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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즉시공 공즉시색


경주신문 기자 / gjnews21@hanmail.net1470호입력 : 2020년 12월 31일
↑↑ 박성철 교수
동국대 파라미타 칼리지
아무것도 안 쓰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화제다.《왜 살비니는 신뢰·존경·찬사를 받을만한가》라는 제목의 이 책은 이탈리아 극우 정치인 마테오 살비니(Matteo Salvini) 동맹당 대표를 조롱하기 위해 출간되었다고 한다. 110쪽이나 되는 본문에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걸로 봐서 살비니는 전혀 신뢰나 존경받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침묵으로 웅변하는 그 전략이 기발하고 날카롭다.
흔히 서구문화권에서 ‘비어있음’은 그 자체로 미완성이다. 개인적으로 잘 아는 외국인 교수는 고향 친구에게 큰 맘먹고 한국화 한 점을 선물로 보냈더니, 왜 채색이 덜 된 미완의 작품을 보냈냐고 하더란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서구인들은 캔버스에 손톱만 한 빈틈이라도 있으면 심리적으로 아주 불편하다고 한다. 우리는 오히려 반대다. 그들이 상상하는, 구석구석 빈 틈 없이 메꾸어진 한국화라면 아, 상상만으로도 답답하다.

예전의 맥도널드 광고 하나가 기억난다. 쟁반에는 방금 튀겼는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칩과 얼음이 동동 뜬 콜라가 놓여 있다. 빨대도 새것인 것으로 봐서 아마도 햄버거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재미있는 건 감자칩과 콜라가 쟁반 가장자리에 마치 우측 정렬이라도 하듯 바짝 붙여 놓여있는 거다. 도대체 햄버거가 얼마나 크길래 이렇게 해놓았나 의문이 들 찰나에 ‘진짜로 큰(Real Big M*g)’ 햄버거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새롭게 출시한 햄버거는 맛이 아니라 사이즈가 포인트라면 이것 이상으로 영민한 표현 방법은 없을 것이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속담의 햄버거 버전이다. 공(空)으로 어떤 색(色) 보다 더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한 수작(秀作)으로 기억한다.

비어있음을 철학적으로 변주한 것이 허공(虛空)이다. 비고 또 텅 비었다는 말이다. 또 그 텅 비어있음이 가득 차 있다고 해서 만공(滿空)이다. 근대 선불교의 중흥을 이끈 승려이며 독립운동가의 법호이기도 한 만공은 하는 일마다 무위법(無爲法), 즉 지극히 자연스러움으로 가득한 경지를 드러내기도 한다. 진실로 공하다는 진공(眞空)도 있다. 참으로 비었으니 신묘하게 있다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줄임말로 모순 형용(oxymoron)의 절정이다. 원래 실체가 없지만 기어이 우리를 괴롭히던 번뇌[色身]가 완전히 사라지면 비로소 드러나는 진리의 인격체[法身], 그 드라마틱한 환골탈태[轉變]가 그것이다. 역시 가장 수승한 경지다.

‘비어있음이 가득한’ 모순 형용은 생활세계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리가 건강[평화]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몸 안에서 항원과 항체가 치열하게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싸움을 멈추고 화해를 꿈꾸는 순간 나의 건강은 무너져버린다. 싸움만이 평화를 담보하는 셈이라 아이러니하지만 나의 몸을 통한 기적은 오늘도 일어난다.

그 기적의 현장이 요즘 좀 괴롭다. 사실 왼 어깨가 아픈 지 두 달째라 샤워 후에 등에 보습 크림을 바르지 못한다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TV 드라마에 완전히(!) 빠져있는 와이프는 언제 오려나? 헐벗은 등을 한 채 무작정 기다리다 큰 깨달음에 이른다. ‘내 등을 내 손으로 긁을 수 있는 것도 큰 복이구나...’ 또 ‘몸 여기저기서 아프다고 고함을 지르는데 주인인 내가 너무 무심했었구나...’

어쩌면 존재감이 없는 게 축복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타칭 고문관이었던 나와는 달리 군 생활을 아주 잘하던 동기가 있었다. 군대에서는 보통 선임한테 욕을 먹었으면 먹었지 칭찬들을 일은 별로 없는데, 그 동기는 항상 ‘있는 듯 없는 듯’ 군 생활한다는 소리를 듣곤 했다. 마치 있어야 할 그 자리에 팔다리가 있어 맡은 바 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최고의 찬사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소원이 없어진다고 누가 말한 적 있다. 몸이 아프면 차곡차곡 쌓아왔을 바램들이 사라진다. 삶이 단순하고도 선명해진다고 할까. 자식이 아프면 가방 메고 학교 가고 친구들과 재잘대는 평범한 모습이 최고의 행복인 것처럼. 그러니 어르신들은 하늘이 맑아 행복하고, 바로 출발하지 않고 당신을 기다려 주는 버스 기사님이 감사하단다. 어깨가 좀 아프다고 너무 감성적이 된 건 아닌가 싶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다. 2021년 신축년(辛丑年) 새해에는 더욱 건강하시고 일상 속 행복을 많이 찾으시길 바랍니다.
경주신문 기자 / gjnews21@hanmail.net1470호입력 : 2020년 12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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