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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산강 물길따라(25)-동해를 바라보며 남편을 그리다 숨져간 신라여인 이야기(2)


경주신문 기자 / gjnews21@hanmail.net1441호입력 : 2020년 05월 28일
↑↑ 장사벌지지와 신라충신 박제상공 부인 유적비.

●장사벌지지와 박제상 부인 유적비 이야기

경주 통일전 못미쳐, 화랑교에서 남천뚝(동쪽)을 걸어가면, “장사 벌지지”와 “신라 충신 박제상공 부인 유적”이라쓴 자연석 비석이 비스듬이 서있다. 그리고 건너편 논 가운데 신라 망덕사지가 보이는데 이 근처와 문천 제방 쪽의 모래사장을 ‘장사(長沙)라고 한다. 이곳에 신라 박제상과 그 부인의 애틋한 이별의 이야기가 삼국 유사에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박제상(朴堤上)이 왜국 볼모로 간 신라 왕자를 구하러 떠나다
신라 17대 내물왕 때 보해와 미해 두 왕자가 고구려와 왜국에 각각 볼모로 갔었다. 아버지(내물왕)가 죽고, 맏이가 눌지왕으로 즉위한지 10년쯤 지나자 동생들이 보고 싶어져, 왕이 박제상(지금의 양산군 태수)을 시켜 고구려에서 보해를 구출하여 데려왔고, 연이어 왜국에 있는 미해도 귀국시키고자 또 박제상을 임지로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일은 바다를 건너 목숨을 걸어야하는 위험한 일이었다.

△‘장사벌지지(長沙伐知旨)’란 지명(地名)이 생긴 이유
박제상이 집에 들리지 않고, 왕(王)에겐 하직 인사 후 왜국으로 떠난다는 소문을 부인이 듣자 남편을 만나려고 문천모래사장으로 허겁지겁 달려갔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황망한 심정에 그만 주저앉았다. 그가 떠난다는 뱃길인 율포(栗浦)까지 당장 찾아가려하였으나 몸이 말을 듣지않고, 허둥대며 자꾸 주저앉기만 했다. 친척 두 사람이 부축해도 몸이 경색되어 부인이 두 다리로 ‘뻗디디’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 후부터 이 곳 지명이 ‘장사벌지지’가 되었는데 장사(長沙)는 부인이 두 발로 ‘뻗디디’를 한 문천의 긴 모래사장을 뜻하며, ‘벌지지’는 우리말 ‘뻗디디’를 한자음으로 표현한 것이 사람의 입에 쉽게 오르내리면서 ‘벌지지’가 되었다고 한다.

△박제상과 부인, 동해 바닷가에서 이별
아무튼 부인은 율포 바닷가에서 떠나는 남편을 향해 울면서 출발을 만류했지만 남편은 “임금님과의 약속인데 충직해야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왜국으로 향했다. 소설가 현진건 선생이 박제상 부인과 관련하여 율포해변가에서 쓴 다음과 같은 애절한 시(詩)가 있다.

‘동해에 배 떠나니 가신임을 어이하리
속절없는 피눈물에 잦아지니 목숨이라
사후에 넋이 곧 있으면 임의 뒤를 따르리라‘

왜국에 간 박제상은 왜왕에게 ‘계림왕이 죄없는 제 부모와 형제를 처형하기에 도망왔다’고 거짓으로 고하고 ‘신라왕에게 원한이 많은 제가 신라의 인질, 미해 왕자의 감시역을 맡게 해달라’고 부탁해 승낙을 받는다. 그 후 시간이 날 때마다 그를 데리고 바닷가에 나가 물고기와 새를 잡아 왕에게 받쳐가며 환심을 산다. 그러면서 신라 탈출 계획도 착착 진행시켜갔다.

▲왕자는 왜국을 탈축하고 박제상은 화형을 당하다.
어느날 안개가 낀 새벽, 신라사람(강구려)의 안내로 미해 왕자를 탈출시키고 자기는 남아 뒷일을 수습·책임지기로 했다. 전모가 탄로나 왜왕의 문초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왕은 그에게 왜국의 신하가 되겠다고 하면 용서하고 후한상을 내리겠다고 회유까지 하게된다. 그러나 박제상은 “나는 신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네 신하가 되지 않겠다”고 하며 끝끝내 신라의 신하임을 강조했다.

왜왕은 그의 발껍질을 벗기고, 칼날같이 예리한 풀잎위를 걷게해 피를 흘리게 하는 등 악형을 계속했으나, 신라왕에 대한 충절의 의지를 꺾지 못하고 결국 ‘목도(木島)’라는 섬에보내 화형을 시키고 말았다.

▲박제상부인 치술령 망부석이 되고 치술신모가 되다
한편 눌지왕은 동생 미해를 만나자 잔치를 베풀고 대사령을 내렸다. 박제상에게 ‘대아찬’ 벼슬을 내리고 그의 부인을 국대 부인으로 책봉하였으며 그의 둘째 딸을 보해의 부인으로 삼아 박제상 가족에게 은혜를 갚았다고 전한다. 그 후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심정을 견디지 못해 딸을 데리고 날씨가 좋으면 대마도가 보인다는 치술령(765m)에 올라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한결같이 그를 기다리다 죽었는데 몸은 ‘망부석’이 되고 넋은 ‘은을암’이 되어 지금까지 남겨져 전해오고 있다. 망부석은 치술령 큰바위면에 ‘望夫石’이라 쓰여있고, 은을암(隱乙庵)은 치술부인의 넋이 새가되어 국수봉 바위굴에 숨어들어가 바위가 되었는데, ‘새가 숨은 바위’라고 전한다. 이 두 돌(바위)은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호인 ‘박제상 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나중에는 박제상 부인이 치술산 신모가 되어 남편과 치술령 일대를 수호하는 신( )으로 신성시되었다고 전한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hanmail.net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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