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최종편집:2019-10-21 오후 03:49:11 회원가입기사쓰기전체기사보기
사설 칼럼 경주만평 정영택 목사가 띄우는 희망의 편지 독자기고
뉴스 > 칼럼 > 박성철의 문화단상

교차지와 종착지


경주신문 기자 / gjnews21@hanmail.net1407호입력 : 2019년 09월 26일
↑↑ 박성철 교수
동국대 불교문화대학
여기 사진 한 장이 있다. 사진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는데 죄다 화가 난 표정들이다. 그 가운데 서 있던 무표정의 한 남자를 가리키며, 그럼 이 사람은 지금 어떤 상태인가요? 하고 물었다. 눈꼬리가 올라갔다거나 입이 웃고 있다거나 등등 감정을 구체적으로 읽어낼 정보가 묻어나지 않는, 그냥 무미건조한 얼굴을 한 사람이었다. “화가 나있다”는 대답이 있었다. 아니 아주 많은 사람들이 화가 난 얼굴이라고 답했다. 반면에 “웃고 있다”는 상반된 대답도 많았다. 그러고 보니 입은 앙 다물고 있지만 눈이 살짝 웃는 것 같기도 하다.


대상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리는지에 관한 이상의 실험으로 알 수 있었던 것은, 동양인은 대상을 파악하는 데 그 주변과의 관계를 많이 고려한다는 사실이다. 반면에 서양인은 주변보다 대상 그 자체에 집중하더라는 문화적 차이를 드러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동양인은 무표정한 얼굴을 주변의 화가 난 얼굴과 매칭 시켜 이 사람 역시 화가 나 있을 거라고 짐작한 반면, 서구인들은 주변이 아무리 화가 난 얼굴로 가득하더라도 이 사람이 웃는 것처럼 보이면 웃는다고 파악하더라는 것이다.

‘눈치’라는 단어가 우리말 그대로 외국 학술 저널에 통용된다고 한다. 한(恨)이라는 개념처럼 우리말에만 있는 고유명사로 말이다. 외국에는 눈치라는 말이 없기도 하지만,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역학 속에서 내 위치가 결정되는 우리의 경우, 눈치나 체면은 아주 중요한 개념이자 행동철학이다. 관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말이다.

그래서일까, 원숭이, 팬더, 바나나를 보여주고는 묶을 수 있는 것끼리 서로 묶어보라고 했더니 서양인은 원숭이와 팬더를 묶더란다. 한편 동양인은 팬더를 놔두고 원숭이와 바나나를 서로 엮는다. 원숭이는 바나나를 먹고 살기 때문이다. 동양인에게 있어 관계란 이런 식이다. 반면에 서양인은 원숭이와 팬더를 연결하더란다. 둘은 동물인데 바나나는 과일이라는 이유에서다.

같은 문화권일지라도 자세히 살펴보면 이야기가 다르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그렇다. 예부터 한국은 인도나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선진문화를 취사선택적(取捨選擇的)으로 받아들이는 데 훌륭한 환경이었다. 종교, 과학에서 문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외래문화를 우리 정서에 맞게 선택적으로 취하거나 또는 버려왔다. 우리 주변에는 낡고 오래된 건물은 잘 안 보인다. 주변은 늘 공사 중이다. 한국인들의 역동성이라고 외신들은 칭찬한다. 새로운 핸드폰이나 IT 제품을 출시하기 전에 고객들의 호응도를 미리 점검해 보는 테스트 베드(Test Bed)로 우리나라가 유명한 것도 우리가 취사선택에 능해서다. 하지만 켜켜이 축적되는 전통과 역사에는 약하다. 우리를 그래서 교차지(cross-over) 문화권이라고 한다. 도로의 교차지에는 어김없이 신호등이 서있다. 직진을 할지 멈춰 설지는 신호 색깔에 따른 현재적 선택이란 점을 떠올려보면 이해하기 쉽다.

반면에 일본은 한반도로부터 전해 받은 외래문화를 모두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좋은 것만 받아들일 수도, 싫은 거라 배척할 수도 없다. 전통은 강하나 상대적으로 융통성은 약하다. 그래서 일본을 종착지(dead-end) 문화권이라고 한다. 천하의 바람둥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게 픽션인지 야동인지 분간하기도 쉽지 않은 소설이 일본 고전문학의 최고봉으로 대접받는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장편소설로 말이다. 지정학적으로 종착지 문화권인 일본은 현재보다는 과거로부터 켜켜이 쌓여온 전통을 중시해 왔다.

일본이 이번에 촉발한 무역전쟁은 그래서 결과를 예단하기 어렵다. 문화적 맨틀이 아예 다른 두 나라의 갈등이라 더욱 그렇다. 이참에 부품 자립화나 국산화하자고 하지만 사실 말처럼 쉽지가 않다. 또한 세계 경제가 협업을 중심으로 인드라망(網)처럼 얽혀있는 관계망 속에서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꺼야! 하는 주장도 그악스럽다.

역사나 경제 등 우선순위가 서로 다른 두 문화권이 타협점을 찾을 수 없다면, 더 근원적이며 공통적인 영역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일본 내에도 상식에 기반한 진실을 드러내고자 노력하는 지성인들이 많다. 우리나라에서도 ‘No Japan’과 ‘No Abe’를 정확히 구별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피부색이나 문화를 떠나 인간이기에 서로 통하는 건강한 상식과 상생의 의지만이 어지러운 질서를 회복할 수 있다.
경주신문 기자 / gjnews21@hanmail.net1407호입력 : 2019년 09월 26일
- Copyrights ⓒ경주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스토리네이버블로그
 
경주in스타
문화·행사
금요연재
포토뉴스
셔블&서울경주사람들
사설
칼럼
가장 많이 본 뉴스
방문자수
어제 방문자 수 : 35,703
오늘 방문자 수 : 26,344
총 방문자 수 : 1,370,190,954
상호: 경주신문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계림로 69 / 발행인·편집인 : 손동우 / 발행인 : 정학구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손동우
mail: gjnews21@hanmail.net / Tel: 054-746-0040 / Fax : 054-746-0044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북, 다-01024
Copyright ⓒ 경주신문 All Rights Reserved. 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요강을 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