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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리와 목월의 자취를 찾아서


경주신문 기자 / gjnews21@hanmail.net입력 : 2001년 02월 12일
경주가 낳은 문인으로 한국문단의 양대산맥으로 평가받고 있는 동리와 목월을 생애와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한 동리·목월 기념관이 지역문인들을 중심으로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예기청소가 배경이 된 무녀도로 잘 알려진 동리와 식민지시대 민족의 얼과 혼을 민족 정서를 바탕으로 향토적 서정과 시공간을 초글하는 상징적인 자연을 노래한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는 목월의 자취를 더듬어 본다.

■김동리■

뒤에 물러 누운 어둑어둑한 산, 앞으로 폭이 널따랗게 흐르는 검은 강물, 산마루로 들판으로 검은 강물 위로 모두 쏟어져 내릴 듯한 파아란 별들, 바야흐로 숨이 고비에 찬 이슥한 밤중이다. <무녀도의 서두>

본명은 시종(始終). 동리는 1913년 음력 11월 24일 성건동 186번지에서 아버지 金壬守와 어머니 許任順의 5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다.

동리의 출생환경은 그의 문학이 전통으로 회귀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판단된다. 동리의 부친은 음주와 주사가 심했는데, 이에 반발한 모친은 집안의 전통적인 가치관이었던 유교를 버리고, 교회에 다니게 되어 종교적 갈등과 가정불화로 고독한 유년시절을 보내게 된다.

이러한 유년시절의 고통들이 문학활동을 통하여 독창적 성격을 지닌 철학적, 종교적 사색을 형상화시켰다고 많은 문인들은 입을 모은다.

유년 시절 그의 집 주변에 있는 서천 애기청소에서 이따금 신비로운 마음으로 구경했던 굿과 어머니로 인한 기독교 계통의 학교 선택이 그의 문학을 결정짓는 사상적 기반이 됐다.

경주제일교회가 세운 계남소학교와 계성중학교, 경신중학교의 신앙교육은 동리에게 기독교 사상을 심어주는 계기를 마련해 '무녀도', '사반의 십자가'등을 비롯한 유사한 성격의 작품을 창작하는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문학수업에 학교공부는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전문학교 진학은 물론 중학교까지 자퇴한 동리는 부산에 내려가 동양철학자이신 형님 凡父 선생 댁에서 동서양 철학서적을 탐독하는 한편 시 창작에 몰두했다.

1933년 맏형 범부선생이 상경함에 따라 함께 상경해 먼 친척집에서 하숙을 겸한 가정교사로 있었으나 궁핍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
이때부터 신춘문예 당선의 꿈을 안고 여러 신문사에 응모하게된다.

하지만 1934년 새해 아침 여러 신문사에 보냈던 대다수의 작품들은 낙선되고 조선일보에 시 '白鷺'만 입선된다.
이에 굴하지 않고 고향 경주로 내려와 신춘문예를 위한 칼을 다시 갈기 시작했다.

이때 고향 경주에서 문우들과 사귄 인생역정도 자신의 문학수업에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물론 경주의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게 됐다고 그의 소설 '선도산'에서 밝히고 있다.

이러한 예술적 분위기와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엮어진 경주 문학수업은 마침내 '화랑의 후예'가 중앙일보에 당선되는 행운을 가져온다.
1935년 소설가로 등단한 동리는 상금을 가지고 경남 사천의 多率寺로 들어가서 그의 문학세계를 결정짓는 동리 특유의 문학관을 확립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영원과 신의 문제 한국 고유의 샤머니즘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생의 究竟的 문제와 불교적 인생관, 외래 종교와 죽음의 문제 등을 민족적인 것과 연계시키는 예술적 작업에 몰두했다.
다솔사에서 상당한 문학적 성장을 본 동리는 몇 개월 후 해인사로 들어가 그때까지 터득한 생과 사의 문제들을 보다 더 깊이 있게 관조해 그의 문학방향을 확정하는 일련의 작품들을 창작하게 된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산화'를 비롯 같은해 나온 '무녀도', '바위', '술', '산제', '허덜풀네' 등과 1937년의 '어머니', '솔거', 1938년의 '잉여설', '생일', 1939년의 '황토기', '찔레꽃', '두꺼비', 1940년의 '동구앞 길', '다음 항구', 1941년의 '소년'등이 해방전 작품이며 몇편의 작품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작품들이 경주와 관련되어 있거나 다솔사와 해인사에서 결정된 문학관의 예술적 승화로 보인다.

