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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충신을 위한 숭의당(崇義堂)의 자취를 찾아서


경주신문 기자 / gjnews21@hanmail.net1422호입력 : 2020년 01월 09일

↑오상욱 시민전문기자
경북고전번역연구원장
옛 경주부 진평왕의 원우(願宇:원찰) 곁에 신라시대 충신 박제상(朴堤上)과 김후직(金后稷)을 기리기 위한 숭의당(崇義堂)이 있었고, 금오산 북쪽에는 학고서원(鶴臯書院)이 있었다고 전하지만 아쉽게도 그 흔적을 찾기는 힘이 든다. 다만 무명자(無名子) 윤기(尹愭,1741~1826)는 「영동사(詠東史)」를 통해 신라왕의 사당건립과 변천에 대해 언급하는 등 신라의 역사에 대한 해박함을 가졌고, 『무명자집』문고(文稿)·책11에 「숭의당상량문」과 「학고서원기」를 기록하며 이들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구태여 조선후기에 이르러 신라의 충신을 기록한 의도를 무엇일까? 윤기는 근기남인(近畿南人)의 명문가 후손으로 가난하지만 청렴하고 지조있는 삶을 살았고, 사회의 부정과 부패에 깊은 탄식을 하며, 오로지 학문저술을 통해 시대의 암울함을 위로했다. 당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와 노론과 남인이 격돌하는 위기의 시대를 겪으며 의(義)의 중요성을 인식했고, 숭의당 건립에 자진해서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숭의당 상량문은 무명자가 1812년 72세에 지은 글로, 이미 천년이나 지난 일을 회복하려고 한 의도가 다분하며, 이에 대해서는 깊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박제상은 눌지왕이 미사흔(未斯欣)과 복호(卜好) 두 아우를 귀국시키고자 고심하던 차에, 구출임무를 자임했다. 북쪽의 고구려를 설복시켜 복호를 환국시키고, 또 남쪽의 왜왕(倭王)을 속여 미사흔을 몰래 귀국시켰다. 정작 자신은 붙잡혀 다리 가죽을 벗기고 베어낸 갈대 끄트러기 위를 걷고, 또 달군 쇠붙이 위에 세워놓는 고문을 당하며, 어느 나라 신하냐고 물을 때마다 박제상은 “계림의 신하이다”라 대답했고, 결국 불타 죽임을 당했다.

김후직은 진평왕이 사냥을 좋아하기에 여러 차례 간절한 간언(諫言)을 올렸으나 끝내 듣지 않자, 죽음이 임박해 임금이 다니는 길 곁에 묻어 달라고 아들에게 유언했다. 사후 무덤 속에서도 왕에게 사냥을 가지 말라는 소리를 냈고, 왕이 눈물을 흘리며 다시는 사냥을 가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러한 박제상의 충절과 김후직의 강직함은 시대를 거듭해 전하고, 경주의 문인들도 임금과 신하 간의 의(義)를 숭상하기 위해 사당을 짓기에 이른다. 하지만 김유신·설총·최치원을 배향한 서악서원과는 달리 숭의당·학고서원 등은 그 흔적조차 찾기가 힘든 현실이 됐으니 지난 세월의 고됨과 향전(鄕戰)을 상상케 한다.

-숭의당 상량문

지난 백대에나 앞으로 올 백대에나 상하로 고금의 일을 두루 논하건대, 신하가 돼 신하의 본분을 다하고 절의가 전후로 함께 드러났다. 무릇 억지로 할 수 없는 일을 능히 했으니, 이것은 사람이 능히 하기 어려운 일을 말한다.

신라의 대아찬 박제상 공은 파사왕(婆娑王)의 5세손으로, 삽량주(歃良州)의 태수였다. 충의가 평소에 드러나 일찍이 가슴속에 맹세했고, 지용(智勇)을 겸비해 일찍이 온 나라의 기대를 받았다. … 차라리 계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타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는 외침의 소리는 더욱 매섭고 마음도 더욱 굳건하다. 우리 임금의 우애를 이루어 주고자 했으니, 어찌 다만 이 한 몸 가루가 된들 삼군의 장수는 빼앗을 수 있어도 이 뜻만은 바꿀 수 없다.

다리 가죽을 벗기고 베어낸 갈대 끄트러기 위를 달리게 하며 어느 나라 신하냐고 물었고, 온갖 혹독함으로 달군 철판 위에 서게 했으나, 마치 땅을 달리듯 편히 여겼다. 

몸은 비록 죽었지만, 절개는 사라지지 않고, 불로 태웠지만 그 충정은 태울 수 없다. 늠름한 기개는 우뚝하여 지금도 뵙는 듯하고, 혹독한 형벌을 다 받았으니, 예전에도 이런 경우는 없었다. … 이찬 김후직 공은 지증왕의 증손으로, 관직은 병부령(兵部令)이다. 습유(拾遺)·보궐(補闕)이 되어 금세의 간신(諫臣)을 자임하고, 정성을 모아 임금을 바로잡고자 옛사람의 시간(尸諫)을 사모하였다. … 이 두 공의 그 사적이 비록 다를지라도 그 충성을 말하자면 서로 닮았다. 그 마음은 쇠와 돌 같고, 그 지조는 얼음과 서리 같으며, 사르고 또 사르는 열장부(烈丈夫)라 모두 칭송한다. 입과 혀로 간쟁하고 혼(魂)과 백(魄)으로 직언했으니, 죽어도 죽지 않는 기남자(奇男子)라 할 만하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향했으니, 어찌 시대가 다르고 행적이 다름을 논하겠는가? 

우리는 모두 월성의 평범한 사람으로, 천백 년 동안 두 분의 풍의(風義)를 흠모하였다. 동사(東史)에 남은 자취를 모았으니, 일찍이 책을 덮고 탄식을 일으키지 않은 적이 없고, 읍서(邑書)에 참된 사적을 징험했으니, 어찌 그곳에 찾아가 사모함이 없겠는가? 이에 진평왕의 원우(願宇) 곁에 두 충신을 위한 원향(院享)의 의식을 거행하게 됐다. 비학산(飛鶴山) 앞에 터를 점치니 산수는 밝고 아름답고, 금오산(金鰲山) 북쪽에 기초를 정하니 거북점과 시초점이 모두 길했다. … 처음엔 마음속의 경영에 불과하더니 뜻밖에 눈앞에 우뚝하였다. … 이에 상절사(尙節祠), 숭의당(崇義堂)이라 이름했다.
경주신문 기자 / gjnews21@hanmail.net1422호입력 : 2020년 01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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