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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최고의 석조미술품, 석굴암<2>

석굴암은 이렇게 변천하여 왔다.
하성찬 시민전문 기자 / 1413호입력 : 2019년 11월 07일
↑↑ 하성찬
시민전문기자
석굴암이 751년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석불사로 창건된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기록이 빈곤하여 변천과정을 알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석굴암과 관련해 현존하는 기록으로는 『불국사고금창기』와 정시한의 『산중일기』 등이 있다.

18세기에 들어서 쓰인 『불국사 고금창기』에 의하면 1703년(숙종29년)에 종열이 석굴암을 중수하고 굴 앞에 돌계단을 쌓았으며, 1758년(영조 34)에 대겸이 중수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중수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가 없다.

또 숙종 때 정시한의 기행문 『산중일기』에는 중수와 관련된 직접적인 기록은 없으나 당시 석굴암의 현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1688년 5월 15일 정시한이 이곳을 찾았을 때 석굴의 전실과 후실의 석상들이 완전한 형태로 건재할 뿐 아니라 입구의 홍예, 본존상과 좌대, 주변의 여러 조각, 천개석들이 모두 질서 정연하게 자리 잡고 있다고 하였으므로 이때까지는 석굴의 상태에 이상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승려·시인·신도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남긴 시가 있다. 영조 때 사람인 남경희는 ‘우중숙석굴(雨中宿石窟)’과 ‘석굴’이라는 시를 남겼으며, 이관오는 ‘석굴암’을 최천익은 ‘유석굴증등여상인(遊石窟贈登如上人)’이라는 한시로 석굴암의 존재와 그 종교적 의의를 표현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2~300년 전만 해도 석굴암이 잘 보존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말기에 석굴은 울산병사 조순상에 의해 크게 중수되었는데 이것이 조선시대 마지막 중수로 보인다. 1962년에 시작된 수리 때에 석굴암 부근의 노인들은 이 석굴을 가리켜 ‘조가절’로 불렀고, 그들의 어린 시절에 향화와 공양이 그치지 않았다고 한 바가 있다. 일본인들이 집배원에 의해 굴이 처음 발견되었다고 하는 것은 사실과 다른 것이다. 일제는 1907년 경 집배원이 우연한 기회에 이 석굴을 처음 발견하였다고 과장하여 선전함으로 우리 민족이 문화재 관리도 제대로 하지 않는 열등한 민족으로 폄하하였던 것이다.

그 뒤 일본인들에 의해 적지 않은 반출 및 파손행위까지 있었으며, 나아가 석굴 자체를 해체하여 이전하려는 계획까지 세우게 된다. 그러나 한일합방으로 굳이 석굴을 이전할 필요가 없어지고 현지 주민들의 강한 반발로 이 계획은 좌절되었다.

1912년 초대 총독 데라우찌가 이곳을 방문한 뒤 총독부는 석굴암 중수를 위한 대책을 세웠다. 이 시기의 중수는 전후 세 차례에 걸쳐 행해졌는데, 1차는 1913년-1915년, 2차는 1917년, 3차는 1920-1923년에 이루어졌다.

1차 중수는 거의 완전 해체한 후 복원하는 공사였다. 1912년 6월 25일자 현황조사 복명서에 의하면 석굴암은 황폐화되어 절박한 상황에 있었다고 한다. 이때 보수에 사용한 시멘트로 인해 오늘날까지 석굴암 보존상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이후 2년이 채 되지 않아 석굴 내에 누수현상이 나타났다. 누수의 양이 점차로 많아져 1917년 7월 이를 보완하는 2차 공사를 하였으나 누수 등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중수 과정에서 불상이 손상되고 주위 경관을 파괴했다는 비판으로 다시 3년 만에 대규모 중수공사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3차 중수는 1920년 9월 3일 기공해 1923년까지 4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러나 석굴 내부 및 외부적으로 대규모 보수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로와 침수가 계속되 어 수시로 부분적인 보수를 했다.
그러나 근본적인 보수를 하지 못한 채 광복을 맞이하게 됐다.

1961년 각계각층의 관심과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누수 등의 현상과 불상의 풍화에 대한 조사를 비롯하여 일제 강점기에 잘못된 중수로 인한 굴 자체의 구조와 불상들의 위치에 대한 조사가 있었다. 이 조사 결과에 따라 1962-1964년에 걸쳐 석굴암의 전면적인 보수공사가 시작됐다.

목조건물을 지어 외부의 변화 및 영향을 배제하였고, 지하수가 굴 주변에 접근하지 못하게 배수구를 설치했다. 이 밖에도 석굴에 영향을 주는 자연조건을 일일이 제거하는 등 일본인들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굴 내 조각의 위치에 관하여는 팔부신중 가운데 가장 앞에 있던 좌우 각 한 상이 금강역사와 마주 서게 굴곡 배치하였던 것을 다른 신중상과 일직선으로 병렬시켰다. 또 수광전·삼층석탑·요사 등의 부속 건물 등도 보수했다. 그러나 이 60년대의 개보수공사는 아직까지도 석굴암의 원형을 보존하려는 학자들 사이에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특히 겸재 정선이 1733년 그린 ‘교남명승첩’에는 석굴암 그림에 목조건물이 그려진 것을 근거로 목조 전실을 새로이 추가하였다. 그런데 그 뒤 규장각 지도를 정리하던 중 토함산 지도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지도에서 목조 전실이 있는 사찰이 석굴암이 아니라 기림사 입구에 있는 골굴사라는 것이 밝혀졌다.

법화경에 ‘변독위약(變毒爲藥)’이란 말이 나온다. 독이 변해 약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동안의 보수공사가 지금까지는 석굴암 보존에는 독이 되었으나 이제는 그 독이 변해 약이 될 것이라고 믿고 싶다.
하성찬 시민전문 기자 / 1413호입력 : 2019년 11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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