1945년 사천에서 해방을 맞은 동리는 전쟁기간(2차 세계대전)중 절필했던 문학활동을 다시 시작한다.
1946년 상경하자 말자 '未遂' '轉回設'등을 발표한다. 또 좌익계열의 문학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과 대결하기 위해 목월, 미당과 더불어 '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해 자유진영 문학단체로서는 최초로 문학의 밤을 개최, '순수시의 사상'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하게 된다.
1947년 '혈거부족', '달', '이맛살' 등을 발표했고 공산주의자들의 진보적 민족문학론에 대립해 휴머니즘 민족문학론을 내세운다. 또 이해에 첫 창작집 '무녀도'를 펴낸다.

한국전쟁중과 후에도 꾸준한 활동을 펼쳤으며 특히 54년∼59년에는 매우 왕성한 작품활동을 보여준다.
이시기는 '살벌한 황혼', '마리아의 회태', '흥남철수', '용', '진달래', '청자'등의 작품과 장편소설 '사반의 십자가'를 '현대문학'에 연재, 제 4창작집 '실존무'등 가장 두드러진 작품활동 시기라 할수 있다.

1960년대에는 인간의 근원적인 운명과 관계되는 '무녀도' 성격의 소설들이 창작된 시기로 볼 수 있다. '어떤 고백', '당고개 무당', '이 곳에 던져지다', '어떤 남', '부활', '성문거리'등이 이시기의 작품들이다.
소설 '선도산'으로 대변되는 1970년대와 80년대는 역사소설의 창작 및 기존의 작품을 묶은 작품집이나 대표적인 작품의 영역, 불역, 일역, 수필집의 출간이 주류를 이루는 시기이다.
1972년 '삼국기', 73년 제6창간집 '까치소리', 수필집 '사색과 인생', 76년 소설 '선도산','꽃이 지는 이야기'등을 발표했다.

1989년에는 한국문인협회 명예회장으로 추대되는 등 90년 7월 30일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한국문학의 발전을 위해 왕성한 활동을 펼쳤으며 1995년 5년간의 투병생활을 마감할고 84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동리의 작가적 생애는 위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소설가, 시인, 수필가, 평론가로서 남겨 놓은 자취가 너무도 우뚝해 우리 한국문학사뿐만 아니라 외국의 문학인들 사이에서도 노벨 문학상에 추천될 정도로 문학적 업적이 높게 평가되고 있다.
그러므로 경주의 소설문학은 동리와 더불어 영원한 향기를 뿜어낼 것이다.

■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동리가 소설에서 한국문단의 태두로 군림했다면 운문에서는 단연 목월이 돋보인다.
목월의 본명은 泳鍾. 건천읍 모량출신이다. 본래 목월이 태어난 곳은 경남 고성이었다.
대구농업학교를 나와 당시 수리조합의 기사였던 아버지 朴準弼의 근무지가 그곳 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월은 태어나던 그해 채 백일이 지나지 않아 고향 모량으로 돌아와 유소년 시절을 보내게 된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마친 목월은 1931년 16세때 기독교계통인 대구 계성중학교에 입학한다.
목월이 문학에 뜻을 두게 된것도 이때 쯤인 것으로 판단된다.
1933년 학생신분으로 어린이 誌에 '통딱딱 통딱딱'등의 자유형의 동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朴장룡 이란 가명을 썻던 그는 주로 본명인 영종을 필명으로 썻다.

韓國童詩史에서 소위 자유동시가 하나의 장르로 확립된 것이 1937년 등장한 김영일의 자유시론 이후로 잡고보면 1933년 출발한 목월의 위치는 가히 선구적인 것이라 할수 있다.

하지만 목월은 영종으로만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 같다.
계성중학 졸업후 고향에 머물고 싶어 경주 금융조합에 입사해 하숙을 하며 일반 詩를 창작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이무렵 경주는 현대문학의 불모지나 다름 없었다. 이미 문단에 등단했던 동리는 다솔사로 떠나버렸고 이외에 한두 사람이 있었으나 정열이 식어버린 사람들이였다.

