이 한 발)로 일본인 순사 갑배수를 총살하고 한인 순사에게 중상을 입히고 도망쳐 마주 보이는 암석에 앉아 담배 한 개씩 피운 후 도피해 30리 되는 낙동강 쪽으로 가서 밤중에 길이 없는 산길로 삼일동안 피신한 끝에 대구에서 만난 두 애국지사는 만주로 망명하기에 이른다. 

선생은 그 후 1924년 임시 정부의 밀서를 가지고 국내에 잠입하고 임무를 마치고 고향에 잠시 왔다가 일경에 체포된다. 조선총독부 대구 제3경비부 감포주재소에서 체포돼 대구로 압송되기에 이른 것이다. 선생은 징역 4년을 선고 받는다. 한편, 김종철 선생은 체포되지 않았다. 선생은 죽음을 각오하고 일인 순사들의 악독한 고문과 악형으로 수 십 번 기절하면서도 ‘보따리 메고 따라 다녔다’고만 해 사실을 실토하지 않았고 사실이 조금은 은폐돼 사형은 면했다고 한다.

4년간 옥고를 치른 뒤에는 평생 고향 나정리에서 살며 고향 발전에 헌신했다. 1963년 대통령표창, 정부에서 그의 공훈을 기리기위해 추서한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한편, 선생이 연루된 군자금 모금활동에 당시 대구에서 10명이 참여했는데, 그 중 경주 출신의 애국지사가 무려 3명이나 참여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한다. 감포읍 팔조리 정래영 선생, 양북면 용당리 김종철 선생, 김봉규 선생이 그들이라는 점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고 선양해야 할 인물임이 틀림없다. 국가보훈처는 김봉규 선생 등의 군자금 모금활동을 ‘경북 제2 유림단 의거’라고 기록하고 있다.

↑↑ 선생의 종손부 정연옥 여사와 나정리 신동일 마을 이장.

-대쪽같은 기상 느껴질 정도, 매우 강직한 성품...귀향후 지역 지도자로서 향토발전에 이바지
나정리 신동일 마을 이장은 안타깝게도 최근에야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조명이 되고 있다면서 김봉규 선생을 기억한다고 했다. 

“어릴적 뵀었는데 댁의 툇마루에서 안경을 끼신 채 긴 곰방대 담배를 피우시곤 하셨습니다. 대쪽같은 기상이 느껴질 정도였고 어린시각에 무서울 정도로 강직해 보였습니다. 옥살이를 하고 귀향하시고는 동네 지도자역할을 하셨고 향토애가 강하셨던 분으로 이야기 들었습니다”라고 전했다.

정 여사는 “예전에는 독립운동을 중요시하지 않는 분위기였지요. 1963년 대통령표창 당시, 사모관대를 구해서 예를 갖춰 입으시고 찍으신 것이 지금 남아있는 사진입니다. 선생의 유년시절 생가 마당에는 쌀 뒤주가 몇 개나 있었다고 할 만큼 부농이었다고 했습니다만, 제가 결혼해서 보니, 가세가 기울어 지독한 가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시어머니께서 소쿠리에 고기 장사를 할 만큼 경제적으로 힘들었었지요”라고 회고했다. 

또 1970년대 초, 새마을운동 사업의 일환 중 선생의 생가 초가지붕을 개량하던 도중 처마 아래에 보관해 둔 여러 자필 기록물들이 발견됐다고 했다. 그 기록물들을 국가보훈처 등 행정기관에 제출하고 드디어 1977년 정부로부터 건국 포장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발견된 기록물들은 정부 관련처에 모두 제출해 현재 원본은 한 점도 전하지 않는다고.

“넷째 시삼촌인 김남원 선생(김봉규 선생의 넷째 아들)이 많은 자료를 비롯해 비문도 기록해 두셨고 형무소에 가서 판결문 등의 모든 자료 원문을 복사하고 일일이 번역하시고 책자로도 제작해 형제분들에게 나눠 주셨기에 그 기록들이 이나마 지금 이렇게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상세하게 시조부님의 항일 독립운동을 지금도 알 수 있는 것이지요”라고 했다.

↑↑ 당시의 판결문 사본과 선생의 친필 ‘항일투지’ 등의 자료와 기록물들.

-선생의 공적 기리며 살고있는 실질적인 후손들에게 국가의 혜택이 확대 지원돼야
독립유공자 발굴사업의 일환으로 김봉규 선생의 생가 복원에 대한 안건은 최병윤 감포읍장이 감포읍민과 함께 관심과 의지를 가지고 추진계획중이라고 한다. 

정 여사는 “공적비가 국한문 혼용으로 돼 있어서 이곳을 찾는 이들이 선생의 업적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므로 누구라도 쉽게 잘 알 수 있도록 한글로 쉽게 옮긴 안내판을 지금의 공적비 옆에 세워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바랐다. 또 선생에 관한 모든 자료나 국가보훈처 서류 등도 후손이 살고 있는 이 생가로 전달돼야 한다며 안타까워했다.

한편, 신동일 이장은 “김봉규 선생은 동네 자랑이며 자부심입니다. 선생은 당시 혁명적인 인물이었잖습니까. 그런 훌륭한 분의 후손들이 좀 더 대우받는 시스템이 갖춰지면 좋겠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후손들이 관례적이고 불합리한 지원에서 벗어나 가슴에 와닿는 정확하고 현실적인 처우개선이 필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재의 제한된 혜택에서 지금까지 선생의 공적을 알리고 기리며 선생의 생가를 모시고 있는 실질적인 후손들에게 국가의 혜택이 확대 지원돼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보훈처의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지원의 확대방안이 절실한 대목이었다.
선애경 문화전문 기자 / 1358호입력 : 2018년 09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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