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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질곡의 100년 역사 지켜 온 계림초등학교(鷄林初等學校)-계림초등 100년 역사는 경주 발전 100년의 기록

질곡의 100년 역사 지켜 온 계림초등학교(鷄林初等學校)
선애경 기자 / violetta22@naver.com1238호입력 : 2016년 04월 21일
↑↑ <좌>1958년 가을 소풍. <우>최근 가을 운동회.
ⓒ (주)경주신문사


‘100’이라는 숫자는 단순히 물리적인 숫자로서의 개념보다는 형이상학적인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지역에는 100년이 넘은 초등학교가 세 군데 있다. 계림초와 옥산초, 양동초가 그곳이다. 계림초와 옥산초가 1907년, 양동초 1909년, 건천초 1921년, 양남초, 안강제일초, 의곡초가 1923년, 입실초 1924년, 내남초 1926년, 월성초 1927년, 천북초 1928년, 현곡초 1930년 등의 순으로 개교했다.

한국 근현대사와도 호흡을 같이 한 100년 학교의 나이테 위에는 지역민의 사랑은 물론, 지역민의 애환도 고스란히 스며있다. 흑백 사진들 속에서 100년이란 시간은 비록 낡아 빛이 바래지고 있지만 아직도 빛나던 교정과 교우들과 함께 하던 추억은 우리들 뇌리에 간직되고 있는 것이다.

이 세 학교 중 이번호에서는 특히, 교번 1번지의 계림초등학교의 100년 발자취를 살펴보았다.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경주 교육과 지역사회 발전에 큰 축을 이룬 계림초등의 100년 역사는 경주 발전 100년의 기록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본 기사는 특히, 2010년 발간된 ‘계림초등학교 100년사’에서 발췌한 내용을 근간으로 했음을 밝힌다. 1980년 59학급 3635명으로 개교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던 계림초의 학생들이 최근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데 이는 출산율이 급격히 떨어진 원인도 있지만 1980년대부터 황성동 등지에 대규모 주택단지가 들어서면서 생활이 불편했던 주민들이 주거지를 옮기고, 또 계림초 주위에 형성된 상가와 주택가 등이 읍성정비구역에 포함돼 대부분 철거를 하면서 학생수가 급격히 줄어든 것에 기인한다.

구도심의 중심이었던 계림초의 위축은 현재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경주 도심권의 현주소와도 무관하지 않다. 100년의 시간성이 바래지지 않도록 교육 당국과 지역사회가 머리를 맞대고 그 방안을 강구해할 시점이다.

↑↑ <좌>성동 교사 시절 교문. <우>계림초등학교 전경.
ⓒ (주)경주신문사


-1941년 계림국민학교로 교명 변경, 현재 총 2만5710명 졸업생 배출
계림초는 1907년 4월 1일 공립경주보통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아 개교한다. 1909년 3월 30일 제1회 졸업식을 가졌다(남 10명). 1921년 4년제에서 6년제로 바뀌고 학생수가 387명으로 늘면서 동경관에서의 시절을 뒤로 하고 경주군 경주면 성동리 (현재 성동시장)에 신축교사를 짓는다. 1941년 4월 1일 계림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신라왕 김알지의 전설이 얽힌 ‘계림’으로 개칭되면서 현재의 모교명으로 정착한 것.

해방과 함께 23학급으로 성장했으며 한국인 교장 부임과 동창회가 결성되는 등 짜임새 있는 영남 제일의 학교로 부상했다. 해방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학교는 육군 병원으로 징발되었고 학생들은 천막 수업을 받게 된다.

그러나 학생수는 전교생이 2천명에 달했다. 당시 육성회가 1955년 현재의 교정터인 경주시 북부리 터를 매입했고 경주군 경주읍도 이때 승격된다. 1996년 계림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2005년 교육과정 운영 전국 최우수교로 선정된다. 1980년 59학급 3635명의 학생수는 개교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1972년 2915명이, 1999년까지는 1017명 재학, 2000년 들어서서는 984명으로 1000명 이하 학교가 된 이후 점차 줄어들기 시작한다.