이무렵 쓰여진 '황혼의 인상'이란 시에 목월은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아 그시절 그의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경주박물관(현 경주문화원) 옆길은 북천으로 이어져있다. 쇠리쇠리한 초겨울의 영혼이 으시시해 오는 어둡사리 속에 북천내로 나가는 길은 자갈 한 개마다 희뿌옇게 추위속에 퇴색하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 길을 나는 그야말로 키가 훤칠한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심각한 얼굴을 하고 낡은 오버자락을 휘날리며 오고가곤 하였던 것이다. 마음을 의지할 곳이라곤 없는 추위속에서 새록새록 켜지는 색주집 등불의 그 서러운 빛줄기"

하지만 그는 담배를 피울줄 몰랐고 술이라 해야 고작 구멍가게에서 서너잔 마시는 정도였다.

1938년 목월은 충남공주의 지주 유승렬의 영애인 益順과 결혼하고 39년과 40년에 걸쳐 일본과 우리나라의 동해를 떠돌며 처음으로 木月이란 필명을 써 마침내 40년 문장지에 '가을 어스름', '연륜'으로 3회 추천을 받음으로써 서정시인으로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추천자인 시인 정지용은 그를 素月과 비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북에 김소월이 있었거니 남에 박목월이 날만하다"

이후 목월은 동심의 소박성, 민요풍, 향토성 등이 조화를 이룬 자연찬화와 교감의 짧은 서정시를 계속발표해 목월 특유의 전통적 시풍을 이룩하게 된다.

46년 목월은 동리, 미당등과 함께 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고, 조선문필가협회 상임위원등으로 활동했으며 이해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그 유명한 '청록집'을 발간하게 된다.

청록집은 처음부터 동인지나 유파 의식을 바탕으로 발행된 것은 아니다.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초 사이에 '문장'지를 통해 등단한 여러 시인들 가운데서 광복직후 서울에서 만날 수 있었던 세 사람이 모여 발간한 시집인 것이다. 따라서 청록집에 수록된 시편은 '문장' 추천작품들을 중심으로 엮어졌으며 자연을 소재로 한 서정시라는 점과 일제말 민족어를 갈고 닦아 이루어진 시라는 점에서 동질성을 찾을수 있다.

55년 첫 시집 '산도화'를 간행하게 되는 목월은 같은해 제3회 아세아 자유문학상을 수상하며 시인으로서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목월의 시를 전반기와 후반기로 구분한다면 전반기는 '청록집'의 세계이고 후반기는 '산도화'의 세계이다.

청록집의 세계에서 화자는 '꿈꾸는 사람', 대상은 '임', 정서는 '슬픔'이다. 또한 화자와 대상은 불화의 관계로 드러나지만 산도화에 이르러 '꿈꾸는 사람'으로서의 화자와 '임'으로서의 대상은 화해의 관계를 획득한다. 슬픔의 정서 역시 막연한 정서이기 보다는 한결 순화되면서 구체적인 이해자로 제시된다.

이후 목월은 59년 시집 '난, 기타', 62년 동시집 '산새알 물새알', 64년 시집 '청담', 68년 시집 '경상도 가랑잎', 76년 시집 '무순' 등을 발간했으며 78년 63세의 일기로 별세하게 된다.

별세후 이듬해인 79년 유고시집으로 '크고 부드러운 손'이 간행됐다.

목월은 경주에 내려오게 되면 후학들에게 "자네들은 고향에 살고 있으니 고향에 묻혀 있는 소재들을 찾아 시를 써라"고 당부하곤 했다.
목월의 후학인 서영수 시인은 "그분은 부드럽고 세밀하고 자상하기가 그지없는 분이었지만 노하면 태풍과 같았다"고 목월을 회상했다.
목월은 동리처럼 직접적으로 경주를 소재로 삼은 작품들은 드물지만 목월 특유의 전통적 시풍 저변에는 경주의 향수가 구석구석 묻어나고 있다.
경주신문 기자 / gjnews21@hanmail.net입력 : 2001년 0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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