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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 하성찬 전 교장의 경주이야기

최치원의 대숭복사 비문으로 밝혀진 숭복사지(1)

숭복사지에는 세 편의 수수께끼가 있다
하성찬 시민전문 기자 / 1466호입력 : 2020년 12월 03일
↑↑ 숭복사지 북편에는 법당과 그 좌우로 2층 건물과 요사채가 있고 요사채 앞에는 정자가 있다. 그리고 마당에 있는 탑 주위는 가림막으로 막아 두었다

↑하성찬 시민전문기자
숭복사지는 원성왕릉에서 남쪽으로 2.4km에 위치하고 있는데, 토함산 정상에서는 남쪽 방향이고, 토함산 산줄기인 조양산에서는 서쪽 방향이다. 숭복사지에서 동쪽으로 2km 위치에 감산사지가 있고, 활성리석불입상과는 1.3km 떨어져 있다.

숭복사지를 찾아갈 때는 반드시 원성왕릉을 거쳐야 한다. 원성왕릉이 조성되면서 숭복사가 이 위치에 들어서게 되었기 때문이다. 원성왕릉까지는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숭복사지를 찾아가는 길은 만만하지 않다. 꼬불꼬불 들길을 가다 보면 자칫 길을 잘못 들게 된다. 활성리 석불입상을 찾아가는 길처럼 네비게이션도 믿을 것이 못 된다. 원성왕릉에서 직선거리로는 2km이지만 실제 찾아가는 길은 2.4km이다.
숭복사지는 일찍이 말방리사지로 알려져 왔다. 1931년 일본인 고고학자인 오사까긴따로(大坂金太郎)에 의해 이 절터가 발견되었는데, 최치원이 찬한 숭복사비편(崇福寺碑片)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이곳 지명을 따서 말방리사지(末方里寺址)라고 하였다.

 이 마을 이름인 말방리에 대해서 그 유래가 몇 가지 전하고 있다.
먼저 원성왕릉과 숭복사에 참배객들이 많이 찾아서 말을 관리하는 마방(馬房)이 있었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이곳에 주둔하던 병사들이 말을 키우며 주변을 방위하던 곳이라서 말방리라고 불렸다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신라 전성기에 서라벌이 1360방이었는데 그 방의 마지막이 이 지역이어서 말방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고도 한다. 또 이 마을을 언방(言方)이라고도 했는데 ‘言’의 훈(訓)을 따서 말방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그런가 하면 약 350년 전에 방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 마을을 개척한 후에 말(馬)이 많았는데 ‘말이 많은 방씨 마을’을 줄여서 말방이라고 불렸다가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말(馬)이라는 한자를 ‘末’로 잘못 기록하여 지금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예로 건천읍 모량리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毛良’으로 표기하였는데 실제로는 ‘牟梁’이다.

『삼국유사』 「의해」편 ‘의상전교’조에 ‘숭복사’라는 사찰이 언급되어 있지만, 이 절은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에 있었던 사찰로 오늘 찾은 숭복사와는 관련이 없다.

이곳 숭복사는 원성왕릉과 관련이 깊은 사찰이다. 『삼국유사』 「왕력」편 ‘원성왕’ 조에 ‘왕의 능은 곡사에 있으니 지금의 숭복사이며 최치원이 지은 비문이 있다.’는 구절이 있다. 그리고 『조선금석총람』 숭복사비의 비문에 의하면 원성왕의 장지를 곡사로 정하고 이 절을 옮긴 후 훗날 숭복사로 사찰명을 바꾸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숭복사와 관련하여 몇 가지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있다.
첫째, 숭복사는 그냥 숭복사가 아니고 숭복사 비문에 의하면 대숭복사이다. 원성왕의 원찰이라 대숭복사라 했다지만 이보다 규모가 더 크고 왕실과 관련이 깊으며 화려한 황룡사도 불국사도 대황룡사 대불국사라 하지 않았다.

둘째, 왜 초월산 숭복사인가? 비문 첫머리에서 초월산(初月山) 숭복사라고 했는데 이 비문 외의 어느 문헌에도 초월산이라는 산 이름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비문의 내용 중에 ‘金城之离 日觀之麓 有伽藍 號崇福者’라 하여 ‘금성에서 거리가 떨어진 일관봉 기슭에 가람이 있는데 숭복이라 하였다.’고 했다. 같은 비의 비문에서 왜 산의 이름이 초월산과 일관봉으로 다르게 나오는지?

셋째, 원성왕의 원찰이라면 왕릉에 가까워야 할 것이다. 그런데 원성왕릉을 조성하면서 곡사를 옮겼다면 왜 2km 이상 떨어진 위치여야 했을까? 이보다 가까운 곳에 감산사지, 활성리 석불이 있는 절터 등도 있는데…

절 마당 북쪽으로 대웅전을 중심으로 서편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현대식 2층 건물이 있고, 동편에는 요사채가 있다. 요사채 앞으로는 철판으로 지붕을 덮은 정자가 있다. 그 정자 처마 아래에 금강경의 한 구절인 ‘應無所住 而生其心(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응당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라는 의미이다. 중국 선종의 육조 혜능이 이 구절을 듣고 느낀 바가 커서 발심 출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숭복사지에 대해서 어떻게 쓸 것인가 걱정하지 말고 알고 있는 바 그대로 쓰면 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다.
하성찬 시민전문 기자 / 1466호입력 : 2020년 12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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