1990년 중반부터 도심 공동화에 따른 인구 감소와 경주 읍성 복원 등 문화재 보존 사업 등으로 학생 수가 급격히 줄어 현재 경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2011년 321명, 2015년 194명 등으로 격감하기 시작한 것.

↑↑ 최근의 계림초 작품 전시회.
ⓒ (주)경주신문사


2007년 4월 1일,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100주년을 맞이해 기념 조형물을 설립하고 100주년 기념비를 제막했다. 또, 계림역사박물관을 만들어 개교에서부터 오늘날까지의 각종 기념비적 자료와 고증을 통해 학교의 역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또 지난 2010년에는 ‘계림초등학교 100년사’를 발간했다.

이 책에는 사라진 기록을 살리고 남아있는 흔적을 구해 그간의 계림 100년사를 집대성하고 있다. 2016년 2월 현재, 107회, 44명의 졸업생을 배출해 총 2만571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 <좌>1957년 아침 조회 모습. <우>원예치료 체험.
ⓒ (주)경주신문사


-‘잃어버린 계림 11년을 찾아서’... 계림초등의 원년 역사 1896년으로 재조명해야
‘잃어버린 계림 11년을 찾아서’ 라는 글에서는 “계림초등의 역사를 재조명해야하는 주목할 만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1896년 학무부령 5호로 지방 공립 소학교 설립을 공표하고 이에 근거해 설립된 것이 경주 공립소학교였다. 경주 향교 부속건물인 ‘육영제’를 빌려 계림초등학교 전신인 경주군 공립소학교가 탄생한다. 그 후로도 학교가 계속 운영된 것의 반증은 경주공립소학교에 교원이 계속 임용되어지고 있는 것이 관보에 등재돼 있다. 이 학교는 1904년 한일의정서 조인과 제1차 한일협약으로 일제 통감부의 정책에 따라 식민지 교육 체제로 바뀌게 된다. 1907년 4월 1일부터 공립 소학교는 공립 보통 학교로 명칭을 바꾸도록 했다. 이에 계림원년을 1907년으로 기록했으니 이 얼마나 슬픈 계림의 역사인가. 다행히 구한말 관보가 남아있어 계림의 잃어버린 11년의 역사를 찾게 돼 다행”이라고 적고 있다.

2008년 이진호 지적박물관장이 이 같은 기록이 담긴 구한국관보를 총동창회에 전달해 계림의 원년 역사를 문서로 확인 하게 된 것. 그렇게 보면 올해 개교 120년이 되는 학교인 셈이다. 명실상부 유서깊은 학교로서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인 것.

