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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동은 서라벌의 관문이었다.


하성찬 시민전문 기자 / 1440호입력 : 2020년 05월 22일
↑↑ 하성찬
시민전문기자
장자(莊子)』 「외물(外物)」편에 이런 구절이 있다.
득어망전(得魚忘筌) 고기를 잡으면 통발을 잊어라.
득토이망제(得兎而忘蹄) 토끼를 잡으면 덫을 잊어라.
득의이망언(得意而忘言) 뜻을 알았으면 말을 잊어라.
그동안 석굴암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은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得意而忘言’의 경지에는 턱도 없다.
그러나 토함산을 내려와야 한다. 이제부터 외동읍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갈 것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외동은 신라 때 육촌 중 취산진지촌(嘴山珍支村)에 속하였다. 북으로는 경주시내, 남산 및 마석산을 너머 그 서쪽은 내남면, 동쪽으로는 양남면과 경계를 이루고 남으로는 울산과 접하고 있다.

외동은 신라의 남쪽 관문이었다. 불가에 귀의하는 사람이 모벌군성[관문성] 성문에 이르러 삭발[毛伐]을 하고, 머리털을 불태운[毛火] 곳이라고 하여, 모벌(毛伐) 혹은 모화(毛火)라고 하였다. 그리고 옛날 불국사와 원원사 사이에 작은 절이 무려 78곳이 있어 절 사이의 통로가 마치 회랑과 같았다고 하며 불도를 닦으러 오는 사람이 방에 들어가듯 경건한 마음으로 신발을 벗어들었다고 해서 지명이 입실(入室)이다.

또 모화리는 뒷산이 매화 형국이라 매화촌이 되었다가 이를 고쳐 모화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마을을 처음 만들 때 노루가 많았다고 하여 노리골이 부르다가 후에 고친 마을 이름이 녹동(鹿洞)이고, 석계리는 돌이 많은 거랑 가에 있던 마을이라 이렇게 불리게 되었으며, 구어리는 마을로 뻗어 내린 9개의 산이 마치 어망이 터져 그 속에서 헤엄쳐 나오는 9마리의 물고기 형상과 같다고 하여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북토리에는 신라 눌지왕 때 충신 박제상이 왜국에 볼모로 잡혀간 왕자를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날 때 집에 들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편지로 써서 말의 발목에 매어 집으로 보냈는데 말이 길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헤매다가 이 마을에 이르러 죽자 마을 사람들이 말을 고이 묻어 주었다고 하는데 그 말 무덤이 있다. 광복 이후 마능(馬陵) 또는 아릿말이라고도 한다.

개곡리에는 임진왜란 당시 적을 막기 위해 큰 성을 쌓기로 계획한 곳인 대성마을이 있다. 말방은 옛날 숭복사 어귀로 마방(馬房)이 있어 이렇게 불렀다. 또 신라 때 360방의 마지막 방이 있었다고 해서 ‘말방’이라고도 했다.

괘릉리에는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할 당시 마을의 싸리나무를 베어다가 법당의 기둥으로 썼다는 싸리밭등, 신라 때 두 노승이 불국사를 찾아가는 길에 이곳 고개를 넘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왠 고개냐?”고 물었다고 해서 불리어지기 시작한 왼고개 마을이 있다. 또, 옛날 절을 짓기 위해 터를 닦았는데 식수가 나오지 않아 그만둔 텃골이 있다.

신라 때 방어사(防禦司)라는 군영이 있었다는 방어리에는 군량미를 저장했던 군창이 있었다는 둔전마을,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 있던 나무다리에 왜군 만 명이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하여 만다리라는 마을도 있다.

상신은 수양대군의 단종 폐위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키다 실패한 함길도 절제사 이징옥 장군이 피살되자 그의 가족이 처형당했는데 그의 손자 이윤연이 살아남아 유모의 등에 업혀 이곳 신계리로 피난을 왔다. 그 후 이윤연이 이곳의 떡갈나무 섶을 치고 마을을 개척하여 상섭이라고도 한다.

신라 경순왕이 마을 정자에서 거문고를 타며 놀았다는 입실리 순금(舜琴)마을, 대나무 숲 동쪽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 하여 죽동, 마을을 개척할 때 장군수인 활수(活水)가 솟아났다는 활성마을도 있다.

향토는 그 지역 주민들의 인격 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치고 고유의 문화를 지켜나가는 보루이다. 그러나 향토의 자산을 잘 가꾸어야 할 토착 주민들이 이 지역을 떠나고, 최근 모화, 석계, 입실 지역에 공단이 들어서면서 외지인이 많이 유입되고, 특히 외국인 근로자와 그 가족이 많아지면서 향토 고유의 문화가 사라져 가고 있어 안타깝다.

이 지역의 문화유적으로는 구어리와 냉천리, 입실리 등의 선사유적지를 비롯하여 신라 때 조성된 원성왕릉, 감산사지, 숭복사지, 원원사지, 관문산성, 영지석불좌상, 활성리 석불입상 등이 있고, 박제상을 기다렸다는 치술령의 망부석과 아사녀의 전설이 있는 영지가 있다.

2019. 12. 31. 현재 이 지역에는 원원사지 삼층석탑과 원성왕릉 석상 및 석주 일괄 등 보물 2점, 사적지 3곳, 경상북도지정문화재 7점, 비지정문화재 8점 등 모두 20여점의 문화재가 있다.
하성찬 시민전문 기자 / 1440호입력 : 2020년 05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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