↑↑ 동경관 앞에 모인 학생들
ⓒ (주)경주신문사


-“찐 고구마 몇 개와 과일 몇 알이면 대만족, 주로 오릉, 삼릉, 포석정, 옥련암, 남산 등지로 소풍 가”
24회(1933년) 졸업생 서병옥 선생은 “어린 시절 우리 학교는 참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한 학급이 당시 60명 정도였는데 전교생이 400여 명이 안되었지만 우리 학교는 군내에서 가장 큰 학교였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서울, 평양, 대구, 경주 4곳에 세워진 학교였다. 경주 군내 출생이라도 읍내 아이가 아니면 이 학교에 입학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여름 장마때 금장리 형산 강물이 범람하면 나룻배가 건널 수 없어 되돌아가며 울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김익도 41회(1950년) 졸업생은 “우리들이 다니던 6년간은 우리 현대사에 있어 가장 큰 격동기였다. 이 절대 빈곤과 혼돈이 지배하던 암담한 시절에도 우리를 황홀하게 하는 소중한 추억은 있었다. 경주군민체육대회, 운동회, 소풍 등이 그것이었다. 우리들이 주로 소풍을 간 곳은 오릉, 삼릉, 포석정, 옥련암, 남산 등이었다. 소풍 날짜가 정해지고 행선지가 결정되면 그날부터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도시락에 찐 고구마 몇 개와 과일 몇 알이면 대만족이었다”면서 “덧없는 반 세기를 지나면서 이제는 아스라한 추억으로 남았다. 교정에서 바라본 서쪽하늘에 핀 붉은 노을, 오래 전에 헤어진 정답던 친구들의 맑고 순진한 얼굴들과 그들이 운동장에서 뛰놀던 모습 등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용강동에 사는 계림초등 동문은 “1970년대 초만 하더라도 경주지역 도심권에는 큰 초등학교가 3곳이 있었는데, 중심상가권의 월성초와 구 주택가인 황남초, 그리고 성동시장을 중심으로 한 상권과 주택가가 밀집해 있는 계림초가 대표적이었다. 당시 마땅한 놀이터나 놀이문화가 없었기 때문에 수업이 끝난 후 학교 운동장은 늘 학생들로 붐볐고 특히 운동회가 열릴 때에는 온 가족뿐만 아니라 친척까지 놀러와 북새통을 이루는, 그야 말로 가족 또는 지역 공동체의 중심이 바로 계림초였다”면서 “소풍날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에는 황성공원, 반월성, 계림숲 등 비교적 도심권과 가까운 곳을 정해 학년별로 장소를 달리 했는데 길게 늘어선 소풍행렬이 장관이었다. 아마 계림초의 위상은 경주의 도심권 성쇠와 같이 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한 집에 2~3명의 형제가 같은 초등학교에 다닌 집이 많았다”고 전했다.

↑↑ 계림역사박물관.
ⓒ (주)경주신문사


-계림을 빛낸 자랑스런 동문들, 각계각층에서 맹활약
6회 졸업생인 독립 운동가 손석봉, 10회 졸업생 황술조 화가, 12회 졸업생 사학가 최남주, 13회 졸업생 서양화가 손일봉, 17회 졸업생 행정계 주재호, 19회 졸업생 정치인 안용대, 20회 졸업생 김만술 조각가, 25회 졸업생 손수택 화가, 26회 졸업 김준식 미술인, 29회 졸업 이상열 교육인, 39회 졸업 이수일 연극인, 43회 졸업 조필제 미술인 외 서수종 정치인, 서영수 시인, 이재건 화가, 최양식 경주시장, 김석기 국회의원 당선인 등을 배출했다. 1세기를 넘도록 동문들은 정계, 재계, 관계, 학계, 종교 문화 등의 각계각층에서 사회 역군으로 맹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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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대 흐름 속, 새로운 교육관 정립하고 새로운 교육 개척해 나가야
현재 10학급 편성에 특수학급 2학급이 편성돼 있다. 2015년 지금의 서인숙 교장이 취임했으며 ‘머리에는 이상을, 가슴에는 조국을, 발걸음은 세계로’를 교육의 이념으로 삼고 있다.

서인숙 교장은 “교번이 1번지인 학교다. 이주가 많은 지역이다보니 학생수가 줄어들고 학부모들은 더욱 이 학교에 보내는 것을 기피하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어 안타깝다. 학생들에게는 오래된 학교의 역사성을 통해 ‘계림인’이라는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강조하고 있다”고 했다.

“계림은 개교한 지 얼마되지 않아 나라를 잃는 불행한 시간을 맞이했지만 인고의 세월을 이기고 나라의 얼을 꿋꿋이 지켜 오늘날 역사의 무대에 우뚝 섰다. 오늘날의 번영은 계림초등학교와 같은 오랜 역사를 가진 초등학교들이 행해 온 참교육의 효과요 결실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새로운 시대 변화의 흐름 속에 새로운 교육관을 정립하고 새로운 교육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계림초는 100년의 전통을 바탕으로 학교와 가정 지역사회가 삼위일체가 되어 폭력과 따돌림이 없는 학교, 학생과 교직원이 안전하고 행복한 학교를 지향하고 있다.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참되고 창의적인 인재 육성’을 위해 전 교직원이 노력하고 있다.
선애경 기자 / violetta22@naver.com1238호입력 : 2016년 04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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